)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는데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한다. 이것은 곧 일본을 막는 요새(要塞)가 되기도 했다.
둘레는 6,792보(步) 5척(尺), 여기에 쓰인 인부(人夫)는 3만 9,262명이고 역사를 감독한 사람은
원진각간(元眞角干)이었다.
개원(開元) 21년 계유(癸酉[733])에 당(唐)나라 사람들이 북적(北狄)을 치려 하여
신라에 군대를 청해 왔다. 이때 사신 604명이 신라에 왔다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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