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後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진한(辰韓)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여, 마치 진(秦)나라 말에 가까웠다. 그런 때문에 혹은 이곳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각각 1만호(萬戶)나 되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탁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邑)과 마을을 사탁(沙탁)·점탁(漸탁)이라고
불렀다."[신라新羅 사람의 방언方言에 탁탁의 음音을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하는데, 양梁을 도道라고도
읽는다]
신라(新羅) 전성기(全盛期)에는 서울에 17만 8,936호(戶), 1,369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윤富潤한 큰집을 말함])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우比所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재매정택(財買井宅[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반향사反香寺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 남쪽])·한기택(漢岐宅[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위와 같음]·판적택(板積宅[분황사상방芬皇寺上坊])·별교택(別敎宅[내의 북쪽])·아남택(衙南宅)·금양종택(金梁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내의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
우소택우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청룡사靑龍寺의 동쪽으로 못이
있음])·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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