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KH7 P.07-01 001] 우리의 근대 사회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자주적인 발전이 좌절되고 근대적인 국민 국가를 수립하는데 실패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가혹한 수탈과 민족 말살 통치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민족 독립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우리가 근대 사회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주적 근대화의 노력, 반침략 민족 운동의 전개, 일제 식민 지배의 실상,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KH7 P.07-02 002] 8 · 15 광복 이후 현대사의 과제는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 통일 국가의 수립과 자립 경제의 달성이었다. 아울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 될 수 있는 사회의 건설, 전통 문화의 계승을 토대로 한 현대 문화의 발달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통일 국가의 수립에 실패하고 6 · 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 달성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이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KH7 P.07-03 003] 안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19세기 후반에 문호를 개방한 조선 사회는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KH7 P.07-04 004] 일제는 가혹한 수탈을 감행하였고, 나아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맞서 무장 독립 투쟁,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독립 외교 활동 등을 통하여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일제에 대항하였고, 1945년에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였다.
[KH7 P.07-05 005] 그러나 한반도에 주둔한 미ㆍ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과 좌우익 갈등의 격화로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된 민족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특히, 6 · 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고착화되고 긴장은 고조되었다.
[KH7 P.07-06 006] 6 · 25 전쟁 이후 장기 집권을 시도한 일부 집권자들로 말미암아 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기도 하였지만 4 · 19 혁명과 6월 민주 항쟁 등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 아울러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줄기차게 이루어져 왔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1) 개화와 자주 운동 - 조선 말기의 국내 정세]
[KH7 P.07-07 007] 19세기 중엽 조선의 전통 사회는 커다란 변화와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KH7 P.07-08 008] 고종의 즉위와 함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세도 가문의 인물들을 몰아 내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또,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600여 개소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 남긴 채 철폐, 정리하였다. 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KH7 P.07-09 009]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는 등 법전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KH7 P.07-10 010]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통상 수교 요구를 거절하는 한편,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받아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었지만, 강화도에서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후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1) 개화와 자주 운동 - 개항과 개화 정책]
[KH7 P.07-11 011]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하면서 문호 개방의 여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 등 세 항구의 개항이 이루어졌으나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뒤이어 일본과 통상 장정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반면, 조선은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이어서 미국과 조ㆍ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과 맺은 조약 역시 치외법권과 최혜국(最惠國)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KH7 P.07-12 012]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일본과 청에 사절단을 보내 신식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KH7 P.07-13 013]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처음에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다가 뒤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KH7 P.07-14 014]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 결과 청의 내정 간섭과 정부의 친청 정책으로 인하여 개화 정책은 후퇴하였다.
[KH7 P.07-15 015] 이에 대한 반발로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삼일천하로 끝난 이 정변은 개혁 주체의 세력 기반이 약했던 점, 외세에 의존하면서 정변의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였던 점, 청의 무력 간섭 등으로 실패하였다. 그 결과, 청의 내정 간섭이 더욱 심해졌고, 개화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1) 개화와 자주 운동 -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KH7 P.07-16 016]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KH7 P.07-17 017]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ㆍ사회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KH7 P.07-18 018]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낼 목적으로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ㆍ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KH7 P.07-19 019] 이 운동은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당시의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으며, 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의병 운동에 가담하여 반일 무장 투쟁을 활성화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1) 개화와 자주 운동 - 근대적 개혁의 추진]
[KH7 P.07-20 020] 개항 이후 쌓여 온 여러 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높아진 가운데 농민들의 개혁 요구가 거세어지자, 정부에서는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의 내정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으며, 이로써 민씨 정권은 붕괴되고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김홍집 내각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초정부적 회의 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때 실시된 개혁을 갑오개혁이라 한다(1894).
[KH7 P.07-21 021] 그 내용은 정치면에서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사회면에서는 신분제의 철폐와 각종 전통적인 폐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 면에서의 개혁이나 농민들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종은 국정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하였으며, 청ㆍ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
[KH7 P.07-22 022] 한편, 명성 황후가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견제하려 하자, 일제는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1895), 친일 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친일 내각은 중단되었던 개혁을 계속 추진하여 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등의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KH7 P.07-23 023]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일본의 침략 의도가 반영된 것이지만, 전통 질서를 타파하는 근대적 개혁이었고, 조선의 개화 인사들과 농민층의 개혁 의지가 일부 반영된, 민족 내부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노력이기도 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1) 개화와 자주 운동 - 항일 의병 투쟁의 시작]
[KH7 P.07-24 024] 청ㆍ일 전쟁의 결과 한반도에서 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이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민족적 저항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 의병 투쟁이었다.
[KH7 P.07-25 025] 최초의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을미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농민들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KH7 P.07-26 026] 이 무렵, 일본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를 아관 파천(1896)이라 한다.
[KH7 P.07-27 027] 아관 파천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고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지자, 을미의병은 대부분 자진 해산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2)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 독립 협회와 대한 제국]
[KH7 P.07-28 028]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성립되어 일본의 침략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자주성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 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KH7 P.07-29 029] 독립 협회는 근대 개혁 사상을 지닌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도부를 이루고,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에 불만을 품은 도시 시민층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독립 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의 개최, 신문과 잡지의 발간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ㆍ민권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로써 독립 협회는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려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았고, 민중에 기반을 둔 사회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운동, 자유 민권 운동, 국민 참정권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함으로써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KH7 P.07-30 030] 그러나 시민 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구식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보수 세력은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독립 협회를 탄압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독립 협회는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KH7 P.07-31 031] 한편,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지 약 1년 만에 고종은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의 우월적 지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1897).
[KH7 P.07-32 032]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시정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황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였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도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2)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KH7 P.07-33 033] 일제는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한ㆍ일 의정서를 강요하고, 나아가 제1차 한 ㆍ 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1904)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또, 러 ㆍ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일방적으로 소위 을사조약의 성립을 발표하여(1905)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KH7 P.07-34 034]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영환 등은 자결로써 항거하였으며, 조병세 등은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 또, 5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KH7 P.07-35 035] 고종은 국내외에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대한 매일 신보에 친서를 발표하여 황제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1907). 일제는 이를 트집잡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KH7 P.07-36 036]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을사의병에서는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폐기와 친일 내각의 타도를 내세우고 무장 항전을 벌였다.
[KH7 P.07-37 037]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조직과 화력이 강화되었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산되었다. 한편, 전국의 의병 부대는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이른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1908). 그리고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의병들은 국내 진입 작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KH7 P.07-38 038] 의병 전쟁은 일본군의 잔인한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많은 의병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으며, 일부는 국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KH7 P.07-39 039] 의병 전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광범한 사회 계층을 망라하였으나, 일본의 정규군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또,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이 전통적 지배 질서의 유지를 고집하였으므로 대다수 농민 의병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KH7 P.07-40 040] 그러나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민족 구국 운동이었고,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울러 의병 전쟁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나아가 일제의 지배하에서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2)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KH7 P.07-41 041] 독립 협회가 해체된 뒤 개화 자강 계열의 단체들이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그리고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KH7 P.07-42 042] 대한 자강회는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의 기초를 만들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해체되었다.
[KH7 P.07-43 043]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 개발 및 민권 신장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활동이 약화되자, 국권 회복 운동의 큰 흐름은 신민회로 이어졌다.
[KH7 P.07-44 044] 신민회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고, 국내에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외에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KH7 P.07-45 045] 이러한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성과면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과 그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독립 운동 - 국권의 피탈과 민족의 수난]
[KH7 P.07-46 046]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제는 한ㆍ일 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간섭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마침내 대한 제국의 국권마저 강탈하였다(1910).
[KH7 P.07-47 047]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여 언론ㆍ집회ㆍ출판ㆍ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립 운동을 말살하려 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ㆍ사법ㆍ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총독부의 관리는 거의 일본인이 차지하였고, 자문 기관인 중추원을 두어 친일파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이는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KH7 P.07-48 048] 일제는 2만여 명의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여 무단 식민 통치를 자행하였다. 헌병 경찰의 주된 업무는 경찰의 임무를 대행하고 독립 운동가를 색출하여 처단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즉결 처분권이 있어 우리 민족에게 태형을 가하고, 재판 없이 우리 민족을 구류에 처하였다. 이에 수만 명의 인사가 구국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고 수난을 당하였다.
[KH7 P.07-49 049] 3ㆍ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 일제가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오히려 일제는 문화 통치를 통하여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의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양성하려 하였다.
[KH7 P.07-50 050]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고, 이어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을 취하고, 인적 · 물적 자원의 수탈에 광분하였다.
[KH7 P.07-51 051] 일제는 내선 일체, 일선 동조론, 황국 신민화 등을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없게 하였다. 또,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는 물론 성씨와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게 강요하였다.
내선 일체(內鮮一體) 내는 내지인 일본을, 선은 조선을 가리킨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 일선 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이 같다는 이론으로, 한국인의 민족 정신을 근원적으로 말살하기 위한 것이다. | 황국 신민 서사(皇國臣民誓詞)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요지이다. |
[KH7 P.07-52 052]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한편,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패전 후에는 류큐나 중국 하이난 섬 등지에서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기도 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독립 운동 - 3ㆍ1 운동]
[KH7 P.07-53 053]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광복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잃지 않고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국내에서는 독립 의군부, 대한 광복회, 조선 국권 회복단 등 수 많은 항일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무장 투쟁의 전통을 계승하고 독립 전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무수한 애국지사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의 독립 의지가 하나로 결집되어 폭발한 것이 3ㆍ1 운동이었다.
[KH7 P.07-54 054] 국권을 강탈당한 후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 자결주의와 2ㆍ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하였다(1919. 3. 1.). 이에 서울과 지방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거족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KH7 P.07-55 055]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ㆍ상인ㆍ노동자들이 참가하면서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까지 파급되었다. 비폭력 독립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토지 회사,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까지 바뀌어 갔다. 이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
[KH7 P.07-56 056] 3ㆍ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3ㆍ1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독립 운동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KH7 P.07-57 057] 3ㆍ1 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선포한 우리 민족은 좀더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독립 전후의 국민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 국내의 한성 정부, 중국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세 정부가 하나로 통합되어 상하이에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하였다.
[KH7 P.07-58 058]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의 헌정 체제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였다. 이러한 헌정 체제는 5차에 걸친 개헌을 통하여 주석ㆍ부주석 체제로 개편되었다.
[KH7 P.07-59 059] 초기의 임시 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임무를 담당해 갔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으로서, 군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다.
[KH7 P.07-60 060] 임시 정부는 외교 활동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도록 함으로써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KH7 P.07-61 061] 또,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 ㆍ 일 관계의 사료집을 간행함으로써, 안으로는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밖으로는 한국의 자주성과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켰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독립 운동 - 국내의 항일 운동]
[KH7 P.07-62 062] 3ㆍ1 운동 이후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6ㆍ10 만세 운동이나 광주 학생 항일 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조직적인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KH7 P.07-63 063] 학생들은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대규모 군중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1926).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6ㆍ10 만세 운동은 이후 각급 학교로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 투옥되었다.
[KH7 P.07-64 064] 6ㆍ10 만세 운동 이후 항일 결사를 조직하여 투쟁을 전개하던 학생들은 광주에서 발생한 한ㆍ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일본 경찰이 편파적으로 처리하자 일제히 궐기하였다(1929). 학생들의 투쟁에 일반 국민들이 가세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투쟁으로 확대되었고, 만주 지역의 민족 학교 학생들과 일본 유학생들까지 궐기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약 5개월 동안 전국의 각급 학교 학생 54,000여 명이 참여함으로써 3ㆍ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KH7 P.07-65 065] 한편, 3ㆍ1 운동 이후 무장 항일 투쟁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국내에서도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평북 동암산을 근거지로 한 보합단, 평북 천마산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 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대 등이 대표적인 무장 단체였다. 이들은 만주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 파괴, 일본 군경과의 교전, 친일파 처단, 군자금 모금 등의 무장 항일 투쟁을 벌여 나갔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독립 운동 - 항일 독립 전쟁의 전개]
[KH7 P.07-66 066]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신민회 회원 중심의 애국지사들은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한민족의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근대적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회영과 이상룡 등이 설치한 남만주의 삼원보, 이상설과 이승희 등이 세운 밀산부의 한흥동,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은 대표적인 독립 운동 기지였다.
[KH7 P.07-67 067] 3ㆍ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의 방식을 지양하고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3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서도 1920년에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이 승리한 봉오동 전투,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군과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거둔 청산리 대첩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 밖에도 독립군은 군자금 모금, 밀정 처단, 친일파 숙청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KH7 P.07-68 068] 일본군이 거듭된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키자,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연해주를 거쳐 자유시로 옮겨 갔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독립군은 큰 타격을 받았다.
[KH7 P.07-69 069]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건너에서는 임시 정부 직할의 참의부가, 남만주 일대에서는 정의부가, 북만주 일대에서는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이들 3부는 각각 민주적 민정 기관을 두고 입헌 정부 조직까지 갖추었으며,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는 군정 기관을 설치하였다. 또, 자체의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KH7 P.07-70 070] 한편,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통합을 꾀하여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독립군의 활동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큰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곧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KH7 P.07-71 071] 한편,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각처에 산재해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광복군은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고,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를 일부 통합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특히,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KH7 P.07-72 072] 그 밖에도 중국의 화북 지방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독립 운동을 추진하던 사회주의 세력은 화북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조선 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4) 대한 민국의 발전 - 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KH7 P.07-73 073] 국내외의 끈질긴 독립 전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1945. 8. 15.). 그동안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우리 민족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해 왔다.
[KH7 P.07-74 074]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규정한 대한 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중국 화북 지방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도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건국 준비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조선 건국 동맹이 조직되어 일제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하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여운형이 중심이 된 단체로서, 광복 직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건국 작업에 착수하였다.
[KH7 P.07-75 075] 우리 민족은 감격적인 광복을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 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 · 소 양군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였기 때문이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곧 군정을 실시하면서 친미적인 우익 정부의 수립을 후원하였다. 북한에서도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숙청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아 나갔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민족 분단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KH7 P.07-76 076] 한편,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 소련 · 영국의 3국 외상 회의(1945. 12.)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 · 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최고 5년간의 한반도 신탁 통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은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이에 분단을 우려한 인사들의 좌우 합작 운동과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 협상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4) 대한 민국의 발전 - 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KH7 P.07-77 077]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5ㆍ10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이 제정되었다(1948). 이어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 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KH7 P.07-78 078] 건국 초기에는 국내 질서의 확립과 일제 잔재의 청산이 시급한 과제였다.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도 4ㆍ3 사건과 여수ㆍ순천 10ㆍ19 사건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좌우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반공 정책을 강화하였다.
[KH7 P.07-79 079]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 제헌 국회에서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에 따라 국회 의원 10명으로 구성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친일 혐의를 받았던 주요 인사들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반공을 우선시하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다.
[KH7 P.07-80 080]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어(1946. 2.) 사실상 정부의 구실을 하였다. 그 후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한 뒤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48. 9. 9.). 이어 북한 정권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무력 남침을 준비하고,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남침을 감행하였다.
[KH7 P.07-81 081] 이후 3년간 계속된 6ㆍ25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살상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남북 간에는 적대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4) 대한 민국의 발전 -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KH7 P.07-82 082] 6ㆍ25 전쟁 때부터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강화하고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KH7 P.07-83 083] 1960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으며,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확산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4ㆍ19 혁명이 일어났다(1960).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KH7 P.07-84 084] 과도 정부는 헌법을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의 권력 구조로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장면 내각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안보 체제를 확립하면서 경제ㆍ사회의 발전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고,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을 앞당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 등으로 이러한 과업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KH7 P.07-85 085]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사회의 혼란을 구실로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1961. 5. 16.). 이를 5ㆍ16 군사 정변이라 한다. 군부 세력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민정 복귀의 약속을 저버린 채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의 권력 구조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KH7 P.07-86 086]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의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ㆍ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KH7 P.07-87 087] 한편,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을 추구하던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1972).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의 끊임없는 저항과 독재 체제에 대한 도전 속에서 10ㆍ26 사태가 일어나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1979).
5ㆍ18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신군부의 집권 의도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계엄군의 과잉 진압으로 광주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시민군이 결성되어 계엄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
6월 민주 항쟁 1987년에 6월에는 전국에서 격렬한 시위가 연일 심야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전두환정부는 대통영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시국 수습안인 6ㆍ29 선언을 발표하였다. |
[KH7 P.07-88 088] 이 무렵에 새로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하였고(1979. 12. 12.), 5ㆍ18 민주화 운동(1980. 5. 18.)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다시 좌절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의 구현, 복지 사회의 건설 등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부정과 비리 사건을 일으켜 국민적 저항에 부딪쳤다.
[KH7 P.07-89 089]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에서도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결국 6월 민주 항쟁으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수용되어 6ㆍ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다(1987).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KH7 P.07-90 090] 그러나 뒤이은 대통령 선거에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및 소련,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성과를 올렸다. 또, 국제 연합(UN)에 남북한이 함께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역시 부정과 비리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KH7 P.07-91 091] 1993년에 성립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5ㆍ16 군사 정변 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국제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인하여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KH7 P.07-92 092] 1998년에 성립된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의 실현, 법과 질서의 수호 등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특히, 남북 간의 평화 정착을 위한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남북 정상 회담을 실현하고 남북 경제 협력의 활성화와 이산가족의 상봉을 실현하는 등 평화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4) 대한 민국의 발전 - 북한의 변화]
[KH7 P.07-93 093] 북한에서는 6ㆍ25 전쟁을 거치면서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 한층 강화되었고, 1960년대에는 김일성을 추종하는 강경파가 권력을 독점하였다.
[KH7 P.07-94 094] 북한은 전후 복구와 자립적 민족 경제 확립을 목표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중공업과 경공업의 병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 주민들의 생산 노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천리마 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도 협동화를 통하여 한동안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KH7 P.07-95 095] 1960년대부터 한ㆍ미ㆍ일 안보 체제 구축과 국제 정세의 악화로 위기에 놓인 북한은 국방 건설을 위하여 이른바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하여 군수 공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울러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른바 주체 노선을 강조하였다. 대남 정책에서는 겉으로는 평화적인 남북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내면으로는 남한에 통일 혁명당을 조직하여 주체 사상에 입각한 내부 혁명을 부추겼으며, 무장 군인을 남파하여 무력 도발을 일으켰다.
[KH7 P.07-96 096] 1970년을 전후하여 북한에서는 강경 노선이 완화되고, 실무형 관료와 혁명 2세대가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을 비롯한 김일성의 친인척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였다. 7ㆍ4 남북 공동 성명을 계기로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 권력을 주석에게 몰아주었다(1972. 12.). 이후 김정일을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인하였다.
[KH7 P.07-97 097] 1980년대에 들어 김정일이 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김정일은 1990년대에 이르러 국가 기관에 대하여 직접적인 지도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그는 국방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고(1993), 김일성이 사망한 뒤 권력을 승계하였다.
[KH7 P.07-98 098] 198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특히, 북한의 국제적 고립과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경제 위기를 맞았다. 이에 중국의 개방 정책을 부분적으로 원용하여 합영법과 합작법을 제정하고 외국 기업과의 합작과 자본 도입을 적극 추진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1. 근 현대의 정치 변동 - 4) 대한 민국의 발전 - 통일을 위한 노력]
[KH7 P.07-99 099] 광복 이후 민족 통일 국가의 수립이 좌절되면서 민족의 최대 과제의 하나는 민족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6ㆍ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고착화되었고, 남한의 반공 정책과 북한의 적화 통일 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는 통일을 위한 논의조차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KH7 P.07-100 100] 4ㆍ19 혁명 직후 학생들과 일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개진되어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 협상론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논의는 5ㆍ16 군사 정변, 남북한 간의 대립 등으로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KH7 P.07-101 101] 1970년대에 들어와서 냉전 체제의 완화, 베트남의 공산화, 민주화의 요구 등 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정부는 남북 교류를 제의하고, 남북 간에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적십자 대표의 예비 회담을 열었다. 또, 서울과 평양에서 7ㆍ4 남북 공동 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다(1972. 7. 4). 이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내세운 것으로, 이후 통일 논의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KH7 P.07-102 102] 1980년대에 이르러 남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과 북한의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이 제시되었으며, 남북한의 이산 가족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였다(1985. 9.). 이산 가족 상봉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분단 후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KH7 P.07-103 103]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ㆍ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ㆍ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1991. 12.),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KH7 P.07-104 104] 1994년에는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KH7 P.07-105 105]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 교류는 활성화되었다. 정부는 이른바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민간 차원의 교류를 크게 확대하였다. 드디어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고(2000. 6. 15.)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고 있다.
[KH7 P.07-106 106] 2003년에 성립된 노무현 정부는 참여 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국정 목표로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KH7 P.07-107 107] 우리나라는 개항 이후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근대 민족 경제의 토대를 만들어 갔다. 특히, 일본의 무역 독점, 이권 침탈, 금융 지배 등의 경제 침략에 대응하여 우리 민족은 근대적 회사와 공장 등을 설립하고 민족 자본을 육성하려고 노력하였다.
[KH7 P.07-108 108]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대항하여 소작 쟁의, 노동 쟁의, 경제 자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우리 경제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왜곡하여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KH7 P.07-109 109] 광복 후 우리 민족은 사회적 혼란, 국토 분단, 6ㆍ25 전쟁 등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대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1) 열강의 경제 침탈과 경제적 구국 운동 - 개항과 농촌 경제]
[KH7 P.07-110 110]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 우리나라의 농민 경제는 악화되었다. 당시의 일본 상인은 대개 몰락한 상인이나 무사층 출신으로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들은 영사 재판권,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및 일본 화폐의 사용 등이 인정된 불평등 조약을 이용해 약탈적인 무역을 자행하였다. 또, 광목, 섬유 등 일용품을 들여와 팔고 그 대신 싼 값으로 쌀, 콩, 금 등을 사 갔다.
[KH7 P.07-111 111] 일본 상인은 고리대를 이용하여 우리 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서 점차 농장을 확대해 갔다. 특히, 청 · 일 전쟁 이후 대자본가들이 대거 침투하여 전주 · 군산 · 나주 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이러한 토지 약탈은 러 · 일 전쟁을 계기로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라는 명목 아래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국권을 빼앗길 무렵에는 1억 5천만평에 이를 정도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1) 열강의 경제 침탈과 경제적 구국 운동 - 열강의 경제적 침탈]
[KH7 P.07-112 112] 조선 후기부터 청을 통하여 유입되기 시작한 외국 물품은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되면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더구나 일본 상인들은 무관세로 많은 상품을 들여와 국내 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KH7 P.07-113 113] 개항 초기에는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 주변 10리 이내로 제한되었으나, 1880년대에는 개항장 100리까지 확대되어 외국 상인들의 활동 무대가 내륙까지 확대되어 갔다.
[KH7 P.07-114 114] 임오군란 이후 일본 상인과 청나라 상인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국내 상업은 더욱 위축되었다. 청ㆍ일 전쟁 이후 일본 상인들이 국내 상권을 거의 독점하면서 우리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다. 이어 일본은 일본 제일 은행의 지점을 설치하고, 은행 업무 외에 세관 업무, 화폐 정리 업무까지 담당하여 대한 제국의 금융을 장악하였다.
[KH7 P.07-115 115] 한편, 열강의 이권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금광 채굴권, 철도 부설권, 삼림 채벌권 등 여러 이권이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에 넘어갔다. 정부는 열강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1) 열강의 경제 침탈과 경제적 구국 운동 - 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
[KH7 P.07-116 116]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경제적 침탈로 우리의 경제력이 점차 약화되자, 농민과 상공인들은 경제적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함경도, 황해도에서는 일제의 약탈적인 곡물 유출에 대항하여 방곡령이 시행되었으며, 상인들은 상권 수호 운동을 벌여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즉, 서울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만들어 서울의 상권을 지키려 하였고, 경강 상인들은 일본에서 증기선을 도입하여 일본 상인에게 빼앗긴 운송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와 더불어 독립 협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이권 수호 운동을 벌였다.
[KH7 P.07-117 117] 일부 상인들은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나 새로운 경영 방식을 도입하고 많은 회사들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880년대 초에 대동 상회, 장통 상회 등의 상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890년대에는 그 수가 40여 개에 달하였다. 초기의 회사들은 주로 동업자 조합의 성격을 띤 상회사였으나, 대한 제국의 상공업 진흥 정책이 실시된 이후에는 해운 회사, 철도 회사, 광업 회사 등과 같은 근대적 형태의 주식 회사도 나타났다.
[KH7 P.07-118 118] 일제는 한국을 재정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하여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그 결과, 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어 상환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에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KH7 P.07-119 119] 이 운동은 서상돈 등 16명의 발기인들이 국채 보상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대구에서 개최한 국민 대회를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에서는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어 전 국민의 호응을 얻었고, 대한 매일 신보 등 여러 신문사들도 적극 후원하였다.
[KH7 P.07-120 120] 그러나 이 거족적인 경제적 구국 운동은 국채 보상 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에게 국채 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통감부의 간교한 방해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2) 일제하 민족 경제의 변화 - 식민지 수탈 경제]
[KH7 P.07-121 121] 국권 피탈 후 일제는 우리 경제를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강행된 토지 조사 사업이었다.
[KH7 P.07-122 122] 토지 조사 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KH7 P.07-123 123]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KH7 P.07-124 124] 농민들의 생활은 1920년대부터 실시된 산미 증식 계획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면서 수리 조합 사업, 토지 개량 사업 등의 비용을 농민에게 전가하고 쌀 생산을 강요하여 논농사 중심의 농업 구조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소작료가 점차 올라가고, 조합비ㆍ비료대 등을 부담하게 되어 그들의 생활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일제가 강제로 수탈해 간 미곡이 증산량보다 많아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다.
[KH7 P.07-125 125] 또, 일제는 우리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하여 광업령, 임야 조사 사업, 어업령 등을 실시하여 민족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빼앗아 갔다. 이미 통감부 시기에 화폐 정리 사업을 주도하여 민족 자본의 축적을 와해시킨 일제는 국권 강탈 이후에 허가제를 골자로 하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회사 설립과 경영을 통제하였다. 이에 민족 자본의 성장은 억제되고 일본인이 한국 공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KH7 P.07-126 126]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성장한 일제 독점 자본은 192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독점 자본들은 광업, 비료, 섬유 회사 등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공업 생산을 장악해 나갔다. 이와 같은 일본 대기업들의 경제 침략은 경제 공황으로 극심한 타격을 받은 1930년대에 한층 강화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함에 따라 전기, 제철, 중화학 공장 등 군수 공업 시설을 많이 설치하여 우리나라를 일본의 병참 기지 로 삼았으며, 침략 전쟁이 중ㆍ일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에서는 전시 통제 경제가 실시되고 식량 배급 제도와 각종 물자의 공출 제도를 강행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2) 일제하 민족 경제의 변화 - 경제적 민족 운동]
[KH7 P.07-127 127]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의 생활이 몹시 궁핍해진 상황에서 일제는 지주를 옹호하며 소작농을 억압하는 정책까지 폈다. 이에 3ㆍ1 운동 이후 정치적 사회적으로 각성된 소작농들은 1920년대부터 일본인 지주나 조선인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료 인하, 소작권 박탈 반대 등을 요구하는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 운동은 생존권 투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항일 민족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KH7 P.07-128 128] 공업 분야에서는 일제가 유통, 무역, 자본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에서 순수한 민족 자본에 의하여 직포 공장, 메리야스 공장, 고무신 공장 등 경공업 관련 공장들이 세워졌다. 공장의 규모면에서도 1910년대까지는 소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이 1~2대에서 3~4대의 기계로 제품을 생산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노동자의 수가 200명이 넘는 공장도 나타났다. 이 시기 대지주 출신의 기업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경성 방직 주식 회사가 있었고, 서민 출신의 기업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이 유명하였다.
[KH7 P.07-129 129] 또, 1920년대에는 점차 증가하고 있었던 민족 기업을 지원하고 민족 경제의 자립을 달성하기 위한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영세한 자본을 가진 민족 기업은 일본의 독점 자본과의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고, 특히 전시 체제하에서는 총독부의 물자 통제로 큰 타격을 받았다. 총독부는 기업 정비령을 통하여 민족 기업을 억압하여 강제 청산하거나 일본 공장에 흡수, 합병시켰다.
[KH7 P.07-130 130] 한편, 공장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자가 점차 증가하면서 노동자 조직도 결성되었다. 당시 노동자는 민족 차별적인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 등 노예적인 노동 조건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노동 조건 개선, 임금 인상 등을 주장하는 노동 운동을 벌였다. 이들의 노동 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성장하여 점차 항일 민족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3) 현대의 경제 발전 - 광복 직후의 경제 혼란]
[KH7 P.07-131 131] 일제하의 우리 경제는 일본 경제에 예속되어 자본과 기술이 일본인들에게 독점됨으로써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폐해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미군정하에서의 우리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원자재와 소비재 부족, 식량 부족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지하 자원과 중공업 시설이 북한에 치우쳐 있는 상황에서 국토가 분단되어 북으로부터 전기 공급마저 중단되자, 농업과 경공업 중심의 남한 경제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KH7 P.07-132 132] 대한 민국이 수립된 후 정부는 경제 정책의 기본 방향을 농업과 공업의 균형 발전, 소작제의 철폐, 기업 활동의 자유 보장, 사회 보장 제도의 실시, 인플레이션의 극복 등으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는 농지 개혁법을 제정, 시행하여 농촌 경제의 안정을 꾀하였고, 귀속 재산을 불하하여 산업 자본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2. 근 현대의 경제 변화 - 3) 현대의 경제 발전 - 경제 발전]
[KH7 P.07-133 133] 6ㆍ25 전쟁으로 남한 생산 시설의 42%가 파괴되고 전비 지출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데다가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으로 국민 생활의 어려움이 극심해졌다.
[KH7 P.07-134 134] 휴전 이후 경제 복구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정부와 국민의 노력 및 외국의 원조 등에 힘입어 전후 복구 사업은 급속히 진행되고 생산 활동도 활발하게 재개되어 갔다. 이에 1950년대 후반기부터 원조 물자에 토대를 둔 제분ㆍ제당 공업과 섬유 공업이 성장하였고, 시멘트와 비료 등의 생산도 늘어났다.
[KH7 P.07-135 135] 그러나 소비재 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한 데 비하여, 기계 공업 등의 생산재 산업은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국 경제는 생산재에서 원료에 이르기까지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취약성을 안게 되었다. 또, 농업 분야의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원조가 줄어들면서 우리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KH7 P.07-136 136] 1960년대에 들어서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공업을 발전시키고 수출을 증대시키는 등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1,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기간 산업의 육성과 경공업의 발전에 주력하였다. 1970년대에 추진된 3,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중화학 공업의 육성에 주력하여 광 · 공업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공업 구조도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바뀌었다.
[KH7 P.07-137 137] 한편, 경부 고속 국도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공항 등의 사회 간접 시설도 확충되어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어갔다. 아울러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작물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식량 생산도 증대되었다.
[KH7 P.07-138 138]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계속적인 추진과 성공으로 1962~1981년 사이에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대하는 등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 외국 자본에 의존하던 자본 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자본 집중이 심화되어 소수의 재벌이 생산과 소득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국내 산업의 수출 의존도가 심화되는 등 폐단도 나타났다.
[KH7 P.07-139 139] 1970년대 이후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나고 민주화 운동의 진전과 함께 사회 의식이 높아지면서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임금 인상, 노동 조건의 개선, 기업가의 경영 합리화와 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 등을 주장하는 노동자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KH7 P.07-140 140]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정부는 저임금 문제 등 전반적인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 관계법을 개정하였으며, 기업가와 노동자의 인간적 관계와 직업 윤리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새로운 노사 문화가 정착되고 노동 환경 개선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생산성도 높아지고 있다.
[KH7 P.07-141 141]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업은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역 대상국도 미국과 일본 중심에서 벗어나 유럽, 동남아시아, 중국, 남미 등지로 다변화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밀접한 경제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경제의 한 축을 만들어 가고 있다.
[KH7 P.07-142 142]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적 주요 경제 국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아시아ㆍ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에도 적극 참여하여 미국, 일본 등과 함께 이 지역의 경제 협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어 개방된 시장 경제와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선진국 중심의 경제ㆍ사회 정책 협의체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여 우리의 경제 활동을 강화하여 나가고 있다. 한편, 1990년대 후반 세계 경제의 침체 속에서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슬기롭게 대처함으로써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KH7 P.07-143 143]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 확산된 서양의 종교와 사상은 전통 사회 및 신분 질서의 붕괴를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의 근대화 운동으로 인재의 등용은 신분에서 능력 위주로 바뀌어 갔고, 노비와 여성에 대한 의식도 점차 바뀌어 이들도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KH7 P.07-144 144] 민권에 대한 국민 의식의 변화는 일제하에서 거족적인 3ㆍ1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우리 민족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차별에 맞서 소작 쟁의와 노동쟁의를 전개하였는데, 여기에는 새로이 수용된 사회주의 사상도 작용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통합되어 보다 효과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노력에서 신간회와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KH7 P.07-145 145] 광복 이후에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노동 문제, 환경 문제, 여성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정부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복지 사회의 건설과 환경 보전 등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1) 평등 사회의 추구 - 평등 의식의 확산]
[KH7 P.07-146 146] 19세기에 들어와 평등 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종래의 신분 제도에 서서히 변화가 나타났다. 여기에는 종교의 힘이 컸다. 처음에는 서학으로 전래되었던 천주교와 이어 등장한 동학, 그리고 개신교의 전파는 사회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KH7 P.07-147 147] 조선 후기에 전래되기 시작한 천주교는 19세기 중엽에 교세가 확장되어 평등 의식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초기에 신도의 중심을 이루던 양반은 조상 제사 문제로 교회에서 멀어지고, 점차 중인과 평민의 입교가 증가하였다. 특히, 부녀자 신도가 많았다.
[KH7 P.07-148 148] 동학은 현세를 말세로 규정하고, 천지개벽에 의한 미래의 이상 세계가 반드시 도래한다고 하는 사회 혁명적 예언으로 백성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적서 차별, 남존여비를 부정하는 인간 평등주의로서 평민층 이하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KH7 P.07-149 149] 개신교는 포교의 수단으로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의료 사업을 전개하여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전래된 개신교는 선교 과정에서 한글의 보급, 미신의 타파, 남녀 평등 사상의 보급, 근대 문명의 소개 등을 통하여 사회와 문화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애국 계몽 운동에도 이바지하였다.
[KH7 P.07-150 150] 갑신정변의 개혁 요강도 신분 제도에 변화를 일으켰다. 양반 신분 제도와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인민 평등을 실현하려 한 개화파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었다. 이들은 문벌과 신분 제도가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일 뿐 아니라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1) 평등 사회의 추구 - 동학 농민군의 사회 개혁 운동]
[KH7 P.07-151 151] 고부 봉기를 필두로 전개된 동학 농민 운동은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동학 농민군들은 각 지역에서 독립된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제시하였다. 이 가운데 향촌에서 반상을 구별하는 모든 관행을 부정하고 천민층의 신분 해방 운동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KH7 P.07-152 152] 농민군들은 폐정 개혁안에서 탐관오리ㆍ횡포한 부호ㆍ양반 유생의 징벌, 노비 문서의 소각, 천인들에 대한 처우 개선, 과부의 재가 허용, 모든 무명 잡세의 폐지, 문벌과 지벌을 타파한 인재 등용 등을 주장하였다. 농민군들이 지주 전호제를 인정한 지조법 개혁을 넘어서 토지의 평균 분작을 요구한 것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KH7 P.07-153 153] 이들은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기들이 주장한 개혁 사업들을 벌여 나갔다. 농민군의 집강소에서는 폐정을 개혁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비 문서와 토지 문서를 소각하고 창고를 열어 식량과 금전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그동안 받아 왔던 불만을 폭발시켰다.
[KH7 P.07-154 154] 농민군들의 행동에 대하여 양반 계층은 지배층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일부의 양반들은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과 싸움을 벌였다. 이러한 신분 간의 갈등은 집강소에서 실시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1) 평등 사회의 추구 - 갑오개혁과 신분제의 폐지]
[KH7 P.07-155 155] 동학 농민 운동에서 제시한 농민군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일부 수용되었다. 갑오개혁의 내용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회면의 개혁이었다. 개혁 추진의 중심 기구인 군국기무처는 전통적 신분 제도와 문벌 및 출신 지역을 가려 인재를 등용하는 폐습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 개혁은 반상과 귀천을 초월한 평등주의적 사회 질서의 수립, 노비 및 기타 천민층의 점진적 해방, 기술직 중인의 관직 등용 확대, 여성의 대우 향상과 혼인 풍습의 개선 등을 포함하였다.
[KH7 P.07-156 156] 갑오개혁으로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 내용 중에는 즉시 효력을 발생한 연좌제의 폐지 같은 조항이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사회 제도 개혁안은 양반제, 노비제 등을 포함한 전통적 신분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기보다는 점진적, 개량적으로 접근하였다. 이러한 제도 개혁은 조선 사회를 근대화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양반들의 권력 독점 체제를 해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1) 평등 사회의 추구 - 민권 운동의 전개]
[KH7 P.07-157 157]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돌아온 서재필은 문호 개방 이후 계속 성장한 국내 신지식층과 합세하여 독립 신문을 발행하고, 독립 협회를 창설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전의 개화 운동과는 달리, 새로운 형태의 자강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KH7 P.07-158 158] 독립 협회는 주권 독립 운동, 민권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 가운데 민권 운동은 인권 확대 운동과 참정권 실현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인권 확대 운동은 천부 인권 사상을 근거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한 운동이다. 이는 오랜 전제 군주제 및 양반 관료제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KH7 P.07-159 159] 참정권 실현 운동은 의회 설립 운동으로 나타났다. 독립 협회가 정부에 제출한 의회 설립안은 갑오개혁 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던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로 만들고, 의원의 반수는 독립 협회 회원에서 선발하여 구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KH7 P.07-160 160] 그런데 독립 협회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고종에게 올리는 헌의 6조를 가결하여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는 의회 개설 운동과 입헌 군주제 실시 주장을 왕조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보부상을 앞세워 탄압함으로써 독립 협회의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KH7 P.07-161 161] 비록 독립 협회의 운동이 실패로 끝났지만, 민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점이었다. 서울에서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정부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며, 독립 협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적절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펴 나갔다.
[KH7 P.07-162 162] 관민 공동회에서 천민이 연사로 나서고 만민 공동회에서 시전 상인이 회장으로 선출된 사실은 민권 사상과 평등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KH7 P.07-163 163] 독립 협회의 기본 사상은 자주 국권 사상, 자유 민권 사상, 자강 개혁 사상이었다. 특히, 자유 민권 사상은 국민의 평등과 자유 및 국민 주권을 확립하여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 국권을 수호하며, 나아가 근대 의회 정치를 구현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이러한 독립 협회의 근대화 사상은 이후 대한 제국 말기의 애국 계몽 사상으로 이어졌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2) 민족 독립 운동기의 사회 변화 - 한인의 국외 이주와 독립 운동]
[KH7 P.07-164 164]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본격적인 이주를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기아와 빈곤 등 열악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지리적으로 이 지방들은 한반도와 연접해 있어서 이동하기가 쉬웠고, 풍토 역시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이주하여 사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KH7 P.07-165 165] 그 이전에도 변경 지대의 조선인 중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서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절 출가 이민이 있기는 하였지만 많은 수는 아니었다.
[KH7 P.07-166 166]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 가운데 일부는 국외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도모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1905), 일제의 국권침탈과 경제적 수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망명자들의 국외 이주가 급격히 늘어났다.
[KH7 P.07-167 167]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애국지사들은 중국, 연해주, 미국, 일본 등으로 망명하여 1910년대부터 본격적인 국외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서 · 북간도를 비롯한 남 · 북만주와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민족 운동가들은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 건설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 지역은 국내 진공이 유리한 국경 지역이라는 점 이외에도 수많은 한인들이 이주하여 폭넓은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역 주민들의 협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KH7 P.07-168 168] 대부분의 독립 운동 단체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하여 국내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제의 눈을 피할 목적으로 경제 및 교육 단체를 표방하였다. 그들은 향후 독립 전쟁을 위하여 동포들의 생활 대책을 강구하고자 하는 목적과 대중적인 운동 방법으로 경제 활동을 강조하였다.
[KH7 P.07-169 169]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은 간도를 독립 기지로 삼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KH7 P.07-170 170] 시베리아의 연해주 지방에서는 한민회가 설치되었으며, 이상설은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투쟁의 기반을 닦고 있었다.
[KH7 P.07-171 171] 미국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한국 사람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와 그 가족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의하여 하와이 이민이 금지된 1905년 말까지 7,000여 명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KH7 P.07-172 172] 미국 본토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유학생이나 관리 출신으로 하와이 이주한인들과는 달랐다. 다만, 샌프란시스코에는 소수의 인삼 장수와 지식인들이 이주하였다.
[KH7 P.07-173 173] 교민단체로는 하와이에 신민회와 한인 협성회가 있었고, 미국 본토에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공립 협회가 결성되었다가 뒤에 국민회로 재조직되었으며, 안창호(1878-1938)도 흥사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 것은 주로 고국에서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지만, 이들은 미국에 도착한 뒤 모국을 위한 활동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KH7 P.07-174 174] 일본에서는 최팔용이 중심이 되어 조선 청년 독립단을 구성하고 2 · 8 독립 선언을 발표하여 3 · 1 운동의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2) 민족 독립 운동기의 사회 변화 -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와 신간회 운동]
[KH7 P.07-175 175] 1920년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은 러시아와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KH7 P.07-176 176] 초기의 사회주의 운동은 소수의 지식인이나 청년, 학생이 중심이었고 노동자, 농민의 참여는 오히려 적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청년 운동, 학생 운동, 여성 운동과 형평 운동 등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KH7 P.07-177 177] 이러는 가운데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이상재,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KH7 P.07-178 178] 신간회에는 민족 운동계의 다수 세력이 참가하였다. 창립 직후 신간회 본부는 일제의 탄압에 부딪혀 제대로 활동을 벌이지 못하였으나, 각 지방에 조직된 지회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신간회는 전국에 약 140여 개소의 지회를 두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도하였다.
[KH7 P.07-179 179] 1929년에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계획한 일이 발각되어 다수의 지도 인사가 검거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중앙 간부가 새로 구성되었으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활동 노선면에서 갈등을 일으켜 내분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일제의 교묘한 탄압,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사회주의계의 책동 등으로 신간회는 결국 4년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KH7 P.07-180 180] 그러나 신간회 운동은 3 · 1 운동 이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처음으로 민족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독립 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2) 민족 독립 운동기의 사회 변화 - 농민 운동과 노동운동]
[KH7 P.07-181 181] 국권 피탈(1910) 직후부터 식민지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농민, 노동자들은 토지 조사 사업, 임야 조사 사업, 각종 잡세의 신설과 증세 등에 집단적으로 저항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가혹한 수탈에 항거하는 경제적 투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정치적 요구를 내세운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10년대 말엽에는 폭력 투쟁의 성격도 띠게 되어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국 등 일제의 지배 기구에 대한 습격으로 변화하기도 하였다.
[KH7 P.07-182 182] 농민 운동은 주로 소작 쟁의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주로 소작인 조합이 중심이 된 소작 쟁의로 50% 이상이었던 고율의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가 주목적이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자작농까지 포함하는 농민 조합이 소작 쟁의를 주도하였다.
[KH7 P.07-183 183] 일본인 대지주나 일본 지주 회사들을 대상으로 한 소작 쟁의는 한 농장이나 회사에 속한 농민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 규모도 크고 격렬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의 형태도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 쟁의뿐 아니라, 일제의 경제적 약탈 전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나아갔다. 또, 규모가 확대되고 기간도 장기화되어 갔으며, 형태도 대중적 봉기 형태로 옮아가고 있었다. 특히,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농장의 소작 쟁의는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KH7 P.07-184 184] 노동 운동은 자유 노동자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노동 조합이 결성되어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 등을 내걸고 파업 투쟁을 벌여 나갔다. 조선 노동자들의 경우 임금은 낮고 노동 시간은 길었으며, 작업 환경도 극히 열악하였다. 일본의 독점 자본주의는 노동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조선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초과 이윤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의 인상 요구와 8시간 노동제의 시행을 중심으로 쟁의를 벌였다.
[KH7 P.07-185 185] 노동 쟁의의 쟁점은 점차 임금 인상 외에 단체 계약권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악질 일본인 감독의 추방, 노동 조건의 개선 등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서울, 인천, 목포 등의 대도시에 한정되던 노동 쟁의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영흥 노동자 총파업, 원산 노동자 총파업 등 지역 총파업이 진행되어 노동 운동이 대중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한 석유 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3,000여 명이 참가한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파업은 일제가 폭압적으로 탄압하는 상황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조직적으로 파업을 진행시키면서 투쟁하였고, 항일 투쟁 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로 인하여 노동자 파업이 전국 각지에서 잇따랐다. 이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노동 운동이 항일적 성격을 띤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2) 민족 독립 운동기의 사회 변화 - 여성 운동과 학생 운동]
[KH7 P.07-186 186] 여성 운동도 1920년대 초반기에는 대체로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가부장제 혹은 전통적 인습 타파라는 주제로 계몽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중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여성 해방의 문제를 계급 해방, 민족 해방의 문제와 연결지으면서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KH7 P.07-187 187] 학생 운동은 대개 동맹 휴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시설 개선이나 일인 교원 배척 등의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의 교육, 교내 조선어 사용, 학생회 자치, 언론 · 집회의 자유 등의 요구가 대두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일반 학생의 반일 감정을 토대로 일어난 민족 운동으로서 청년 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3) 현대 사회의 변화 - 복지 사회의 추구]
[KH7 P.07-188 188] 광복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절대 빈곤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의 발전 이면에는 농촌의 피폐와 도시 빈민층의 형성, 환경 오염, 근로기준법 위반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국가 주도로 경제가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노약자, 빈곤층, 실업자, 노숙자 등의 소외 계층이 생겨났다. 정부는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
[KH7 P.07-189 189] 1960년대 이후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은 재벌 기업을 육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노동자의 증가를 수반하였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전으로 대규모 이농 현상이 초래되어 서울, 울산 등 대도시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주택난이 심각해졌으며 대도시 주변에는 판잣집이 즐비하였다.
[KH7 P.07-190 190]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사회 보장 제도 마련에 관심을 기울이고 여러 제도를 도입하였다. 오늘날에는 서민을 위한 생활 보조금 제공,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 건설, 고용보험 및 연금 제도 등을 시행하여 복지 사회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3. 근 현대의 사회 변동 - 3) 현대 사회의 변화 - 산업화와 도시화]
[KH7 P.07-191 191] 1960년대 이후 꾸준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실시로 산업화는 진전을 보게 되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경제 개발로 인하여 산업 구조가 선진국형으로 바뀌었으며,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공업 구조가 바뀌어 갔다. 성장 우선주의 정책을 편 결과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이에 수반하여 1960년대 말부터는 환경 문제도 발생하였다. 공업 단지와 그 일대에서 공해는 심각한 양상을 보였으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대기와 하천도 오염되었다. 정부에서는 환경부를 설치하는 등 환경 문제에 대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KH7 P.07-192 192] 수출 주도형 경제 개발로 말미암아 농업은 희생을 감수하였다.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들의 저임금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저곡가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촌의 생활은 어려워졌으나,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KH7 P.07-193 193] 1970년대에 제창된 새마을 운동은 침체된 농촌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뒤에는 도시로 확대되었다.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삼아 추진된 새마을 운동은 생활 태도의 혁신과 농·어촌의 환경 개선, 소득 증대에 기여하였다.
[KH7 P.07-194 194] 산업화와 도시화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반면, 가족 제도의 붕괴, 노동자 문제, 실업자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KH7 P.07-195 195] 산업화와 함께 여성의 지위도 달라졌다. 여성의 취업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농촌에서도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가 증가하였다. 산업 사회에서 여성들은 저임금의 미숙련 노동자에서부터 전문직으로까지 직업 분야를 확대해 나갔으며, 사회적 위상도 높아졌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KH7 P.07-196 196] 개항 이후 조선에는 전화와 전기를 비롯한 서양의 근대 문물들이 도입되고, 서양의 음악과 미술이 소개되었으며, 외래 종교가 보급됨에 따라 생활과 문예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KH7 P.07-197 197]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일제의 동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으로 우리의 전통 문화는 큰 수난을 겪었으나, 우리 민족은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민족 의식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KH7 P.07-198 198] 광복 이후 미국을 통하여 서구 문화가 급속히 유입되고, 냉전 체제가 지속되면서 반공 이념이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산업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대중 문화가 크게 확산되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1) 근대 문화의 발달 - 근대 문명의 수용]
[KH7 P.07-199 199] 19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는 서양의 근대 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였다. 당시의 개화파는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우리의 정신 문화는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제창하였다. 이에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함께 과학 기술을 비롯한 서양의 근대 문물이 도입되었다.
[KH7 P.07-200 200] 통신 시설로는 전신과 전화가 가설되었고, 근대적 우편 제도도 실시되어 여러 나라와 우편물을 교환하게 되었다. 서울 시내에 전등이 가설되고 전차가 운행되었으며, 경인선과 경부선 등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시설은 외세의 이권 침탈이나 침략 목적에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국민 생활의 편리와 생활 개선에 이바지하였다.
[KH7 P.07-201 201] 전통적인 한의학과 함께 서양 의학도 보급되었다. 근대 의료 시설로 광혜원을 비롯한 여러 병원들이 설립되어 질병 퇴치와 국민 보건의 향상에 공헌하였으며, 경성 의학교와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는 의료 요원을 양성하였다.
[KH7 P.07-202 202] 근대 문물의 수용과 함께 서양식 건물도 세워졌다. 중세 고딕식 건축인 명동 성당과 르네상스식 건축인 덕수궁 석조전 등이 건립되었고, 교회와 학교 건축을 중심으로 서양식 건축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KH7 P.07-203 203] 이와 같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비롯한 근대 문물이 수용되고, 근대 시설도 점차 보급되어 갔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1) 근대 문화의 발달 - 근대 교육과 학문의 보급]
[KH7 P.07-204 204] 1880년대부터 근대 교육이 보급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사립 학교인 원산 학사는 외국어, 자연 과학 등 근대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다. 정부는 관립 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우고,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상류층 자제들에게 영어, 수학, 지리학, 정치학 등의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다.
[KH7 P.07-205 205] 개신교 선교사들도 배재학당, 이화 학당 등의 사립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근대 학문을 가르치고, 민족 의식 고취와 민주주의 사상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근대적 교육 제도가 마련되어 소학교, 중학교 등의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어 근대 교육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KH7 P.07-206 206] 20세기 초에 애국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수많은 사립 학교들이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이에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구국 교육 운동이 벌어졌고, 민족 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 활동이 성행하고 근대 학문과 사상이 보급되어 갔다.
[KH7 P.07-207 207] 한편,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국사와 국어를 연구하여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국학 운동이 전개되었다. 신채호, 박은식 등은 구국 위인들의 전기를 써서 보급시켰고, 지석영 과 주시경은 국어 연구에 공헌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1) 근대 문화의 발달 -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KH7 P.07-208 208] 근대 문화의 수용과 더불어 문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자유종 등의 신소설이 등장하여 계몽 문학의 구실을 하였다. 최남선은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써서 근대시의 형식을 개척하였다.
[KH7 P.07-209 209] 외국 문학의 번역도 이루어져 천로 역정, 이솝 이야기, 로빈슨 표류기 등의 작품이 널리 읽혀졌다. 이러한 외국 문학의 소개는 신문학의 발달에 이바지하였고, 근대 의식의 보급에도 기여하였다.
[KH7 P.07-210 210] 한편, 서양 근대 문화의 도입으로 예술 분야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음악에서는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라는 신식 노래가 유행하였다. 애국가 , 권학가, 독립가 등의 창가가 이 시기에 널리 애창되었다.
[KH7 P.07-211 211] 연극에서는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지고 은세계, 치악산등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민중 사이에는 전통적인 민속 가면극이 여전히 성행하였다.
[KH7 P.07-212 212] 미술에서는 서양식 유화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김정희 계통의 문인 화가들이 한국 전통 회화를 발전시켰다.
[KH7 P.07-213 213] 종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왔던 천주교가 1880년대부터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벌여 교육, 언론, 사회 사업 등에 공헌하였고, 개신교가 수용되어 교육과 의료 사업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족 종교인 동학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 때 천도교로 개칭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도 한용운이 중심이 되어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대종교가 창시되어 민족적 입장을 강조하고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2)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한국사 왜곡]
[KH7 P.07-214 214]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하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난을 겪었으며, 민족의 생존까지도 위협당하였다.
[KH7 P.07-215 215] 일제는 우민화 교육과 동화 정책을 통하여 이른바 한국인의 황국 신민화를 꾀하였고,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시키려는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면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 교육을 일체 금지하였다. 이에 일부의 지도층 인사들은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고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친일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KH7 P.07-216 216] 또, 일제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정체성을 심어 주는 한국사를 왜곡하여 한국인의 민족 의식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한국사의 타율성 · 정체성 · 당파성 등이 강조되었고,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 등은 무시되었다. 이러한 식민 사관을 토대로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2)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의 전개]
[KH7 P.07-217 217]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애국지사들은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핵심은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여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보존하고 민족 의식을 배양하려는 국학 운동이었다.
[KH7 P.07-218 218] 3 · 1 운동 이후에 이윤재, 최현배 등의 국어 학자들은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에 힘썼다. 그들은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고 가갸날을 정하여 한글의 보급과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1930년대에 조선어 연구회가 개편되어 성립된 조선어 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서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940년대 초에 일제는 조선어 학회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회원들을 투옥하였다.
[KH7 P.07-219 219]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은 한국사 연구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 등을 강조하였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이었다.
[KH7 P.07-220 220] 박은식은 19세기 이후 민족의 수난을 밝힌 한국 통사와 우리의 항일 투쟁을 다룬 한국 독립 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일제의 왜곡이 심하였던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등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정인보는 신채호를 계승하여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였고, 오천 년간 조선의 얼을 신문에 연재하였다.
[KH7 P.07-221 221] 이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민족 정신을 고취하여 독립심을 배양할 목적으로 박은식은 혼을,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정인보는 얼을 민족 정신으로 강조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2)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민족 교육 진흥 운동]
[KH7 P.07-222 222] 일제 강점기에 정규 공립 학교에서는 우리 민족을 위한 민족 교육이 어려웠으나, 사립 학교나 개량 서당 및 야학에서는 민족 의식의 배양을 위한 민족 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KH7 P.07-223 223] 1920년대에는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났다. 한규설(1848-1930)과 이상재 등은 조선 교육회를 조직하고 한민족 본위의 민족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이들은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하여 총독부에 대학 설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총독부가 이를 묵살하자, 조선 교육회는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각 지역의 유지들과 사회 단체의 후원으로 한때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자연 재해로 모금이 어려워져 결국 좌절되었다.
[KH7 P.07-224 224] 이후로도 연희 전문 학교, 보성 전문 학교, 이화 학당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대신, 일제는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여(1924), 조선인의 불만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KH7 P.07-225 225] 한편, 우리 민족은 한글 보급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과 언론사를 중심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초부터 학생, 지식 청년, 문화 단체 등이 계몽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언론계와 청년 학생이 힘을 합쳐 문맹 퇴치와 농촌 계몽을 통하여 민족의 자강을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2)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일제 강점기의 종교 활동]
[KH7 P.07-226 226] 일제 강점기에 종교계도 민중 계몽, 문화 사업, 민족 교육, 항일 운동 등의 분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KH7 P.07-227 227] 천도교에서는 제2의 3 · 1 운동을 계획하여 자주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개벽 · 어린이 · 학생 등의 잡지를 간행하여 민중의 자각과 근대 문물의 보급에 기여하였다. 천도교와 함께 3 · 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개신교는 민중 계몽과 각종 문화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사회 사업과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였고, 만주에서는 일부 천주교도들이 항일 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KH7 P.07-228 228] 천도교와 더불어 민족 종교의 양대 세력을 형성한 대종교는 교단 본부를 만주로 이동하고, 민족 의식 고취와 항일 무장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종교 지도자들은 항일 무장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고, 3 · 1 운동 직후에는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여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다.
[KH7 P.07-229 229] 불교에서는 한용운을 비롯한 승려들이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려는 총독부 정책에 맞서 민족 종교의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였고,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KH7 P.07-230 230]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의 현대화와 생활화를 주창하며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였고, 생활 개선 및 새 생활 운동에도 앞장섰다.
[KH7 P.07-231 231] 그러나 일부 종교계 인사들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친일적 성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2)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일제 강점기의 문예 활동]
[KH7 P.07-232 232] 3 · 1 운동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을 회유, 동화하는 기만 술책으로 이른바 문화 통치를 내세우자, 문예 활동을 하던 지식인들은 일제에 타협하거나 항일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KH7 P.07-233 233] 이 때는 근대 문화 예술의 태동기로, 이광수, 최남선 등은 근대 문학의 개척에 공헌하였다. 이어서 한용운, 김소월, 염상섭 등은 민족 정서와 민족 의식을 담은 작품을 통하여 근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김소월의 아름다운 서정시는 많은 사람들이 널리 애송하였다.
[KH7 P.07-234 234] 1920년대 중반에는 신경향파 문학이 대두하여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었고, 1930년대에는 순수 문학의 경향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순수 문학 잡지가 간행되었다. 이 무렵, 정지용과 김영랑은 시문학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순수 문학과 서정시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KH7 P.07-235 235] 일제 말기에는 침략 전쟁의 확대와 함께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 한국 문학이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그 속에서도 이육사, 윤동주 등은 항일 의식과 민족 정서를 담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최남선 등의 일부 문인들은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KH7 P.07-236 236] 음악에서는 안익태, 윤극영 등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안익태는 애국가와 이를 주제로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유명하였다.
[KH7 P.07-237 237] 미술에서는 안중식이 한국 전통 회화를 발전시켰으며, 고희동과 이중섭은 서양화를 대표하였다.
[KH7 P.07-238 238] 연극에서도 토월회, 극예술 연구회 등의 활동으로 근대 연극이 발전하였으며, 영화에서는 나운규가 한국적 정서가 담겨 있는 아리랑을 발표하여 한국 영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3) 현대 문화의 동향 - 현대의 교육]
[KH7 P.07-239 239] 광복 이후 미군정의 실시와 함께 식민지 교육 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식 교육이 도입되었다. 이 때 6 · 3 · 3 · 4제의 학제를 근간으로 하는 교육 제도가 마련되었고, 홍익인간의 교육 이념이 채택되었다.
[KH7 P.07-240 240] 이승만 정부 때에는 초 · 중등 학교와 대학의 증설로 교육이 양적으로 확대되었으나, 6 · 25 전쟁으로 인하여 교육 환경은 매우 열악해졌다. 전쟁 기간 동안 교육은 멸공 통일의 신념을 길러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KH7 P.07-241 241] 4 · 19 혁명 이후에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학원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5 · 16 군사 정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KH7 P.07-242 242] 박정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경제 개발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었던만큼 반공 교육을 강화하고 능률과 실질을 중시하는 기능 양성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자치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교육의 중앙 집권화와 관료적 통제는 계속되었다. 1968년에 발표한 국민 교육 헌장은 이 시기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KH7 P.07-243 243] 1980년대에 정부는 국민 정신 교육을 강조하고 통일 안보 교육, 경제 교육, 새마을 교육 등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입시 과외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KH7 P.07-244 244] 1990년대 이후부터는 급속한 정보화와 기술의 향상에 따라 변화, 발전하는 경제와 사회 구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창의력 신장과 시민 의식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개혁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3) 현대 문화의 동향 - 현대의 사상과 종교]
[KH7 P.07-245 245] 일제 치하에서 질식 상태에 있던 우리 민족의 문화 활동은 광복과 함께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뒤이은 6 · 25 전쟁을 겪은 이후 우리 문화계도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KH7 P.07-246 246] 광복 후 우리 사회에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공 등 여러 이념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한때 정치·사회적으로 남용되기도 하였으며, 민주주의는 일부 정권의 독재 정치로 인하여 큰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반공 이념도 강조되었다.
[KH7 P.07-247 247]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특히 1980년대의 5 ㆍ 18 민주화 운동과 6월 민주 항쟁 등을 거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이들 이념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KH7 P.07-248 248] 한편으로는 1980년대 말부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냉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세계사의 조류로 말미암아 남북 간 화해의 기운이 높아져 갔다.
[KH7 P.07-249 249] 광복 이후 종교계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우리 사회에 나타난 서양화 경향과 함께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불교는 일대 혁신 운동을 통하여 농촌 지역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등 민족 종교도 그 나름의 기반 확립과 교세 확장에 노력하고 있다. 한편, 1970년대 이후 우리 종교계는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한국사: VII. 근 현대사의 흐름 - 4. 근 현대 문화의 흐름 - 3) 현대 문화의 동향 - 현대의 문화 활동과 과학 기술의 발전]
[KH7 P.07-250 250] 광복 직후에 문화 예술 단체들은 좌우익에 따라 성격이 나뉘어 분열하였다. 6 · 25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우리의 문학계는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문인 중심의 순수 문학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KH7 P.07-251 251] 1960년대부터는 중등 교육이 확대되고 경제 여건이 향상됨에 따라 문화의 대중화 현상이 나타났다. 문화의 대중화는 텔레비전 등 대중 전파 매체가 널리 보급되면서 가속화되었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됨에 따라 더욱 확산되었다.
[KH7 P.07-252 252] 한편, 1960년대부터 사회 문제를 다루는 참여 문학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70년대 문학에서는 민족 문학론이 대두되어 현실의 비판과 민주화 운동의 실천, 그리고 민족 통일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나아갔다. 일부에서는 민중의 삶을 주제로 삼는 민중 문학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KH7 P.07-253 253] 아울러 1960년대에 들어서는 과학 기술이 활발하게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6 · 25 전쟁을 전후하여 미국 등 과학 선진국에 유학을 갔던 많은 인재들이 1966년에 설립된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로 돌아오면서 현대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정부 출연 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면서 현재 한국 과학 기술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KH7 P.07-254 254] 1980년대 이후에는 경제 발전에 힘입어 문화 향유층이 급격하게 확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문화가 나타났다. 최근에는 이전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 더 분방한 경향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KH7 P.07-255 255] 이런 가운데 전통 문화는 점점 대중화와 서양화에 밀려 제자리를 잃어 가고 있으며, 감각적이고 상업적인 대중 문화가 성행하는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작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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