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분류: 한국사/교과서
지은이: 국사전자교과서/편집: K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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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VI. 민족 문화의 발달
    1. 고대의 문화
        1) 학문과 사상, 종교
            한자의 보급과 교육
            역사 편찬과 유학의 보급
            불교의 수용
            불교 사상의 발달
            선종과 풍수지리설
        2)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학과 수학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금속 기술의 발달
            농업 기술의 혁신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고분과 고분 벽화
            건축과 탑
            불상 조각과 공예
            글씨, 그림과 음악
            한문학과 향가
        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일본에 건너간 통일 신라 문화
    2. 중세의 문화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유학의 발달
            유학의 발달
            역사서의 편찬
            성리학의 전래
        2) 불교 사상과 신앙
            불교 정책
            불교 통합 운동과 천태종
            결사 운동과 조계종
            대장경 간행
            도교와 풍수지리설
        3)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학과 의학
            인쇄술의 발달
            농업 기술의 발달
            화약 무기 제조와 조선 기술
        4) 귀족 문화의 발달
            문학의 발달
            건축과 조각
            청자와 공예
            글씨, 그림과 음악
    3. 근세의 문화
        1) 민족 문화의 융성
            발달 배경
            교육 기관
            한글 창제
            역사서의 편찬
            지리서의 편찬
            윤리, 의례서와 법전 편찬
        2)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정착
            성리학의 융성
            학파의 형성과 대립
            예학의 발달
        3) 불교와 민간 신앙
            불교의 정비
            도교와 민간 신앙
        4)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 역법과 의학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
            농서의 편찬과 농업 기술의 발달
            병서 편찬과 무기 제조
        5) 문학과 예술
            다양한 문학
            왕실과 양반의 건축
            분청사기, 백자와 공예
            그림과 글씨
            음악과 무용
    4. 문화의 새 기운
        1) 성리학의 변화
            성리학의 교조화 경향
            양명학의 수용
        2) 실학의 발달
            실학의 등장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의 확대
        3) 과학 기술의 발달
            서양 문물의 수용
            천문학과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의학의 발달과 기술의 개발
            농서의 편찬과 농업 기술의 발달
            서민 문화의 발달
            판소리와 탈놀이
        4)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건축의 변화
            백자와 생활 공예, 음악


VI. 민족 문화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종묘 정전 (서울 종로)
종묘 정전 (서울 종로)

[KH6 P.06-01 001] 문화란, 좁게는 인류가 살아오면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루어 놓은 성과를 말하며, 넓게는 생활 양식 전체를 말한다. 이런 문화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KH6 P.06-02 002] 문화는 그것이 형성되었을 당시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그 속에 담고 있다. 우리는 문화를 통하여 역사를 구체적이고 생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은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서원은 조선 사람들의 정신 세계와 삶의 방식을 상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KH6 P.06-03 003] 우리 민족은 우리가 처한 자연 조건과 대내외적 여건 속에서 보편적이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이룩하여 왔다. 과거 조상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문화 유산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1. 고대의 문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KH6 P.06-04 004] 삼국 시대에는 중앙 집권적 귀족 사회가 형성되면서 왕족과 귀족 중심의 문화가 성행하였다.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을 통합하였고 각 분야에서 다양한 불교 문화가 발전하였다.

[KH6 P.06-05 005] 통일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고, 당 및 서역의 문화를 수용하여 고대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서 당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 문화를 이룩하였다.

[KH6 P.06-06 006] 과학과 기술 분야도 크게 발전하였다. 농업 기술을 향상시켜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천문학과 금속 공예도 높은 수준을 이룩하였다.

[KH6 P.06-07 007] 고대에 살았던 조상들의 삶의 모습과 멋은 고분과 건축, 조각, 문학 등에 많이 남아 있다.



1) 학문과 사상, 종교



한자의 보급과 교육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1) 학문과 사상, 종교 - 한자의 보급과 교육]

향찰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 방식을 말하며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실린 향가는 모두 향찰로 쓰여진 것이다.
경당

고구려 평양 천도 이후 설립한 사립 교육 기관이다.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경전으로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를 가리킨다.
사택지적비(부여 박물관 소장)| 백제의 상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절을 짓고 세운 비이다.
사택지적비(부여 박물관 소장)| 백제의 상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절을 짓고 세운 비이다.
역사 편찬의 목적

삼국 시대의 역사는 자기 나라의 전통을 이해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며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을 모으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하였다.
도당(渡唐) 유학생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으로 숙위 학생이라고도 하며, 이들은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빈공과

당에서 외국 유학생들을 상대로 보는 과거 시험

[KH6 P.06-08 008]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은 고대부터 한자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우리 민족은 철기 시대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 시대의 지배층은 한자를 널리 쓰게 되면서 한문으로 쓰여진 중국의 유교, 불교, 도교의 서적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KH6 P.06-09 009] 삼국 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우리말을 썼으나, 뒤에는 이두와 향찰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로써 한문의 토착화가 이루어져 갔으며,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어 갔다.

[KH6 P.06-10 010] 한자의 보급과 함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의 교육 기관은 전하지 않으나, 5경 박사의박사, 역박사 등이 있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다.

[KH6 P.06-11 011]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는 매우 세련된 한문 문장으로 쓰여졌으며, 사택지적 비문에는 백제 귀족인 사택지적이 불당을 세운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에서도 청소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KH6 P.06-12 012]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유학이 보급되어 갔다.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라, 충, 효, 신 등의 도덕 규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KH6 P.06-13 013]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후 경덕왕 때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이것은 충효 일치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KH6 P.06-14 014] 원성왕 때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지만, 학문과 유학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KH6 P.06-15 015] 발해에서도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역사 편찬과 유학의 보급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1) 학문과 사상, 종교 - 역사 편찬과 유학의 보급]

[KH6 P.06-16 016] 삼국 시대에 학문이 점차 발달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KH6 P.06-17 017]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KH6 P.06-18 018]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김대문은 화랑들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산주 지방의 지리지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KH6 P.06-19 019] 신라의 유학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통일 신라 초에 활약한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으며, 설총은 유교 경전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이들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은 도덕적 합리주의를 내세웠다. 특히, 설총은 신문왕에게 화왕계라는 글을 바쳐 임금도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KH6 P.06-20 020] 통일 이후 신라와 당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들이 많아졌다. 그 중에서 이름난 인물은 신라 말기의 김운경, 최치원 등이었다. 특히, 최치원은 당에서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후 귀국하여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그 후 은둔 생활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 그가 지은 계원필경과 비문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KH6 P.06-21 021] 발해에서도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그 중에는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도 여러 명이 나왔다.

설총의 화왕계

"…… 어떤 이가 화왕(花王: 모란)에게 말하였다. '두 명(장미와 할미꽃)이 왔는데,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화왕이 말하였다. '장부(할미꽃)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장미)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장부가 다가서서 말하였다.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왔더니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가(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중국 한나라때 사람)은 머리가 희도록 하급 관직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옛날부터 도리가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 화왕이 대답하였다. '내가 잘못했노라. 내가 잘못했노라.'" 이에 왕(신문왕)이 얼굴빛을 바로하며 말하였다. "그대(설총)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기록해 두어 왕자(王者)의 경계로 삼게 하기 바란다." 라고 하고는 설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 <삼국사기>
이차돈 순교 사실을 새긴 돌기둥(경주 박물관 소장)
이차돈 순교 사실을 새긴 돌기둥(경주 박물관 소장)
업설(業說)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이론을 말한다. 왕은 선한 공덕을 많이 쌓아 현재의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현무도(평남 강서 강서대묘) | 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이다.
현무도(평남 강서 강서대묘) | 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이다.


불교의 수용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1) 학문과 사상, 종교 - 불교의 수용]

[KH6 P.06-22 022] 삼국은 율령을 제정하고 지방 제도와 중앙 조직을 개편하여 왕권의 강화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전진을 통하여 소수림왕 때에 불교를 수용하였고(372), 백제는 동진에서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다(384). 고구려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된 신라는 1세기 가까운 민간 전승을 거쳐 법흥왕 때 비로소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다(527).

[KH6 P.06-23 023]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이 시기에, 불교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여러 왕들이 불교식 이름을 가졌으며,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쳤다. 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상을 비롯한 음악, 미술, 건축, 공예, 의학 등 선진 문화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불교는 새로운 문화 창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KH6 P.06-24 024] 삼국은 불교를 신앙으로 널리 수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상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교가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승려가 의술을 담당하고, 전통 신앙에서 신성하게 여기던 장소에 사원을 건립하면서 불교는 점차 전통 신앙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KH6 P.06-25 025] 삼국에는 도교도 전래되어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환영을 받았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금동 대향로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 세계를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것으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미륵 신앙과 화랑

진지왕 때에 와서 흥륜사의 승려 진자가 법당의 미륵상 앞에서 소원을 빌며 말했다. "원컨대, 우리 부처님이 화랑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나시면 내가 항상 얼굴을 가까이 뫼시고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정성스럽고 지극한 기원의 심정이 날로 더해 가더니 어느 날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말했다. "웅천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으리라." 진자가 꿈에서 깨어 놀랍고도 기뻐서 그 절을 찾아가니, 한 소년이 친절하게 맞이하며 자신도 서울 사람이라고 하였다. 진자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그를 찾았다. 그러다가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갖춘 수려한 남자 아이가 영묘사의 동북쪽 길가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 진자는 그가 미륵선화라고 생각하여 가마에 태우고 들어와서 왕에게 보였다. 왕은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는 자제(子弟)들을 화목하게 했으며, 예의와 가르침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풍류가 세상에 빛났다. <삼국유사>


불교 사상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1) 학문과 사상, 종교 - 불교 사상의 발달]

[KH6 P.06-26 026] 신라의 불교 사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종합하여 한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7세기 후반기에 정립되었다. 삼국 불교의 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더하여 신라 불교는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KH6 P.06-27 027] 이 시기를 대표하는 원효는 불교의 사상적 이해 기준을 확립하였다. 그는 당시의 거의 모든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대승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 등을 저술하였다. 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는 십문화쟁론을 지었다.

[KH6 P.06-28 028] 의상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프랑스 학자 펠리오가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에서 발견하였다.

[KH6 P.06-29 029] 원효는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화엄 종단에서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불교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KH6 P.06-30 030] 신라 불교가 성숙해 가는 시기에도 많은 승려들은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전수해 왔다. 중국을 넘어 인도에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는 승려도 있었다. 그 중에 혜초는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기도 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 | 의상이 창건하여 화엄종을 널리 펼친 사원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고려 후기에 건축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 | 의상이 창건하여 화엄종을 널리
펼친 사원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고려 후기에 건축되었다.
왕오천축국전 | 1권 필사본으로 일부분만 전하고 있다. 1908년 중국 둔황의 천불동에서 발견되었다.
왕오천축국전 | 1권 필사본으로 일부분만 전하고 있다. 1908년 중국 둔황의 천불동에서 발견되었다.

[KH6 P.06-31 031] 고구려 불교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문왕은 스스로를 불교적 성왕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수도였던 상경에서 발굴된 10여 개의 웅장한 절터와 불상들은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선종풍수지리설

9산 선문
9산 선문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1) 학문과 사상, 종교 - 선종과 풍수지리설]

[KH6 P.06-32 032] 선종은 삼국통일 전후에 전래되었으나, 교종의 위세에 눌려 그리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귀족 사회의 분열이 심화되고 지방 세력들이 일어나는 변화에 발맞추어 크게 기반을 넓혔다.

[KH6 P.06-33 033]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는 달리, 선종은 문자를 뛰어넘어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KH6 P.06-34 034]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교종 체제를 뒤엎는 혁신적인 것이었고, 당시 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개혁 요구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선종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화엄 사상을 공부하던 승려들은 점차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선종을 공부하고 이를 신라에 들여왔다.

[KH6 P.06-35 035] 선종 승려들 중에는 지방의 호족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호족 세력들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이다.

[KH6 P.06-36 036] 선종은 중앙 귀족 사회의 모순에 대한 혁신을 내세우며 등장한 호족과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에 지방을 근거로 성장하여 지방 문화 역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선종 승려들은 사회 변혁을 희망하던 6두품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고려 사회 건설에 사상적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KH6 P.06-37 037] 한편, 신라 말기의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지리적 학설로서,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풍수지리설은 도참 신앙과 결부되어 산수의 생김새로 미래를 예측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지방 중심으로 국토를 재편성하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였다.



2)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학과 수학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2) 과학 기술의 발달 - 천문학과 수학]

[KH6 P.06-38 038] 우리 민족은 청동기 시대부터 과학 기술의 분야에서 우수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당시에 사용된 청동검과 청동제의 잔무늬 거울 등은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과학 기술은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도 이어져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혜성

혜성에 관한 기록으로는 "고구려 민중왕 3년(46) 겨울 11월에 혜성이 남쪽 귀퉁이에서 20일이나 보이다가 없어 졌다." 등이 있다.
석굴암 배치도 | 정사각형과 대각선, 정삼각형과 수선, 원형과 균등 분할 등 기하학 기법을 응용하여 조화의 미를 창조하였다.
석굴암 배치도 | 정사각형과 대각선, 정삼각형과 수선, 원형과 균등 분할 등 기하학 기법을 응용하여 조화의 미를 창조하였다.
청동제 잔무늬 거울(숭실 대학교 박물관 소장) | 수많은 평행선과 동심원, 사각형, 삼각형등의 기하학적 무늬가 정교하게 나타나 있다.
청동제 잔무늬 거울(숭실 대학교 박물관 소장) | 수많은 평행선과 동심원, 사각형, 삼각형등의 기하학적 무늬가 정교하게 나타나 있다.
첨성대(경북 경주) | 신라 선덕 여왕 때 건립한,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이다.
첨성대(경북 경주) |
신라 선덕 여왕 때 건립한,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이다.

[KH6 P.06-39 039] 고대의 천문학은 천체 관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만들어졌고, 고분 벽화에도 별자리 그림이 남아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도 7세기 선덕 여왕 때에 세계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하였다.

[KH6 P.06-40 040]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천문 현상을 관측하여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일 · 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 이변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매우 정확한 기록으로 밝혀지고 있다.

[KH6 P.06-41 041] 고대 사회에서 천체와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을 중시하였던 것은 천문 현상이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아울러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KH6 P.06-42 042] 천문학의 발달과 아울러 수학에 관한 지식도 발달하였다. 수학의 실제를 보여 주는 뚜렷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가지 조형물을 통하여 수학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석실이나 천장의 구조,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에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석굴 구조나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다보탑 등의 건축에는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이용되었다.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2) 과학 기술의 발달 -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

[KH6 P.06-43 043]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달에 따라 대량으로 불경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 인쇄술과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엽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KH6 P.06-44 044] 한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쓰여진 종이는 닥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난 것이다. 구례 화엄사의 석탑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불경에 쓰인 종이도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얇고 질기며 아름다운 백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닥나무 종이였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통일 신라의 기록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칠지도 | 백제와 왜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서 현재 이소노카미(石上神宮)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
칠지도 | 백제와 왜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서 현재 이소노카미(石上神宮)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불국사3층석탑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경덕왕 10년(751)의 것으로 추정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불국사3층석탑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경덕왕 10년(751)의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 기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2) 과학 기술의 발달 - 금속 기술의 발달]

백제 금동 대향로 | 높이64cm, 무게 11.8kg의 금도금 향로인데, 사진은 말을 타고 있는 인물상 부분이다.
백제 금동 대향로 | 높이64cm, 무게 11.8kg의 금도금 향로인데, 사진은 말을 타고 있는 인물상 부분이다.

[KH6 P.06-45 045] 삼국 시대의 금속 기술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기술을 계승하여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KH6 P.06-46 046] 고구려에서는 철의 생산이 중요한 국가적 산업이었으며, 철광석 생산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 등은 그 품질이 우수하며, 고분 벽화에는 철을 단련하고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KH6 P.06-47 047] 백제에서도 금속 기술이 발달하였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든 우수한 제품이며, 거기에는 금으로 상감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백제의 제철 기술이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걸작품이다.

[KH6 P.06-48 048] 신라에서는 금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들은 순금으로 만든 것과 금으로 도금한 것이 있는데, 제작 기법이 뛰어나며 독특한 모양이 돋보인다. 통일 신라 때 12만 근의 구리로 만든 성덕 대왕 신종은 아연이 함유된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신비한 종소리는 당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농업 기술의 혁신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2) 과학 기술의 발달 - 농업 기술의 혁신]

철제 보습 (서울 광진 구의동) 호미, 따비 (서울 송파 몽촌토성)
철제 보습
(서울 광진 구의동)
호미, 따비
(서울 송파 몽촌토성)

[KH6 P.06-49 049] 철기 시대 이후로 농업 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철기 문화의 보급과 함께 나무나 돌로 만든 농기구가 점차 철제 농기구로 바뀜에 따라 깊이갈이로 지력을 회복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는 중앙 집권적 귀족 국가로 발전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배층만이 주로 철제 농기구를 소유하였다.

[KH6 P.06-50 050] 철제 농기구 중에서도 쟁기의 보급은 특히 주목되고 있다. 이는 농경에서 소와 같은 가축의 힘을 이용할 수 있어 농업 생산이 크게 증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쟁기갈이가 시작되었고, 늦어도 4세기경부터는 고구려의 지형과 풍토에 맞는 보습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 시대 밭 (경기 하남 미사동)
삼국 시대 밭 (경기 하남 미사동)

[KH6 P.06-51 051] 백제의 농업 기술은 4~5세기경에 크게 발전하였다. 백제에서는 수리 시설을 만들고 철제 농기구를 개량하여 논농사를 발전시켰다.

[KH6 P.06-52 052] 신라에서는 5~6세기경에 소를 경작에 이용하는 우경의 보급이 확대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때 우경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신라에서는 이 시기부터 우경을 본격적으로 보급하는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KH6 P.06-53 053] 쟁기의 보급과 함께 호미도 점차 중요한 농기구로 보급되었다. 호미는 제초 작업뿐만 아니라, 모종솎기, 이랑갈이 등에 이용되었다.

[KH6 P.06-54 054] 이와 같이 쟁기, 호미, 괭이 등의 농기구가 널리 사용됨에 따라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삼국의 농업 관계 기록

ㅇ(백제) 다루왕 6년(33) 2월에 나라 남쪽의 주 · 군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을 만들게 하였다. <삼국사기>
ㅇ(백제) 구수왕 9년(222) 봄 2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ㅇ(신라) 지증 마립간 3년(502) 3월에 주 · 군의 책임자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관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삼국사기>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고분과 고분 벽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 고분과 고분 벽화]

[KH6 P.06-55 055] 고대 사회와 문화를 옛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무덤들이다. 삼국은 다양한 무덤을 많이 남겼다.

돌무지 무덤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인데,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만들어졌다.
굴식 돌방무덤

돌로 1개 이상의 방을 만들고 그것을 통로로 연결한 무덤으로, 일반적으로 앞방과 널방으로 구분하고, 벽의 표면에 벽화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KH6 P.06-56 056]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돌을 정밀하게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은 만주의 집안(지안) 일대에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7층까지 쌓아올린 장군총이 대표적인 무덤이다.

[KH6 P.06-57 057]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런 무덤은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널려 있다.

[KH6 P.06-58 058] 고분 벽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문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 많았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와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하여 갔다. 특히, 무용총의 사냥 그림과 강서 대묘의 사신도에서 고구려 사람들의 패기와 진취성을 엿볼 수 있다.

장군총 (길림성 집안) | 옆의 큰 돌은 무덤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장군총 (길림성 집안) | 옆의 큰 돌은 무덤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계단식 돌무지무덤 (서울 송파 석촌동)
계단식 돌무지무덤 (서울 송파 석촌동)

[KH6 P.06-59 059]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KH6 P.06-60 060]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사비 시기의 고분은 규모가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KH6 P.06-61 061] 백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에도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이런 그림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리는 지석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3,000여 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KH6 P.06-62 062]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을 많이 만들었으며, 삼국 통일 직전에는 굴식 돌방무덤도 만들었다.

돌무지덧널무덤

신라에서 주로 만든 무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십이 지신상(十二支神像)

12지를 상징하는, 얼굴은 동물이고 몸은 사람인 상. 12지는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이다.
묘지(墓誌)

죽은 자의 생애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함께 묻은 유물을 말한다. 돌에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에 기록한 것도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백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부분 명칭 (천마총)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부분 명칭 (천마총)

[KH6 P.06-63 063]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점차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덤의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그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신라만의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KH6 P.06-64 064] 발해에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건축과 탑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 건축과 탑]

[KH6 P.06-65 065] 고대의 건축은 궁전, 사원, 무덤, 가옥에 그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분과 건축 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KH6 P.06-66 066] 궁궐 건축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수왕이 평양에 세운 안학궁이다. 이 궁궐 터는 사각형 한 면의 길이가 620m나 되는 것으로 고구려 남진 정책의 기상이 엿보인다.

[KH6 P.06-67 067] 사원 건축으로는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가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황룡사는 6세기에 진흥왕이 세운 것으로, 당시의 팽창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에는 7세기에 건립한 거대한 9층 목탑이 중심을 잡고 있어 대단히 웅장했으리라 짐작된다. 미륵사는 중앙에 거대한 목탑과 동서에 석탑을 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7세기에 무왕이 추진한 백제의 중흥을 반영하고 있다. 가옥 건축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 구조가 일부 보인다.

황룡사(경북 경주) 복원 상상도
황룡사(경북 경주) 복원 상상도
미륵사(전북 익산) 복원 상상도
미륵사(전북 익산) 복원 상상도
미륵사지 석탑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전북 익산)
안압지 전경(경북 경주) | 건물과 연못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인공으로 꾸민 연못으로,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붙여졌다.
안압지 전경(경북 경주) | 건물과 연못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인공으로 꾸민 연못으로,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붙여졌다.

[KH6 P.06-68 068] 삼국 시대에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부처의 사리봉안하여 예배의 주대상으로 삼던 탑도 많이 건립되었다. 고구려는 주로 목탑을 건립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를 계승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안정되면서도 경쾌한 모습으로 유명하다. 신라의 탑으로는 황룡사 9층 목탑분황사탑이 유명하다. 분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KH6 P.06-69 069] 삼국 시대에는 방어를 위하여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돌로 쌓은 산성이 대부분이고 지형에 따라 흙으로 쌓기도 했는데, 산의 능선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KH6 P.06-70 070] 통일 신라의 궁궐과 가옥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사원을 많이 축조했는데, 그 중에서 8세기 중엽에 세운 불국사석굴암이 통일 신라의 사원 건축을 대표한다.

[KH6 P.06-71 071] 불국사는 불국토의 이상을 조화와 균형 감각으로 표현한 사원이다. 정문 돌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켰으며, 세속과 이상 세계를 구분짓는 축대는 자연의 선에 인공적으로 맞추어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키고 있다. 복잡하고 단순한 좌우 누각의 비대칭은 간소하고 날씬한 불국사3층석탑(석가탑), 복잡하고 화려한 다보탑과 어울려 세련된 균형감을 살리고 있다.

[KH6 P.06-72 072]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 사원인 석굴암은 네모난 전실과 둥근 주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좁은 통로로 연결하고 있는데 주실의 천정은 둥근 돔으로 꾸몄다. 전실과 주실, 그리고 천정이 이루는 아름다운 비례와 균형의 조형미로 석굴암은 건축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손꼽힌다.

[KH6 P.06-73 073] 한편, 안압지는 통일 신라의 뛰어난 조경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압지의 연못, 인공섬, 구릉과 건물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꾸며졌다. 특히, 연못 쪽으로 건물을 돌출시켜 연못을 잘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다른 방향에서 건물들을 바라볼 때도 변화 있는 경관을 이루게 하였다. 여기에서는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발해 상경 용천부 평면도 | 상경 용천부는 평탄한 분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궁궐과 사원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발해 상경 용천부 평면도 | 상경 용천부는 평탄한 분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궁궐과 사원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KH6 P.06-74 074]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KH6 P.06-75 075] 통일 신라에 들어와 석탑은 삼국 시대의 목탑과 전탑 양식을 계승, 발전시켜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을 완성하였다. 통일 신라 초기의 석탑으로 대표적인 것은 감은사지 3층 석탑이다. 장중하고 웅대한 이 석탑은 삼국 통일을 달성한 기상을 반영하고 있다.

[KH6 P.06-76 076] 석가탑은 통일 이후 축조해 온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탑의 날씬한 상승감 및 넓이와 높이의 아름다운 비례는 부처가 항상 가까이 있음을 이상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런 탑의 맞은편에 전례가 없는 특이한 모습의 다보탑을 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높은 예술성과 건축술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불국사 3층석탑(경북 경주)
불국사 3층석탑(경북 경주)
진전사지 3층 석탑 (강원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 (강원 양양)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전남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전남 화순)

[KH6 P.06-77 077] 신라 말기에는 석탑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들을 새긴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KH6 P.06-78 078] 신라 말기에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탑비가 유행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승탑과 승려의 일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을 대표한다. 이런 승탑과 탑비는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 역량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창건 당시의 불국사 복원 상상도 | 산기슭의 경사면에 세운 2탑 1금당 양식으로, 8세기 중엽 통일 신라 사원 건축을 대표한다.
창건 당시의 불국사 복원 상상도 | 산기슭의 경사면에 세운 2탑 1금당 양식으로, 8세기 중엽 통일 신라 사원 건축을 대표한다.


불상 조각과 공예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 불상 조각과 공예]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국보 제83호) 미륵보살은 미래에 부처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이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진과 사색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 반가 상은 이런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국보 제83호)

미륵보살은 미래에 부처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이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진과 사색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 반가상은 이런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
법주사 쌍사자 석등 (충북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충북 보은)
발해의 석등 (흑룡강성 영안)
발해의 석등 (흑룡강성 영안)

[KH6 P.06-79 079]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삼국은 각기 중국에서 불상 제작법을 받아들이면서도 각각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두꺼운 의상과 긴 얼굴 모습에서 북조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강인한 인상과 은은한 미소에는 고구려의 독창성이 보인다.

[KH6 P.06-80 080] 백제의 서산 마애 삼존불은 부드러운 자태와 온화한 미소로 자비와 포용의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신라의 경주 배리 석불 입상도 푸근한 자태와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데, 신라 조각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KH6 P.06-81 081] 삼국 시대의 불상 조각에서 두드러진 것은 미륵 보살 반가상을 많이 제작한 점이다.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은 날씬한 몸매와 그윽한 미소로 유명하다.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도 부드러운 몸매와 자애로운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KH6 P.06-82 082]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석굴암의 본존불보살상들이다.

[KH6 P.06-83 083]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갖게 한다. 본존불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사실적이다. 입구 쪽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점점 정제되어, 불교의 이상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KH6 P.06-84 084]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KH6 P.06-85 085] 발해에서는 자기 공예가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발해의 자기는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 크기, 모양, 색깔 등이 매우 다양하였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도 그 우수함을 인정하여 수입해 갔다고 한다.

[KH6 P.06-86 086] 한편, 고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석조물들을 많이 만들었다. 불국사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단아하면서도 균형잡힌 걸작으로 꼽힌다. 이와 아울러 통일 신라 시대의 무열왕릉비 받침돌은 거북이가 힘차게 전진하는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KH6 P.06-87 087]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팔각의 단 위에 중간이 약간 볼록한 간석 및 그 위에 올린 창문과 기왓골이 조각된 지붕은 발해 특유의 웅대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KH6 P.06-88 088] 통일 신라의 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범종이다. 통일 후에는 상원사 종, 성덕 대왕 신종 등 범종이 많이 주조되었다. 특히, 성덕 대왕 신종은 맑고 장중한 소리, 그리고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 보이는 듯한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하다.




글씨, 그림과 음악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 글씨, 그림과 음악]

김생의 글씨(백월서운탑비)
김생의 글씨(백월서운탑비)
노래하고 연주하는 모습의 토우(호림 박물관 소장)
노래하고 연주하는 모습의 토우(호림 박물관 소장)

[KH6 P.06-89 089]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한문을 널리 사용함에 따라 서예도 발전하였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은 웅건한 서체로 쓰여졌고, 신라의 김생질박하면서도 굳센 신라의 독자적인 서체를 열었다.

[KH6 P.06-90 090] 그림에서는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가 신라의 힘찬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화가로는 신라의 솔거를 꼽을 수 있다. 그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에 날아가던 새들이 앉으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화엄경 변상도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하고 유려한 모습은 신라 그림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KH6 P.06-91 091] 음악과 무용은 종교 및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춤추는 장면이 있으며, 화랑들도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삼국의 음악가로는 신라의 백결 선생,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의 우륵이 유명하다.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달랬고,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악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우리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천마도(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 자작나무 껍데기질을 겹쳐서 만든 말의 배 가리개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그렸다.
천마도(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 자작나무 껍데기질을 겹쳐서 만든 말의 배 가리개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그렸다.


한문학과 향가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3) 고대인의 자취와 멋 - 한문학과 향가]

회소곡

신라 유리왕 때 지은 작자 미상의 노래. 왕녀 두사람으로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길쌈 대회를 열었는데, 진 편에서 한 여자가 탄식하여 노래하기를 '회소회소'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4 · 6 변려체

형식을 소중히 여겨 주로 4자 내지 6자의 대구를 사용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한문의 문체이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와 수 · 당에 유행하였다.

[KH6 P.06-92 092] 삼국 시대에는 한자가 두루 쓰이면서 한시를 짓기도 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이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황조가와 을지문덕이 수의 장수에게 보낸 오언시가 전해지고 있다.

[KH6 P.06-93 093] 일반 민중 사이에는 구지가와 같은 무속 신앙과 관련된 노래나 회소곡과 같은 노동과 관련된 노래가 유행하였다. 한편, 민중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 그들의 소망을 노래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백제의 정읍사가 손꼽힌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승려나 화랑들이 혜성가와 같은 향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KH6 P.06-94 094] 통일 신라에서도 화랑과 승려들이 향가를 지어 불렀는데, 삼국유사에 14수가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화랑에 대한 사모의 심정, 형제간의 우애, 공덕이나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담고 있다. 삼국 통일을 이룰 때의 이상이 무너지고 지배층이 저지르는 횡포를 비판하는 향가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9세기 후반에는 이런 향가를 모아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KH6 P.06-95 095]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설화 문학이 구전되었는데, 에밀레종 설화설씨녀 이야기, 효녀 지은의 이야기들에서 이 시대 종교와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찾아볼 수 있다.

[KH6 P.06-96 096] 발해의 한문학은 4 · 6 변려체로 쓰여진 정혜 공주정효 공주의 묘지를 통해서 그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시인으로는 양태사가 유명한데, 그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국을 그리며 지은 다듬이 소리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신라의 향가와 발해의 시

제망매가 다듬이 소리

월명사
양태사

살고 죽는 길이 여기 있기도 두렵고
여기 있고 싶어도 안 되어
간다는 말도 못하고 가십니까.
가을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리.
나, 도 닦으며 기다리리라. <삼국유사>

서리 기운 가득한 하늘에 달빛 비치니 은하수도 밝은데
나그네 돌아갈 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네.
홀로 앉아 지새는 긴긴 밤 근심에 젖어 마음 아픈데
홀연히 이웃집 아낙네 다듬이질 소리 들리누나.
바람결에 그 소리 끊기는 듯 이어 지는듯
밤 깊어 별빛 낮은데 잠시도 쉬지 않네.
나라 떠나와서 아무 소식 듣지 못하더니
이제 타향에서 고향 소식 듣는 듯하구나.
…… <경국집>


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KH6 P.06-97 097] 삼국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KH6 P.06-98 098]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가 삼국 문화의 일본 전수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4세기에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이렇게 전래된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의 세계적 자랑인 고류사 미륵 보살 반가 사유상호류사 백제 관음상이 만들어졌다. 이 밖에도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와 천문 박사, 채약사, 그리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건너갔는데, 이들에 의하여 목탑이 세워졌고, 나아가 백제 가람 양식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호류사(法隆寺) 금당 벽화 복원도 |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1949년에 블타 버린 것을 복원하였다.
호류사(法隆寺) 금당 벽화 복원도 |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1949년에 블타 버린 것을 복원하였다.

[KH6 P.06-99 099] 고구려도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초에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하였고, 호류사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승려 혜자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혜관은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 나라 시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흡사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KH6 P.06-100 100] 신라는 일본과 문화 교류는 적었지만,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전해 주어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KH6 P.06-101 101] 이처럼 삼국의 문화는 6세기경의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7세기경에 나라 지방에서 발전한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건너간 통일 신라 문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1. 고대의 문화 - 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 일본에 건너간 통일 신라 문화]

하쿠호(白鳳) 문화

7세기 후반에 발달한 일본의 고대 문화로 당과 통일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불상, 가람 배치, 탑, 율령과 정치 제도에서 신라의 불교와 유교의 영향이 컸다.

[KH6 P.06-102 102] 삼국 문화에 뒤이어 통일 신라의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통일 신라 문화의 전파는 일본에서 파견해 온 사신을 통해서 이뤄졌다. 원효, 강수, 설총이 발전시킨 불교와 유교 문화는 일본 하쿠호 문화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특히, 심상에 의하여 전해진 화엄 사상은 일본 화엄종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KH6 P.06-103 103]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이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긴 뒤로부터는 외국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심화과정: 6두품 출신 도당 유학생들의 활동

① 김운경이 빈공과에 처음으로 합격한 뒤에 소위 빈공자는 매월 특별 시험을 보아 그 이름을 발표하는데, 김운경 이후 당나라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58명이었고, 5대에는 32명이나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최치원, 최신지, 박인범, 최승우 등이다. <동사강목>

② 최치원은 당의 학문을 많이 깨달아 얻은 바 많았으며, 귀국하여 이를 널리 펴 보려는 뜻을 가졌으나,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그의 뜻을 용납할 수 없어, 대산군(전북 태인) 태수로 나가게 되었다. 그가 귀국했을 때는 난세가 되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다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풍월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삼국사기>

③ 최승우는… 당나라에 가서…급제하였으며, 그가 지은 글은 4 · 6 문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호본집이라 하였다. 후에 견훤을 위하여 격문을 지어 우리 태조에게 보냈다. 최언위는 나이 18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급제하였다. …우리 태조가 개국하자, 조정에 참여하여 벼슬이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죽자 문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삼국사기>

원성왕 5년 9월, 자옥으로 양근현(양평)의 수령으로 삼으니 집사 모초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독서삼품과)으로 관직에 나오지 않았으니 수령직을 맡길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시중이 말하기를 "그가 문적 출신은 아니지만 일찍이 당에 가서 학생이 된 일이 있으니 어찌 등용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왕이 좇았다.
<삼국사기>   
  1. 6두품 출신의 도당 유학생이 반신라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2.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는 귀국한 후에 각각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3. ④를 읽고, 독서삼품과 출신과 도당 유학생 출신이 받은 대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심화과정: 신라 말기 선종 불교의 영향

① 820년대 초에 승려 도의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당나라 서당대사의 깊은 뜻을 보고 지혜의 빛이 스승과 비슷해져서 돌아왔으니, 그가 그윽한 이치를 처음 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메추라기의 작은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큰 붕새가 남쪽으로 가려는 높은 뜻을 헐뜯고, 기왕에 공부했던 경전 외우는 데만 마음이 쏠려 선종을 마귀 같다고 다투어 비웃었다. 그래서 도의는 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서울에 갈 생각을 버리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비문>

② 교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 불교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 문자를 넘어서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 불교이다. 선종은 통일 전후에 신라에 수용되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 784년에 도의가 본격적으로 남종선을 배우고자 당나라에 간 이래 혜소 · 혜철 · 무염 등이 뒤를 이었고, 이들 선사들은 820년대 초에 처음 귀국한 도의를 뒤따라 차례로 귀국하였다. 신라 사회의 변화로 선종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으나, 도의 자신은 교종의 반발로 서울인 경주에서 교화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설악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대신 도의보다 조금 늦게 귀국한 홍척은 흥덕왕과 같은 왕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문 9산의 대부분은 왕실이나 중앙 귀족이 아니라 이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지방 세력, 곧 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9산 선문의 개창조를 비롯한 선승들은 호족 출신이나 중앙 귀족 출신으로서 지방에 낙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 선승을 후원하여 산문을 개창하게 한 지원 세력도 지방 호족이었다. 그래서 선종 사원은 산문을 후원하는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았다. 성주산문은 보령 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서 개창되었고, 사굴산문은 강릉 지방의 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 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1. 교종 불교와 선종 불교는 어떻게 다른가?
  2. 선종이 처음 수용되었을 때 환영받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3. 선종 사원과 호족의 활동범위는 어떤 상관 관계를 보였는가?


2. 중세의 문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KH6 P.06-104 104]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중세 문화는 고대 문화의 기반 위에서 조상들의 노력과 슬기가 보태져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KH6 P.06-105 105]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선종의 통합 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KH6 P.06-106 106]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볼 수 있다.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유학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 유학의 발달]

태조 때의 유학자

고려 태조 때 최언위, 최응, 최지몽 등 유학자들이 태조를 보필하면서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 경영을 건의하였다.
훈고학(訓誥學)

한대에서 당대까지 성행하였던 유학으로 경전의 자구 해석에 치중하였다.

[KH6 P.06-107 107] 고려 시대에는 유교불교가 함께 발전하였다. 유교는 정치와 관련한 치국의 도로서, 불교는 신앙 생활과 관련한 수신의 도로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KH6 P.06-108 108] 고려 초기에는 유교주의적 정치와 교육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태조 때에는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활약하였고, 광종 때에는 과거 제도가 실시되어 유학에 능숙한 관료들이 등용되었다. 성종 때에는 유교 정치 사상이 확고하게 정립되고, 유학 교육 기관이 정비되었다.

[KH6 P.06-109 109] 이 시기의 대표적 유학자는 최승로였다. 그는 시무 28조의 개혁안을 올리고, 유교 사상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사회 개혁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의 유교 사상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특성을 지녔다.

[KH6 P.06-110 110]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 사회의 발달과 함께 유교 사상도 점차 보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학자는 최충김부식이었다. 문종 때 활약한 최충은 해동공자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고려의 유학을 한 차원 높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고, 고려의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을 새로이 불어넣기도 하였다.

[KH6 P.06-111 111] 인종 때 활약한 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보수적이면서 현실적인 성격의 유학을 대표하였다. 이 시기의 유학은 시문을 중시하는 귀족 취향의 경향이 강하였고, 유교 경전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깊어져 유교 문화는 한층 성숙되었다. 그러나 무신정변이 일어나 문벌 귀족 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고려의 유학은 한동안 크게 위축되었다.



유학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 유학의 발달]

문헌공도(文憲公徒)

문종 때 최충이 세운 9재 학당으로, 12도 중에서 가장 번성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충이 사망한 후 그의 시호인 문헌을 이름으로 붙였다.

[KH6 P.06-112 112] 고려 시대에는 관리 양성과 유학 교육을 위하여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중앙에는 국립 대학으로 국자감(국학)이 설치되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같은 유학부와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학부가 있었다. 유학부에는 문무관 7품 이상 관리의 자제가, 기술학부에는 8품 이하 관리나 서민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지방 관리와 서민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KH6 P.06-113 113] 고려 중기에는 최충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KH6 P.06-114 114] 숙종 때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두어 서적 간행을 활성화하였다.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7재라는 전문 강좌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였으며, 궁중에 도서관 겸 학문 연구소를 두어 유학을 진흥시켰다. 이어서 인종 때에는 경사 6학을 정비하고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KH6 P.06-115 115] 무신 정권기에는 교육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충렬왕 때에 이르러 다시 관학의 진흥에 힘썼다. 이 때에 양현고의 부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교육 재단으로 섬학전을 설치하였다. 또,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공자 사당인 문묘를 새로 건립하여 유교 교육의 진흥에 나섰다. 공민왕 때에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부흥시켜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역사서의 편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 역사서의 편찬]

기전체(紀傳體)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역사를 본기, 세가, 지, 열전, 연표 등으로 나누어 편찬하는 형식
삼국사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KH6 P.06-116 116] 고려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고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KH6 P.06-117 117]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이 편찬되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실록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KH6 P.06-118 118] 인종 때에는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성상 폐하께서 ……"또한, 그에 관한 옛 기록은 표현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건의 기록이 빠진 것이 있으므로, 이로써 군주의 착하고 악함, 신하의 충성됨과 사특함, 나랏일의 안전함과 위태로움, 백성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을 모두 펴서 드러내어 권하거나 징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과 학문과 식견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 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만대에 전하여 빛내기를 해와 별처럼 하고자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삼국사기>

[KH6 P.06-119 119]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고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는 해동고승전, 동명왕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KH6 P.06-120 120]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KH6 P.06-121 121] 충렬왕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으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KH6 P.06-122 122]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및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정통 의식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대두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이제현사략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한다. 그의 역사 서술에는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성리학의 전래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 성리학의 전래]

[KH6 P.06-123 123]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전래되어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부분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KH6 P.06-124 124] 남송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종래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 · 당의 훈고학이나 사장 중심의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KH6 P.06-125 125]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성리학을 배워 와 이제현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다. 충선왕 때, 이제현은 원의 수도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 이색은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KH6 P.06-126 126]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일상 생활과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기 위하여 소학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후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함을 근심하여 양부(兩府)에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무는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고,.....만년에는 항상 회암 선생(주자)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경모하였으므로 드디어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 <고려사>

○ 성균관을 다시 짓고 이색을 판개성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색이 다시 학칙을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經)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의를 마치면 서로 더불어 논란하여 권태를 잊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많이 모여 함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가운데 정주(程朱)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하게 되었다. <고려사>


2) 불교 사상과 신앙



불교 정책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2) 불교 사상과 신앙 - 불교 정책]

[KH6 P.06-127 127] 고려 초기부터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였다. 태조는 불교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도 함께 존중하였다. 그는 개경에 여러 사원을 세웠고,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할 것을 당부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KH6 P.06-128 128] 귀족들도 불교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은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유교와 신앙인 불교를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인들도 현세적인 기복 신앙으로서 불교를 널리 신봉하였다. 지방의 신앙 공동체였던 향도에는 불교와 함께 토속 신앙의 면모도 보이며,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융합된 모습도 보인다.

[KH6 P.06-129 129] 광종 때부터 승과 제도를 실시하여 합격한 자에게는 승계(僧階)를 주고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또, 국사왕사 제도를 둠으로써 불교의 권위가 상징적으로나마 왕권 위에 존재하게 되어 불교가 국교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KH6 P.06-130 130] 사원에는 토지를 지급하고 승려들에게 면역의 혜택을 주었다.



불교 통합 운동과 천태종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2) 불교 사상과 신앙 - 불교 통합 운동과 천태종]

영통사 대각국사비(경기 개풍) | 대각국사 의천의 업적을 새긴 비로,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오인후가 썼다.
영통사 대각국사비(경기 개풍) | 대각국사 의천의 업적을 새긴 비로,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오인후가 썼다.
화엄종과 법상종

화엄종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파이고, 법상종은 유식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이다. 교종인 이 두 종파가 선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주축을 이루었다.
교관겸수(敎觀兼修)

교학과 선을 함께 수행하되 교학의 수련을 중심으로 선을 포용하려는 통합 이론

[KH6 P.06-131 131] 고려 초기에는 화엄 사상을 정비하고 보살의 실천행을 폈던 균여의 화엄종이 성행하였고, 선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KH6 P.06-132 132] 그 뒤에는 개경에 흥왕사현화사와 같은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는 큰 사원이 세워져 불교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 화엄종법상종이 나란히 융성하였다.

[KH6 P.06-133 133] 11세기에 이미 종파적 분열상을 보인 고려 불교계에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된 의천은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는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KH6 P.06-134 134] 이러한 교단 통합 운동은 천태종에 많은 승려가 모이는 등 새로운 교단 분위기를 형성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 · 경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던 불교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시정하는 대책이 뒤따르지 않아 의천이 죽은 뒤 교단은 다시 분열되고 귀족 중심의 불교가 지속되었다.




결사 운동과 조계종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2) 불교 사상과 신앙 - 결사 운동과 조계종]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는 선과 교학을 나란히 수행하되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자는 이론이며, 돈오점수는 단번에 깨닫고 꾸준히 실천하자는 주장을 일컫는다. 선종은 돈오를 지향한다. 지눌은 돈오를 지향처로 삼으면서도 사람들이 오래 익혀 온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꾸준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점수를 아울러 강조하였다.
보우(普愚)

보우는 교단을 통합 정리하는 것이 불교계의 폐단을 바로잡는 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교단과 정치적 상황이 얽혀 이런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KH6 P.06-135 135] 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KH6 P.06-136 136]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지눌은 또한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KH6 P.06-137 137] 지눌의 결사 운동은 지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혜심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KH6 P.06-138 138] 비슷한 시기에 요세는 백성들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KH6 P.06-139 139] 그러나 원 간섭기에 들어서자 개혁 운동의 의지가 퇴색하고 귀족 세력과 연결되어 불교계는 다시 폐단을 드러내었다.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업에도 관여하여 부패가 심하였다. 이에 교단을 정비하려는 보우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대두한 신진 사대부들은 이와 같은 불교계의 사회 · 경제적인 폐단을 크게 비판하였다.

송광사(전남 순천) | 지눌이 수선사 결사를 제창한 사원이다.
송광사(전남 순천) | 지눌이 수선사 결사를 제창한 사원이다.
백련사 | 요세가 백련결사를 열었던 사원이다.
백련사 | 요세가 백련결사를 열었던 사원이다.
지눌의 정혜결사문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면서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대장경 간행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2) 불교 사상과 신앙 - 대장경 간행]

경(經) · 율(律) · 논(論)

경은 부처가 설한 것으로 근본 교리이고, 율은 교단에서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생활 규범이며, 논은 경과 율에 대한 승려나 학자들의 의론과 해석을 일컫는다.
초조대장경 인쇄본(호림 박물관 소장) | 고려 전기에 처음 간행하였으나 몽고 침입 때 불타 버린 초조대장경을 인쇄한 판본이다.
초조대장경 인쇄본(호림 박물관 소장) | 고려 전기에 처음 간행하였으나 몽고 침입 때 불타 버린 초조대장경을 인쇄한 판본이다.

[KH6 P.06-140 140]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 체계가 정비되면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모두 모아 체계화하는 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경 · 율 · 논의 삼장으로 구성된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의의가 높은 유산이다.

[KH6 P.06-141 141]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7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목판에 새겨 간행한 이 초조대장경은 개경에 보관하였다가 대구 팔공산 부인사로 옮겼는데, 몽고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KH6 P.06-142 142]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에 의천은 고려는 물론 송과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10여 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KH6 P.06-143 143] 몽고 침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때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 8만장이 넘는 목판이 모두 보존되어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팔만대장경 목판
팔만대장경 목판


도교와 풍수지리설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2) 불교 사상과 신앙 - 도교와 풍수지리설]

도선 국사 영정
도선 국사 영정

[KH6 P.06-144 144] 고려 시대에는 유교, 불교와 함께 도교도 성행하였다. 불로장생과 현세의 구복을 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도교는 여러 가지 신을 모시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이를 위하여 도교 행사가 자주 베풀어졌고, 궁중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성행하였다. 예종 때 도교 사원이 처음 건립되었고 이 곳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하늘과 별들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행사가 개최되었다.

[KH6 P.06-145 145] 도교에는 불교적인 요소와 도참 사상도 수용되어 일관된 체계를 보이지 못하였으며 교단도 성립하지 못하여 민간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적으로 이름난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는 팔관회는 도교와 민간 신앙 및 불교가 어우러진 행사였다.

[KH6 P.06-146 146] 신라 말에 크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풍수지리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도참 사상이 더해져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KH6 P.06-147 147] 고려 초기에는 개경과 서경이 명당이라는 설이 유포되어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길지설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어 묘청서경 천도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문종을 전후한 시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새로이 한양 명당설이 대두하여 이 곳을 남경으로 승격하고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도선의 풍수지리 사상

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의 대가로는 도선이 있다. 그는 선종 계통의 승려로서, 전 국토의 자연 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인문지리적 지식에다 경주 중앙 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지방 호족들의 대두, 오랜 전란에 지쳐서 통일의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일반 백성들의 인식을 종합하여 체계적인 풍수도참설을 만들었다. 이 풍수 도참설은 민심을 경주에서 지방으로 바꿈으로써 각 지방에 대두하고 있던 호족 세력들의 분열을 합리화하여 주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가 한반도 동남부 지방인 경주에서 중부 지방인 개성으로 옮겨 가고, 역사의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 귀족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바뀌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개성지방에서 성장한 호족 출신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3)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학과 의학

관측 기록

고려사 천문지에 실린 일식 기록은 130여 회나 되고, 혜성 관측 기록도 87회에 이른다.
수시력(授時曆)

수시력에서는 1년을 365.2425일로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00년 후인 16세기 말 서양에서 개정한 그레고리우스력과 같다.
향약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거나 채집한 약재
고려의 첨성대(경기 개성)
고려의 첨성대(경기 개성)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3) 과학 기술의 발달 - 천문학과 의학]

[KH6 P.06-148 148] 고려 시대에는 고대 사회의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 기술도 수용하여 이 분야에서 많은 중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는 율학, 서학, 산학 등의 잡학을 교육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에서도 기술관을 등용하기 위한 잡과가 실시되어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KH6 P.06-149 149] 고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대표하는 것은 천문학, 의학, 인쇄술, 상감 기술, 화약 무기 제조술 등이었다.

[KH6 P.06-150 150] 천문학은 천문 관측과 역법 계산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천문과 역법을 맡은 관청으로 사천대(서운관)가 설치되었고, 이 곳의 관리들은 첨성대에서 관측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식, 혜성, 태양 흑점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고, 이런 기록들은 당시 과학 기술 분야에서 앞서 있던 이슬람 문명의 기록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KH6 P.06-151 151] 역법 연구에서도 착실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던 당의 선명력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의 충선왕 때는 원의 수시력을 채용하고 그 이론과 계산법을 충분히 소화하였다. 이슬람 역법까지 수용하여 원에서 만든 수시력은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가장 훌륭한 역법이었다.

[KH6 P.06-152 152] 의학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의료 업무를 맡은 태의감에서 의학 교육을 실시하고, 의원을 뽑는 의과를 시행하여 고려 의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KH6 P.06-153 153] 고려 중기의 의학은 당 · 송 의학의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의학으로 발달하여 향약방이라는 고려의 독자적 처방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향약구급방을 비롯한 많은 의서가 편찬되었다. 13세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과 국산 약재 180여 종이 소개되어 있다.



인쇄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3) 과학 기술의 발달 - 인쇄술의 발달]

[KH6 P.06-154 154] 고려 시대의 기술학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개경과 서경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많은 책들을 수집, 보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 권의 진기한 책들이 보관되었고, 송에서도 구하여 갈 정도였다. 또, 각종 책의 수요가 증가하여 서적포에서 새로이 책을 인쇄하기도 하였다.

[KH6 P.06-155 155] 신라 때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대장경판목은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목판 인쇄술은 한 가지의 책을 다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여러 가지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활판 인쇄술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기에는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상정고금예문

12세기 인종 때 최윤의 등이 지은 의례서인데,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우가 보관하던 것을 강화도에서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였다.

[KH6 P.06-156 156]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당한 먹과 종이의 제조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는 이미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몽고와 전쟁 중이던 강화도 피난시에는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1234). 이는 서양에서 금속 활자 인쇄가 시작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1377)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KH6 P.06-157 157]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전국적으로 닥나무의 재배를 장려하고, 종이 제조의 전담 관서를 설치하여 우수한 종이의 제조에 힘썼다. 이리하여 고려의 제지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으며, 질기고 희면서 앞뒤가 반질반질하여 글을 쓰거나 인쇄하기에 적당한 종이가 생산되었다. 당시 고려에서 만든 종이는 중국에 수출되어 호평을 받았다.

직지 심체 요절과 판틀의 복원품 |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직지 심체 요절과 판틀의 복원품 |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직지 심체 요절과 판틀의 복원품 |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의 목판 제조 기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즉 재조대장경의 목판 제조 기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훌륭한 기술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목판의 자재는 주로 산벚나무를 썼다. 크기는 가로 72.6cm, 세로 26.4cm, 두께 2.8∼3.75cm, 이고 무게는 2.4∼3.75kg이다. 판목은 양쪽에 편목을 끼워 붙이고, 네 귀에는 구리판으로 된 직사각형의 띠를 둘러쳤다. 이것은 판목이 뒤틀리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보존할 때 판목의 양쪽 면이 다른 판목의 표면과 밀착하지 않고 사이가 뜨도록 해서 통풍이 잘 되어 새긴 글자가 늘 깨끗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래야만 목판이 단단해져 뒤틀리지 않고 새겨 놓은 글자가 갈라지지 않는다. 거기에다 또 전면에는 얇게 옻칠을 했다. 벌레가 먹지 않도록 하고 목판이 부식되지 않게 한 것이다. 또, 판의 한 쪽 끝에는 작은 글자로 된 경전의 이름과 권수, 장수 및 천자문 순서로 된 함수의 번호가 새겨 있다. 인쇄의 능률을 높이고 판본을 조직적으로 관리, 보존하기 위한 분류 기술인 것이다. 8만여 장의 방대한 목판의 보존, 관리와 필요에 따라 인쇄를 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조 대장경은 그 내용이 정확하고 글씨가 아름다우며, 목판 제작 기술이 뛰어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판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고려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의 목판 인쇄는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에서 최고의 기술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전상운, <한국 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농업 기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3) 과학 기술의 발달 - 농업 기술의 발달]

고려 후기 강화도의 간척지 최영준, <국토와 민족 생활사>
고려 후기 강화도의 간척지 최영준, <국토와 민족 생활사>

[KH6 P.06-158 158]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농민 생활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적극적인 권농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 때에는 황무지 개간의 규정을 마련하여 토지 개간을 장려하였고, 성종 때에는 각 지방의 무기를 거둬들이고 이를 농기구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KH6 P.06-159 159] 이러한 권농 정책에 힘입어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 토지의 개간과 간척 등이 이뤄지고, 수리 시설이 개선되었으며,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해마다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늘어났다.
고려 중기까지는 묵은땅, 황무지, 산지 등의 개간이 주로 이루어졌으나, 후기에는 해안 지방의 저습지가 간척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강화도 피난시기 이후에는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간척 사업이 추진되었다. 서해안 지방의 간척 사업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적은 시기를 주로 활용하였다. 또,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가 개축되었으며, 소규모의 제언(저수지)이 확충되고 해안의 방조제 등이 만들어져 수리 시설과 관련된 농업 기술이 점차 발전하였다.

[KH6 P.06-160 160] 고려 시대에는 논농사나 밭농사에서 1년 1작이 기본이었으며, 논농사에서는 직파법이 주로 행해졌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남부 지방 일부에서 이앙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밭농사에서도 2년 동안에 보리, 콩, 조 등을 돌려짓기하는 2년 3작의 윤작법도 보급되었다. 그리고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도 널리 보급되어 휴경 기간의 단축과 생산력의 증대 등을 가져왔다.

[KH6 P.06-161 161] 시비법도 발달하여 가축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하였고, 콩과 작물을 심은 뒤 갈아엎어 비료로 사용하는 녹비법 등이 시행되었다. 또, 풀이나 나무를 불태워 그 재를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시비법이 발달함에 따라 거르지 않고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늘어났으며, 농업 생산력도 더욱 증가하였다.

[KH6 P.06-162 162] 고려 후기에는 중국의 농서를 도입하여 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암은 원의 농상집요를 소개, 보급하였는데, 이는 농업 기술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공민왕문익점이 원에서 목화씨를 들여왔으며, 이로써 목화 재배가 고려 말에 시작되어 의생활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화약 무기 제조와 조선 기술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3) 과학 기술의 발달 - 화약 무기 제조와 조선 기술]

화약 제조법

최무선은 중국인 이원으로부터 화약의 중요한 원료인 염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화약 제조법을 완전히 알아냈다고 한다. 염초는 질산칼륨을 말한다.

[KH6 P.06-163 163] 과학 기술의 발달은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고려 말에 최무선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화약 무기의 사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화약 제조 기술의 습득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화약 제조 기술을 비밀에 붙여서 고려에서는 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무선의 끈질긴 노력으로 화약 제조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화포와 같은 화약 무기의 제조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얼마 후에는 20종에 가까운 화약 무기가 만들어졌다. 최무선은 이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하였다.

[KH6 P.06-164 164] 배를 만드는 기술도 발달하였다. 송과 해상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길이가 96척이나 되는 대형 범선이 제조되었다. 각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미를 개경으로 운송하는 조운 체계가 확립되면서 1,000석의 곡물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조운선도 등장하였는데, 이는 주로 해안 지방의 조창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200석 정도의 곡물을 실을 수 있는 소형 조운선은 주로 한강 유역의 조창에 배치되었다.

[KH6 P.06-165 165] 13세기 후반에는 원의 강요에 따라 일본 원정에 필요한 전함 수백 척을 짧은 기간에 건조하였는데 이는 고려 시대의 조선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고려 말에는 배에 화포를 설치하여 왜구 격퇴에 활용하였다. 이 경우 배의 구조를 화포의 사용에 알맞도록 흔들림이 적게 개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4) 귀족 문화의 발달



문학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4) 귀족 문화의 발달 - 문학의 발달]

보현십원가

균여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어려운 불경을 향가로 풀이한 것이다. 보현보살이 제시한 열 가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작자 스스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KH6 P.06-166 166] 고려 전기에는 광종 때부터 실시한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성종 이후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한문학은 관리들의 필수 교양이 되었고, 박인량정지상을 비롯한 우수한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한문학은 중국 모방의 단계를 벗어나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고려 사회가 귀족화되면서 당의 시와 송의 산문을 숭상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KH6 P.06-167 167] 한편, 삼국 시대 이래의 향가도 맥을 이어 왔는데, 광종 때 균여가 지은 보현십원가 11수가 그의 전기인 균여전에 전해지고 있다. 예종 때는 현화사낙성식에서 문신들에게 한시와 더불어 향가를 짓게 할 정도였으나, 향가는 점차 한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KH6 P.06-168 168] 12세기 후반 이후 약 100년 동안의 무신 집권기에 문학은 큰 변화를 나타내었다. 무신의 집권으로 좌절감에 빠진 문신들은 낭만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띤 수필 형식의 책들을 펴냈다. 임춘국순전에서 술을 의인화하여 현실을 풍자하였고, 이인로는 역대 문인들의 명시들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파한집에서 과거의 명문에 근거한 표현 방식을 강조하였다.

[KH6 P.06-169 169] 최씨 무신 집권기에는 정계에 등용된 문신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학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여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이규보최자를 꼽을 수 있다.

[KH6 P.06-170 170] 고려 후기에는 전반적인 사회 변화가 모색되었는데, 이와 함께 문학에서도 신진 사대부와 민중이 주축이 되어 큰 변화를 만들어 나갔다. 신진 사대부들은 향가 형식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가인 경기체가를 창작하였다.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의 작품들은 주로 유교 정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KH6 P.06-171 171]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설화 형식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문학도 유행하였다.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일부 고쳐 한문으로 기록한 패관 문학이 유행하였는데, 이규보의 백운소설이제현역옹패설이 대표작이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일대기로 구성한 이규보의 국선생전과 이곡의 죽부인전 등도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KH6 P.06-172 172] 한시도 이제현, 이곡, 정몽주 등 유학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곡의 시는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KH6 P.06-173 173] 한편, 민중 사회에서는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장가 혹은 속요라는 가요가 유행하였다. 청산별곡, 가시리, 쌍화점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서민의 생활 감정을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드러내어, 시가 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순전

순(醇)의 기국(器局)과 도량은 크고 깊었다. 출렁대고 넝실거림이 민경창파와 같아 맑게 해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며, 자못 기운을 사람에게 더해 주었다. 일찍이 섭법사(설화에 나오는 인물)에게 나아가 온종일 담론할 때, 자리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드디어 유명하게 되었으며, 호를 국처사라 하였다, 공경, 대부, 신선, 방사들로부터 머슴, 목동, 오랑캐, 외국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보는 자는 모두가 그를 흠모하며, 성대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슬프게 여겨 말하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라고 하였다. 그가 당시 세상에 사랑받고 존중됨이 이와 같았다. <서하집>
고려 가요와 한시

청산별곡
지은이: 작가 모름

살으리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도다.
이럭저럭하여 낮은 지내왔지만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어디에 던지던 돌인고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고?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악장가사>
도토리 노래
지은이: 윤여형

......
이른 새벽 장닭 울음소리에 단잠을 깨어
촌 늙은이는 도시락을 싼다.
천길만길 높은 저 위태로운 산에 올라
가시넝쿨을 휘어잡고 원숭이와 싸우면서
하루 아침이 다 가도록 도토리를 줍건만
도토리는 광주리에 차지 안고
양 다리만 목나무대같이 굳고
주린 창자는 소리쳐 운다. <동문선>


건축과 조각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4) 귀족 문화의 발달 - 건축과 조각]

만월대 터의 축대(경기 개성)
만월대 터의 축대(경기 개성)
수덕사 대웅전(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충남 예산)

[KH6 P.06-174 174] 고려 시대의 건축은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궁궐 건축은 개성 만월대의 궁궐 터를 통해서 웅대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도성 안의 궁궐은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경사진 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에 건물들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보였다. 사원 건물로 유명한 것은 현화사흥왕사였다. 특히, 흥왕사는 12년에 걸쳐 막대한 인원과 경비를 들여 지은 장엄한 사원이었다고 한다.

[KH6 P.06-175 175] 13세기 이후에 지은 주심포식 건물들은 일부 남아 있다. 현존하는 목조 건물들은 균형잡힌 외관과 잘 짜여진 각 부분의 치밀한 배치로 고려 시대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면서 건물을 치장하는 장치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져 있는 건축 양식
다포식(多包式) 건물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져 있는 건물. 웅장한 지붕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꾸밀 때 쓰였다.

[KH6 P.06-176 176]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알려져 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주변 자연과 어우러진 외관과 잘 다듬은 각 부재의 배치가 만들어 내는 경건한 내부 공간으로 유명하다.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KH6 P.06-177 177]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 그 위에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개성 불일사 5층 석탑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고려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들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불일사 5층 석탑(경기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경기 개성)
무량사 5층 석탑(충남 부여)
무량사 5층 석탑(충남 부여)
월정사 8각 9층 석탑 (강원 평창)
월정사 8각 9층 석탑
(강원 평창)

[KH6 P.06-178 178] 승려들의 승탑은 고려 시대에도 조형 예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달사지 승탑과 같이 신라 후기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는 것이 많았고,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등도 만들어있다.

[KH6 P.06-179 179] 고려 시대의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신라 이래의 조형 전통을 계승하는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조형미가 다소 부족한 것이 많았다. 전통 양식으로는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과 같은 걸작이 있다.

[KH6 P.06-180 180] 고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과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어 시대적 특징을 이루었다. 그리고 논산의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의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들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고달사지 승탑 (경기 여주)
고달사지 승탑 (경기 여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경북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경북 영주)
광주 춘궁리 철불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광주 춘궁리 철불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청자와 공예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4) 귀족 문화의 발달 - 청자와 공예]

[KH6 P.06-181 181] 고려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면에서도 큰 발전을 나타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귀족들의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KH6 P.06-182 182] 고려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자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청자인데, 중국인들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꼽았다. 청자의 그윽한 색과 다양한 형태, 그리고 고상한 무늬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상감법

나전 칠기나 은입사 공예에서 응용된 것으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

[KH6 P.06-183 183]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KH6 P.06-184 184] 고려의 청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생산되고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구워졌는데, 전라도 강진부안이 유명하였다. 특히, 강진에서는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 원으로부터 북방 가마의 기술이 도입되면서 청자의 빛깔도 퇴조하여 점차 소박한 분청 사기로 바뀌어 갔다.

[KH6 P.06-185 185] 고려의 금속 공예 역시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은입사로 무늬를 새긴 청동 향로와 버드나무와 동물 무늬를 새긴 청동 정병이 대표작이다.

[KH6 P.06-186 186] 한편,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불경을 넣는 경함, 화장품갑, 문방구 등이 남아 있는데, 한가하고 푸근한 경치를 섬세하게 새겨 넣은 작품들에서 우리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이런 나전 칠기 공예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청자 만드는 과정

청자는 물에는 묽어지고 불에는 굳어지는 자토로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후 청색을 내는 유약을 발라 1,250도에서 1,300도 사이의 온도로 구워서 만든다. 유약은 규석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으로, 이들이 높은 온도에서 녹아 유리질화되는데, 유약에 함유된 철분이 1~3%가 되면 녹청색을 띠어 청자가 된다.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 청자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 부른다. 근년에 와서 만드는 솜씨가 교묘하고 빛깔도 더욱 예뻐졌다. 술 그릇의 모양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어서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술잔, 사발, 꽃병, 옥으로 만든 술잔 등도 만들 수 있지만, 모두 일반적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따라 한 것들이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단, 술 그릇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히 드러내 소개해 둔다. 사자 모양을 한 도제 향로 역시 비색이다. … 여러 그릇들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밀하고 뛰어나다. <고려도경>


글씨, 그림과 음악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2. 중세의 문화 - 4) 귀족 문화의 발달 - 글씨, 그림과 음악]

탄연의 글씨(문수원 중수기)
탄연의 글씨(문수원 중수기)
구양순체와 송설체

구양순체는 당나라 때 구양순의 굳세고 힘찬 글씨체이며, 송설체는 원나라 때 조맹부의 유려한 글씨체이다.
아악(雅樂)

고려 때 송나라에서 수입된 궁중 음악으로, 주로 제사에 쓰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문묘 제례악이 여기에 해당한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경북 영주)부석사 조사당 벽화(경북 영주)

[KH6 P.06-187 187] 고려 문화의 귀족적 특징은 서예, 회화, 음악에서도 나타났다. 서예는 고려 전기에는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탄연의 글씨가 특히 뛰어났다.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뛰어났다.

[KH6 P.06-188 188] 그림은 도화원에 소속된 전문 화원의 그림과 문인이나 승려의 문인화로 나뉘었다. 뛰어난 화가로는 예성강도를 그린 이령과 그의 아들 이광필이 있었으나, 그들의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 후기에는 사군자 중심의 문인화가 유행하였으나, 역시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가 있어 당시의 그림에 원대 북화가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 주고 있다.

[KH6 P.06-189 189] 한편, 고려 후기에는 왕실과 권문세족의 구복적 요구에 따라 불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 내용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불도지장보살도관음보살도가 많았다. 일본에 전해 오고 있는 혜허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 불교 경전을 필사하거나 인쇄할 때, 맨 앞장에 그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한 사경화도 유행하였다. 이 밖에, 사찰과 고분의 벽화가 일부 남아 있는데,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유명하다.

[KH6 P.06-190 190] 고려 시대의 음악은 크게 아악과 향악으로 구분된다. 아악은 송에서 수입된 대성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된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격조 높은 전통 음악을 이루고 있다. 속악이라고도 하는 향악은 우리의 고유 음악이 당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인데, 당시 유행한 민중의 속요와 어울려 수많은 곡을 낳았다. 동동, 한림별곡, 대동강 등의 곡이 유명하였다. 악기는 전래의 우리 악기에 송의 악기가 수입되어 약 40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의 화가 이령과 이광필

이령은 전주 사람이니, 어릴 때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인종 때에 추밀사 이자덕을 따라 송으로 가니 송 휘종이 한림대조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에게 명하여 이령을 좇아 그림을 배우게 하였다. 또, 이령에게 칙령을 내려 본국의 예성강도를 그리게 하므로 얼마 후 바치니 휘종이 찬탄하기를 "근래에 고려의 화공으로 따라온 자가 많으나, 오직 그대만이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라 하고 술과 음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아들 이광필도 그림으로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광필이 없었더라면 삼한의 그림은 절멸되었을 것이다. <고려사>

심화과정: 인쇄술의 발달과 영향

① 미국의 한 역사학자는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인쇄국으로 규정하였다. 1995년에 미국 부통령 고어는 유럽 정보화 회의 석상에서 한국이 인쇄술에서 가장 앞섰으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잘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한국이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정보화에는 그리 기여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② 서양의 알파벳은 활자 인쇄술의 급속한 보급에 적합하였으나, 고려 시대에 우리 민족의 사용한 한자는 활자 인쇄술 발달의 혜택을 크게 볼 수 없었다. 알파벳은 20여 글자에 부호까지 동원해도 100자를 넘지 않고, 이를 여러 크기의 활자로 만들어도 수백 자면 넉넉하였다. 그러나 한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한 번 활자를 주조하면 수만 자 또는 수십만 자씩 만들어야 했다

③ 우리나라에서는 활판을 확실하게 고정시키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서양에서는 활판을 조여 주는  프레스가 사용되어 대량 인쇄를 가능하게 하였다. 서양은 르네상스 시대에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인쇄술 때문에 지식층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지는 못하였다. 
  1. 금속 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고려 시대의 지식 대중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
  2. 고려 시대에 인쇄술은 정보화와 대중화를 제약한 요인들은 무엇인가?
  3. 고려 시대에는 서적 출판이 영리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가?
심화과정: 불교가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

①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의 호위하는 힘을 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라.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에 따르게 되면 각 종단의 절들이 서로 다투어 바꾸고 빼앗고 할 것이니 반드시 이를 금하라. <고려사>

② 홍화사, 유암사, 삼귀사 등의 절을 창건하였다. 승 혜거로 국사를 삼고, 탄문으로 왕사를 삼았다.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마음 속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죄악을 소멸하고자 널리 재회를 베푸니 무뢰배들이 승려라 사칭하여 배부르기를 구하고 구걸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며, 혹은 떡, 쌀 연료를 서울과 지방의 도로에서 나누어 주는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방생소를 줄지어 설치하고, 부근 절에 나아가 불경을 강연하며 도살을 금하니, 왕궁에서 쓰는 고기도 또한 시장에서 사다가 올렸다. <고려사>

③ 지금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나 오직 우리나라만은 편안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다. 평화롭게 닭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사방의 변경에 이른다. 남자는 밭에서 농사짓고, 여자는 집에서 베를 짜며 부귀와 장수를 잃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겠는가? 이는 국사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멀리 해외에 가서 법을 전해 와서 이 땅에 무궁하게 전해 준 데 기인한다. <선봉사 대각국사비 비문> 
  1. 불교가 번성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2. 불교 신앙이 일반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3. 고려에서 사원이 가지는 역할은 무엇인가?
  4. 불교를 신앙하며 기대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3. 근세의 문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KH6 P.06-191 191] 조선 전기에는 괄목할 만한 민족 문화의 창달이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역사서를 비롯한 각 분야의 서적들이 출판되는 등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KH6 P.06-192 192] 성리학이 정착, 발달하여 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갈래의 학파가 나타났다. 불교는 국가에 의하여 정비되면서 위축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KH6 P.06-193 193] 천문학, 의학 등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여 생활에 응용되었고, 농업 기술은 크게 향상되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KH6 P.06-194 194]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적 특색이 돋보이는 발전을 나타내었고, 사대부 양반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반영된 그림과 글씨 및 자기공예가 두드러졌다.



1) 민족 문화의 융성



발달 배경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발달 배경]

[KH6 P.06-195 195]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의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 문화의 기반을 넓힘과 동시에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KH6 P.06-196 196] 15세기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와 학자들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나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는 유교 이념에 토대를 두고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발달시켰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교육 기관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교육 기관]

[KH6 P.06-197 197]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강력한 사상인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조선 시대의 유학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모든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KH6 P.06-198 198]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는데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사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또,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서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촌의 선비나 유생들이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가 되는 손님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의례(儀禮)의 하나이다. 어진 이를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의미를 지닌다.

[KH6 P.06-199 199]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고, 사학은 중학 · 동학 · 남학 · 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들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 · 목 · 군 · 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혹은 훈도를 파견하였다. 한편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들이 교육을 받았다. 교육받는 자들의 연령은 대개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에 이르렀다.

[KH6 P.06-200 200] 이 밖에도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시초이다. 서원에서는 봄 · 가을로 향음주례를 지내는 동시에,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한글 창제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한글 창제]

훈민정음
훈민정음

[KH6 P.06-201 201]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이두향찰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유 문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맞으면서도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좋은 우리의 문자가 필요하였다. 더욱이 조선 한자음의 혼란을 줄이고 피지배층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양반 중심 사회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 문자의 창제가 요청되었다.

[KH6 P.06-202 202] 이에 세종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1446).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뛰어난 문자이다.

[KH6 P.06-203 203]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하였다. 또,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서리들이 한글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KH6 P.06-204 204]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도구 가운데 하나는 자기 민족의 고유 문자이다. 우리 민족은 고유한 문자인 한글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민족 문화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역사서의 편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역사서의 편찬]

실록 편찬

한 국왕이 죽으면 다음 국왕 때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관들이 국왕 앞에서 기록한 사초, 각 관청의 문서들을 모아 만든 시정기 등을 종합, 정리하여 실록을 편년체로 편찬하였다.
편년체(編年體)

연대순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

[KH6 P.06-205 205]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히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서의 편찬에 힘썼다.

[KH6 P.06-206 206] 조선 시대에는 실록의 편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실록의 편찬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록 문화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KH6 P.06-207 207] 태조 때, 정도전고려국사를 편찬하여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려 하였다. 이후에도 고려 시대의 역사를 자주적 입장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 15세기 중엽에 기전체서거정 등이 편찬한 것이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역사서로 박상의 동국사략 등이 편찬되었다.

오대산 사고(강원 평창)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이후에 만든 사고(史庫)로 6.25 전쟁 때 불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오대산 사고(강원 평창)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이후에 만든 사고(史庫)로 6.25 전쟁 때 불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지리서의 편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지리서의 편찬]

[KH6 P.06-209 209] 조선 초기에는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에 힘썼다.

[KH6 P.06-210 210] 태종 때에는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만들어졌다.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세계 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세종 때에는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세조 때에는 양성지 등이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조선방역지도가 현존하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우리나라와 중국 부분 (일본 류코쿠 대학 소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우리나라와 중국 부분
(일본 류코쿠 대학 소장)
조선방역지도 (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조선방역지도
(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KH6 P.06-211 211]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 신찬팔도지리지, 성종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때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윤리, 의례서와 법전 편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1) 민족 문화의 융성 - 윤리, 의례서와 법전 편찬]

삼강행실도 언해본
삼강행실도 언해본
국조오례의

제사 의식인 길례, 관례와 혼례 등의 가례, 사신 접대 의례인 빈례, 군사 의식에 해당하는 군례, 상례 의식인 흉례의 오례를 정리한 책이다.

[KH6 P.06-212 212] 성리학이 조선 사회의 지배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윤리와 의례에 관한 서적의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KH6 P.06-213 213] 세종 때에는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또, 성종 때에는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하여 의례서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KH6 P.06-214 214] 16세기에는 사림이 소학주자가례의 보급과 실천에 힘쓰면서 이륜행실도동몽수지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이륜행실도는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책이며, 동몽수지는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윤리서였다.

[KH6 P.06-215 215] 한편, 조선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썼다. 건국 초기에 정도전조선경국전경제문감을 편찬하였고, 조준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세조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 법전의 편찬은 조선 초기에 정비된 유교적 통치 질서와 문물 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국대전
경국대전


2)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정착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2)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정착]

[KH6 P.06-216 216] 성리학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KH6 P.06-217 217] 15세기 조선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주례(周禮)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KH6 P.06-218 218] 정도전, 권근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 · 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KH6 P.06-219 219]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 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성리학의 융성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2)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융성]

성학십도(이황)
성학십도(이황)

[KH6 P.06-220 220]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KH6 P.06-221 221] 서경덕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KH6 P.06-222 222]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KH6 P.06-223 223]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KH6 P.06-224 224] 반면,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에서 이이는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차이점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파의 형성과 대립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2) 성리학의 발달 - 학파의 형성과 대립]

정여립 모반 사건

1589년 전주 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일으켰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서경덕 · 조식 학파가 피해를 많이 입었으며, 호남 지역은 반역의 향으로 낙인찍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의리 명분론

도덕성에 기반하여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의 이론
척화론(斥和論)

청과 화의를 맺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

[KH6 P.06-225 225]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KH6 P.06-226 226] 먼저,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형성되고, 그 뒤에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에 사림들이 중앙 정계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각 학파를 기반으로 하여 정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KH6 P.06-227 227] 광해군 때, 북인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동법의 시행과 은광 개발 등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을 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이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KH6 P.06-228 228]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한 결과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 · 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들은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예학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2) 성리학의 발달 - 예학의 발달]

예치(禮置)

개인, 사회, 국가를 예로 다스리는 것으로, 예를 가르치는 예교와 예를 배우는 예학을 통해서 실현된다.

[KH6 P.06-229 229] 16세기 중반 주자가례 중심의 생활 규범서가 출현하고, 동시에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KH6 P.06-230 230] 그리하여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 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갔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KH6 P.06-231 231]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김장생정구 등 많은 예학자가 나왔다.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돈암 서원(충남 논산) | 김장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돈암 서원(충남 논산) | 김장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3) 불교와 민간 신앙



불교의 정비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3) 불교와 민간 신앙 - 불교의 정비]

휴정(서산 대사) 영정
휴정(서산 대사) 영정

[KH6 P.06-232 232]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불교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원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회수하여 집권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두터이 하고자 하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아울러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고자 하는 출가를 제한하였다. 세종 때에는 교단을 정리하면서 선종교종 두 종파에 모두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KH6 P.06-233 233] 사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강하였으나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욕구는 완전히 억제하지 못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족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자주 시행되어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세조 때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보급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을 펴서 일시적으로 불교가 중흥되기도 하였다.

[KH6 P.06-234 234] 성종 이후 사림들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불교는 점차 왕실에서 멀어져 산간 불교로 바뀌었다. 명종 때에는 문정 왕후의 지원 아래 일시적인 불교 회복 정책이 펼쳐진 결과 보우(普雨)가 중용되고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휴정(서산 대사)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승병들이 크게 활약함으로써 불교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KH6 P.06-235 235]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원의 경제적 기반 축소와 우수한 인재들의 출가 기피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석보상절 | 수양 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풀이한 책이다.
석보상절 | 수양 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풀이한 책이다.


도교와 민간 신앙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3) 불교와 민간 신앙 - 도교와 민간 신앙]

[KH6 P.06-236 236] 도교 역시 크게 위축되어 사원이 정리되고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천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점이 인정되어 소격서를 설치하고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초제가 시행되었다.

[KH6 P.06-237 237] 사림의 진출 이후 도교 행사가 사라져 가고 성리학의 공리적 면모를 반성하는 심성 중시 경향과 함께 도교불교 등 정신 수양에 도움을 주는 종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KH6 P.06-238 238] 한편, 풍수지리설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되었으며, 양반 사대부의 묘지 선정에도 작용하였다.

[KH6 P.06-239 239] 무격 신앙, 산신 신앙, 삼신 숭배, 촌락제 등은 백성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았다. 특히, 계절에 따른 세시 풍속은 유교 이념과 융합되면서 조상 숭배 의식과 촌락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식이 되었다.

[KH6 P.06-240 240]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드러졌다.



4) 과학 기술의 발달



천문, 역법과 의학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4) 과학 기술의 발달 - 천문, 역법과 의학]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KH6 P.06-241 241] 조선 초기에는 과학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당시의 집권층은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학 기술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또, 우리나라의 전통적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역과 중국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KH6 P.06-242 242]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가 발명, 제작되었다.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가 제작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자격루는 노비 출신의 과학 기술자인 장영실이 제작한 것으로, 정밀 기계 장치와 자동 시보 장치를 갖춘 뛰어난 물시계였다.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KH6 P.06-243 243]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천문도를 만들었다. 태조 때에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세종 때에도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KH6 P.06-244 244]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역법이 마련되었다. 세종 때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이는 15세기 세계 과학의 첨단 수준에 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칠정산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7개의 운동하는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역법서

[KH6 P.06-245 245] 의학에서도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사전을 간행하였다. 이로써 15세기에는 조선 의약학의 자주적 체계가 마련되어 민족 의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향약집성방 서문

예전에 판문하 권중화가 여러 책을 뽑아서 향약간이방을 짓고 그 후 평양백 조준 등과 함께 약국 관원에게 명하여 다시 여러 책을 상고하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험하였던 처방을 취하여 분류해서 편찬한 다음, 인쇄하여 발행하였다. 이로부터 약재를 구하기 쉽고 질병을 치료하기 쉽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방서(약방문을 적은 책)가 중국에서 나온 것이 아직 적고 약 이름이 중국과 다른 것이 많기 때문에 의술을 전공하는 자들이 미비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우리 주상 전하(세종)께서 특별히 유의하시어 의관을 골라 매양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방서를 널리 구하게 하였다.… 세종 13년 가을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 전의 노중례, 부정 박윤덕에게 명하여 다시 향약방에 대해 여러 책에서 빠짐없이 찾아 낸 다음 분류하여 증보하게 해서 한 해가 지나 완성되었다 … 합하여 85권으로 바치니 이름을 향약집성방이라 하였다. <동문선>
갑인자로 찍은 책 (자치통감강목)
갑인자로 찍은 책
(자치통감강목)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4) 과학 기술의 발달 -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

[KH6 P.06-246 246] 조선 초기에는 각종 서적의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면서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KH6 P.06-247 247] 고려 시대에 발명되어 사용된 금속 활자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더욱 개량되었다. 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이어서 세종 때에는 역시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KH6 P.06-248 248] 세종 때에는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종전에는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이제는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리게 되었다.

[KH6 P.06-249 249] 활자 인쇄술과 더불어 제지술이 발달하여 종이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세종 때에는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청으로 조지서를 설치하고 다양한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이에 수많은 서적이 인쇄되었다.




농서의 편찬과 농업 기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4) 과학 기술의 발달 - 농서의 편찬과 농업 기술의 발달]

[KH6 P.06-250 250] 조선 초기는 우리나라 농업 기술에서도 획기적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가 간행되고, 농업 기술이 여러 방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KH6 P.06-251 251] 세종 때에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농서로서,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을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들이 실제 경험한 농사법이 종합되었다. 성종강희맹은 금양(시흥)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방의 농사법을 정리하여 금양잡록을 편찬하였다.

[KH6 P.06-252 252] 조선 초기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밭농사에서는 조 · 보리 · 콩의 2년 3작이 널리 시행되었고, 논농사에서는 남부 지방 일부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실시되었다.

[KH6 P.06-253 253] 벼농사에서는 봄철에 비가 적은 기후 조건 때문에 마른 땅에 종자를 뿌려 일정한 정도 자란 다음에 물을 대주는 건사리(건경법)가 이용되었고, 무논에 종자를 직접 뿌리는 물사리(수경법)도 행해졌다.

시비법

조선 초기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거름은 재, 인분이었다.

[KH6 P.06-254 254] 뿐만 아니라, 남부 지방에서는 모내기법이 고려 말에 이어 계속 실시되었다. 또, 밑거름뒷거름을 주는 각종 시비법이 발달하여 해를 걸러하던 휴경을 하지 않고 매년 농경지를 경작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 후기부터 진전되어 온 농경지의 상경화 현상이 확립되고, 휴경 제도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한 후에 빈 농지를 갈아엎어 다음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가을갈이의 농사법이 점차 보급되어 갔다.

[KH6 P.06-255 255] 조선 전기에는 목화 재배가 거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따라 무명이 많이 생산되어 백성들은 주로 무명옷을 입게 되었고, 무명은 화폐처럼 사용되었다. 삼, 모시의 재배도 성행하였으며, 누에치기도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양잠에 관한 농서도 편찬되었다.

세종의 농사를 권장하는 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데, 농사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이므로 왕도(王道)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천명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복무하게 되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하여 그 삶의 즐거움을 완수하게 할 수 있겠는가? … 농서를 참조하여 시기에 앞서서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너무 늦게도 하지 말고, 다른 부역을 일으켜서 그들의 농사 시기를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니 각각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이 근본(농사)에 힘쓰도록 인도하라. 밭에서 일하고 농사에 힘써서 위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녀를 길러서 나의 백성이 장수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근본이 견고하게 된다면 … 시대는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함께 태평 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세종실록>


병서 편찬과 무기 제조

화차 복원 모형(전쟁 기념관 소장)
화차 복원 모형(전쟁 기념관 소장)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4) 과학 기술의 발달 - 병서 편찬과 무기 제조]

[KH6 P.06-256 256] 조선 초기에는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많은 병서가 편찬되고 각종 무기의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다.

[KH6 P.06-257 257] 세종 때에는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고, 문종 때에는 김종서의 주도하에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간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병장도설이 편찬되어 군사 훈련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KH6 P.06-258 258] 화약 무기의 제조에는 최해산이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최무선의 아들로서, 태종 때에 특채되어 화약 무기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 만든 화포는 사정 거리가 최대 1,000보에 이르렀으며, 바퀴가 달린 화차는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었다.

[KH6 P.06-259 259] 병선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태종 때에는 거북선을 만들었고, 작고 날쌘 싸움배로 비거도선이 제조되어 수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KH6 P.06-260 260]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국방력 강화 및 민생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발달한 과학 기술은 16세기에 이르러 과학 기술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기면서 점차 침체되고 말았다.




5) 문학과 예술



다양한 문학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5) 문학과 예술 - 다양한 문학]

[KH6 P.06-261 261] 조선 전기의 문학은 작자에 따라 내용과 형식에 큰 차이를 보였다. 즉, 작자가 조선 왕조의 건설에 참여한 관료 문인인지 고려에 충절을 지키려는 사대부였는지에 따라 달랐다. 초기에는 격식을 존중하고 질서와 조화를 내세우는 경향의 문학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개인적 감정과 심성을 나타내려는 경향의 가사시조 등이 우세해져 갔다.

서거정의 자주 의식

동문선 서문에서 서거정은 "우리나라의 글은 송이나 원의 글이 아니고 한이나 당의 글도 아니다. 바로 우리나라의 글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KH6 P.06-262 262] 조선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세력은 주로 악장한문학을 통하여 새 왕조의 탄생과 자신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한편, 우리 민족의 자주 의식을 드러냈다. 정인지 등이 지은 용비어천가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서거정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시와 산문 중에서 빼어난 것을 골라 동문선을 편찬하고 우리나라의 글에 대한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KH6 P.06-263 263] 고려 말부터 나타났던 시조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두 가지 경향을 보여 준다. 건국 초의 패기가 넘치는 시조로는 김종서남이의 작품이 유명하다. 유교적 충절을 읊은 시조로는 길재원천석의 작품이 손꼽힌다. 시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필요에서 가사도 나타났다.

[KH6 P.06-264 264] 한편, 조선 초기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정한 격식 없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은 설화 문학이다. 그 내용은 관리들의 기이한 행적과 서민들의 풍속, 감정, 역사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성현용재총화 등이 있다. 이런 설화 문학에는 불의를 폭로하고 풍자하는 내용이 많아서 당시 서민 사회를 이해하려는 관리들의 자세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KH6 P.06-265 265] 설화 문학은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와 같이 구전 설화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하여 소설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금오신화는 평양, 개성, 경주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과 불의에 대한 비판 등 민중의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담고 있다.

[KH6 P.06-266 266] 16세기에 이르러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 문학이 주류가 되었다. 사림 문학은 표현 형식보다는 흥취와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따라 한시와 시조, 가사 분야가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의 한시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은 줄어들었으나 높은 격조를 지니고 있었다.

[KH6 P.06-267 267] 시조도 조선 초기의 경향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간 본연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황진이는 남녀 간의 애정과 이별의 정한을 읊었고, 윤선도오우가어부사시사에서 자연을 벗하여 살아가는 여유롭고 자족적인 삶을 표현하였다.

[KH6 P.06-268 268] 새롭게 발전한 가사 문학에서는 송순, 정철, 박인로의 작품이 뛰어났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에서 풍부한 우리말의 어휘를 마음껏 구사하여 관동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와 왕에 대한 충성심을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KH6 P.06-269 269] 이 시기에 사림 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난 문인으로는 어숙권임제를 꼽을 수 있다. 서얼 출신의 어숙권은 패관잡기를 지어 문벌 제도와 적서 차별의 폐단을 폭로하기도 하였고, 임제는 풍자적이고 우의적인 시와 산문을 써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유학자들의 존화 의식을 비판하였다.

[KH6 P.06-270 270] 한편, 문학의 저변이 확대됨에 따라 여류 문인들도 많이 나왔다. 신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에 두루 능하였고, 허난설헌은 한시로 유명하였다. 민간에서는 재미있는 민담이 전승되고 있었다.

관동별곡
지은이: 정철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관찰사)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연추문 들이달아 경회 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옥으로 만든 신표)이 앞에 섰다.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디메오. 치악이 여기로다.
소양강 내린 물이 어디로 든단 말고… <송강가사>
시조
지은이: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청구영언>


왕실과 양반의 건축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5) 문학과 예술 - 왕실과 양반의 건축]

보통문(평남 평양)
보통문(평남 평양)

[KH6 P.06-271 271] 조선 초기에는 사원 위주의 고려 건축과는 달리, 궁궐, 관아, 성문, 학교 등이 건축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건물은 건물주의 신분에 따라 크기와 장식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는데, 그 목적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KH6 P.06-272 272] 건국 초기에 도성을 건설하고, 경복궁을 지었으며, 곧이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세웠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창경궁의 명정전과 도성의 숭례문, 창덕궁의 돈화문이 당시의 위엄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고려의 건축 기법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된 조선 전기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반면에 개성의 남대문평양의 보통문은 고려 시대 건축의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지니면서 조선 시대 건축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KH6 P.06-273 273] 왕실의 비호를 받은 불교와 관련된 건축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적지 않다. 무위사 극락전 은 검박하고 단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장경판전은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한 것이다. 세조 때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이 시기 석탑의 대표작이다.

[KH6 P.06-274 274]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의 진출과 함께 서원의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원은 산과 하천이 가까이 있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할 수 있는, 마을 부근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였는데, 교육 공간인 강당을 중심으로 사당과 기숙 시설인 동재서재를 갖추었다. 서원 건축은 가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주위의 자연과 빼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주의 옥산 서원과 안동의 도산 서원이 있다.



분청사기, 백자와 공예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5) 문학과 예술 - 분청사기, 백자와 공예]

[KH6 P.06-275 275] 실용과 검소를 중요하게 여긴 기품을 반영한 조선의 공예는 고려 시대와는 달리, 사치품보다는 생활 필수품이나 문방구 등에서 그 특색을 나타내었다. 대표적인 공예 분야는 자기였다. 궁중이나 관청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 대신에 백자분청사기를 널리 사용하였다. 분청사기와 옹기그릇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만들어져 관수용이나 민수용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 분원에서 생산하는 자기의 품질이 우수하였다.

[KH6 P.06-276 276]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것으로, 백색의 분과 안료로써 무늬를 만들어 장식하였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안정된 그릇 모양과 소박하고 천진스러운 무늬가 어우러져 정형화되지 않으면서 구김살 없는 우리의 멋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16세기부터 세련된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점차 그 생산이 줄어들었다.

순백자 병
순백자 병

[KH6 P.06-277 277] 조선의 백자는 고려 백자의 전통을 잇고 명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아 이전보다 질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백자는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백하며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서 선비들의 취향과 어울렸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KH6 P.06-278 278] 장롱, 문갑 같은 목공예 분야와 돗자리 공예 분야에서도 재료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기품 있는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이 밖에, 쇠뿔을 쪼개어 무늬를 새긴 화각 공예, 그리고 자개 공예도 유명하다. 수와 매듭에서도 부녀자들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취를 살린 뛰어난 작품들이 있다.



그림과 글씨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5) 문학과 예술 - 그림과 글씨]

[KH6 P.06-279 279] 15세기 그림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의 그림과 관료이자 문인이었던 선비들의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중국 역대 화풍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우리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발하였다. 조선의 이런 그림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로는 안견, 강희안을 꼽을 수 있다.

[KH6 P.06-280 280]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안견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몽유도원도(안견) |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본 도원을 그리게 한 그림이다(일본 덴리 대학 소장).
몽유도원도(안견) |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본 도원을 그리게 한 그림이다(일본 덴리 대학 소장).

[KH6 P.06-281 281] 문인 화가인 강희안은 시적 정서가 흐르는 낭만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고사관수도는 선비가 수면을 바라보며 무념무상에 잠긴 모습을 담고 있는데, 세부 묘사는 대담하게 생략하고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인물의 내면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표현하였다.

고사관수도(강희안)
고사관수도(강희안)
초충도(신사임당)
초충도(신사임당)
묵죽도(이정)
묵죽도(이정)
안평 대군의 글씨(몽유도원도 서문)
안평 대군의 글씨(몽유도원도 서문)
한호의 글씨(석봉 천자문)
한호의 글씨(석봉 천자문)

[KH6 P.06-282 282] 16세기에는 15세기의 전통을 토대로 다양한 화풍이 발달하였다. 강한 필치의 산수화를 이어 가기도 하고, 선비들의 정신 세계를 사군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KH6 P.06-283 283] 노비 출신으로 화원에 발탁된 이상좌는 색다른 분위기의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대표작인 송하보월도는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모진 비바람을 이겨 내고 있는 늙은 소나무를 통하여 강인한 정신과 굳센 기개를 표현하였다.

[KH6 P.06-284 284] 특히, 이암은 동물들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그렸고, 신사임당은 풀과 벌레를 소박하고 섬세하게 그려 여성의 심정을 잘 나타내었다. 황집중은 포도를, 이정은 대나무를, 어몽룡은 매화를 잘 그렸는데, 이들은 고매한 정신 세계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KH6 P.06-285 285] 서예양반이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필수 교양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서예가들이 많이 나타났고, 독자적인 서체를 개발한 사람도 많았다. 당대 예술계를 이끌었던 안평 대군송설체를 따르면서 수려하고 활달한 기풍을 살린 독자적인 글씨를 썼다. 양사언초서에 능하였고, 한호왕희지체에 우리 고유의 예술성을 가미하여 단정하면서 건실한 석봉체를 이루었다. 한호는 명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써서 중국에도 이름이 알려졌고, 그가 쓴 천자문은 널리 보급되어 일반인들도 석봉체를 많이 따라 쓰게 되었다.




음악과 무용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5) 문학과 예술 - 음악과 무용]

[KH6 P.06-286 286] 조선 시대에는 음악을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국가의 각종 의례와 밀접히 관련되었기 때문에 중요시하였다. 세종박연에게 악기를 개량하거나 만들게 하였고, 스스로 여민락 등 악곡을 짓고 소리의 장단과 높낮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정간보를 창안하였다. 아울러 악곡과 악보를 정리하게 하고 아악을 체계화함으로써 아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KH6 P.06-287 287] 성종 때에 성현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 무용, 의상 및 소도구까지 망라하여 정리함으로써 전통 음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KH6 P.06-288 288]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민간에서도 당악향악속악으로 발달시켜 가사, 시조, 가곡 등 우리말로 된 노래들을 연주하는 음악이나 민요에 활용하였다.

[KH6 P.06-289 289] 궁중과 관청의 의례에서는 음악과 함께 춤이 따랐다. 이들 춤은 행사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는데, 처용무처럼 전통 춤을 우아하게 변용시킨 것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 전통 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산대놀이라는 탈춤과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도 유행하였다.

음악의 기능

악(樂)은 하늘이 내어 사람에게 보낸 것이니, 허(虛)에서 나와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맥박을 뛰게 하여 정신을 막힘없이 흐르게 한다.…… 다른 소리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 것은 임금이 위에서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바르게 이끄는 것과 거짓되게 이끄는 것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나며, 풍속이 번영하고 쇠퇴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악이야말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는 큰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악학궤범>

심화과정: 사림 문화의 영향

① 15세기 말부터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대두한 사림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정몽주길재 계통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의리와 도덕을 숭상하고, 성리학의 이기론심성론의 탐구에 힘썼으며, 또한 예학을 발전시켰다.

②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대강 서게 되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은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 <정암집>

③ 16세기의 사림들은 왕도주의를 내세우면서 단군보다 기자를 더욱 중시하고 기자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는 기자가 왕도의 창시자로서 도덕 정치를 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 사림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치우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1. 16세기 문화 내용을 15세기와 비교하여 정리해 보자.
  2. 사림 세력의 대두로 인하여 문화면에서 더 발달한 분야와 쇠퇴한 분야를 찾아보자.
  3.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이유를 사림 세력의 성향과 관련하여 설명해보자.
심화과정: 양반 지배층의 시대 상황 인식이 문화에 끼친 영향

① 조선 초기에는 평양에 단군 사당을 건립하고 국가에서 제사지냈으며,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올 때 이 곳에서 참배하게 하였다.

② 주화(主和) 두 글자가 신의 일평생에 허물이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오늘날 화친하려는 일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사고, 끝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지천집>

③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은 우리나라에게는 부모의 나라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1. ①의 자료에 나타나는 시대 상황 인식이 반영된 문화적인 예를 찾아보자.
  2. ②와 ③의 주장이 제기된 사상적 배경의 차이를 조사해 보자.
  3. ②와 ③의 자료에 나타나는 인식이 반영, 계승된 정책이나 문화 내용을 조사해 보자.


4. 문화의 새 기운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KH6 P.06-290 290] 양 난 이후 사회 각 분야의 변화와 함께 문화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층과 서민층이 문화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의 질적 변화와 함께 문화의 폭이 확대되었다.

[KH6 P.06-291 291] 학문에서는 양명학을 받아들였으며, 사회 변화를 반영한 실학이 나타나 개혁 추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KH6 P.06-292 292] 천문학의학 등 각 분야의 기술적 성과들이 농업과 상업 등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도 이런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KH6 P.06-293 293] 예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넘쳐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백자공예도 생활 공예가 중심이 되었다. 우리의 산수와 삶을 소재로 하는 문예 풍토가 진작되어 문학과 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성리학의 변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1) 성리학의 변화]



성리학교조화 경향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1) 성리학의 변화 - 성리학의 교조화 경향]

6경

원시 유학에서 중시한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악기를 가리킨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
호락 논쟁(湖洛論爭)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충청도 지역의 호론(湖論)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서울 · 경기 지역의 낙론(洛論) 사이의 논쟁이다. 뒤에 호론은 위정척사 사상으로 연결되었으며, 낙론은 북학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KH6 P.06-294 294]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의리 명분론을 강화하며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화함으로써 자신들의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송시열의 저술 등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는 주자의 본뜻에 충실함으로써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KH6 P.06-295 295] 반면,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윤휴박세당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KH6 P.06-296 296] 서경덕의 영향을 받은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으며, 박세당 역시 양명학노장 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었다.

[KH6 P.06-297 297] 한편, 이황 학파의 영남 남인이이의 학문을 조선 성리학의 정통으로 만들려는 이이 학파의 노론 사이에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KH6 P.06-298 298]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조선 사상계는 다시 심성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을 중심으로 호락 논쟁이 벌어졌다.

[KH6 P.06-299 299] 한편, 이이의 사상을 계승하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시한 노론과는 달리,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하는 등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였다.

박세당의 탈성리학 사상

박세당은 성리학이 스승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자유로운 비판을 강조하였다. 곧, 주자가 높고 원대한 형이상학적인 최고의 선(善)의 정신을 통하여 인식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는 데 반하여, 일상적 일용 행사를 통한 인식의 타당성을 강조하여 인식의 상대성을 제공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자가 인간 본성의 선천성을 주장한 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도덕적 판단력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 행위와 주체적인 사고 행위를 강조하고, 노자의 도덕경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리학적 흐름에 대하여 포용성과 개방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양명학의 수용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1) 성리학의 변화 - 양명학의 수용]

양명학

양명학은 인간의 마음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心卽理)를 바탕으로, 인간이 상하 존비의 차별 없이 본래 타고난 천리(天理)로서의 양지를 실현하여 사물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치양지설(致良知設), 그리고 앎과 행함이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은 행함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양명학의 계승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박은식, 정인보 등은 양명학을 계승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KH6 P.06-300 300] 성리학의 교조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은 이미 중종 때에 조선에 전래되었던 새로운 유학 사상이다. 이후 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주로 서경덕 학파와 종친들 사이에서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이황이 비판한 것을 계기로 하여 몇몇 학자들만이 관심을 기울였으나, 17세기 후반 소론 학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KH6 P.06-301 301] 그 뒤, 정제두가 학문적 체계를 갖추면서 양명학은 사상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는 일반민을 도덕 실천의 주체로 상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양반 신분제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KH6 P.06-302 302] 18세기 초 정제두가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양명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집안의 후손들과 인척을 중심으로 가학의 형태를 띠며 계승되었다.

[KH6 P.06-303 303] 강화 학파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역사학, 국어학, 서화, 문학 등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갔으며, 실학자들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2) 실학의 발달



실학의 등장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2) 실학의 발달 - 실학의 등장]

[KH6 P.06-304 304]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18세기의 사회 · 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KH6 P.06-305 305] 조선 후기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리학의 한계성을 자각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현실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KH6 P.06-306 306]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KH6 P.06-307 307]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때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농업 중심의 개혁론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2) 실학의 발달 - 농업 중심의 개혁론]

균전론(均田論)

유형원은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였다.
한전론(限田論)

이익은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을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여섯 가지 좀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사치와 미신, 승려, 게으름

[KH6 P.06-308 308]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부근의 경기 지방에서 활약한 남인 출신이었다. 이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KH6 P.06-309 309]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均田論)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KH6 P.06-310 310]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 이익 학파를 형성하게 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하고,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KH6 P.06-311 311]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이었다. 그는 18세기 말 정조 때 벼슬하였으나, 신유박해 때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약용은 지방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KH6 P.06-312 312]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통치자라고 주장하면서 백성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 제도의 개선 방안도 모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정약용여전론

이제 농사짓는 사람은 토지를 갖고 농사짓지 않은 사람은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실시해야 한다. 산골짜기와 시냇물의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되어 있는 지역을 1여(閭)로 한다. …… 1여마다 여장(閭長)을 두며 무릇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한다. …… 여민들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 분배한다. 이 때 국가에 바치는 세와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마지를 가지고 노동 일수에 따라 여민(閭民)에게 분배한다. <여유당전서>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2) 실학의 발달 -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북학파

북학파 실학 사상의 대두는 병자호란 이후 굳어졌던 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수원의 농업론

농업에서는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 농업의 상업적 경영과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KH6 P.06-313 313]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KH6 P.06-314 314]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KH6 P.06-315 315]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노론 명문 출신인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KH6 P.06-316 316]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또,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KH6 P.06-317 317]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인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양반 집안의 서자로 태어난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KH6 P.06-318 318]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 사상은 실증적 · 민족적 ·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특히, 북학파 실학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박제가의 소비관

비유하건대, 재물은 대체로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女紅)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工匠: 수공업자)이 도야(陶冶: 기술을 익힘)하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게 되므로, 사농공상의 사민이 모두 곤궁하여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 <북학의>


국학 연구의 확대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2) 실학의 발달 - 국학 연구의 확대]

100리척

100리척100리를 1척으로 정한 지도 제작 방식
대동여지전도(김정호)
대동여지전도(김정호)

[KH6 P.06-319 319]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KH6 P.06-320 320]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 책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으며,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KH6 P.06-321 321]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KH6 P.06-322 322] 이종휘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한편,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KH6 P.06-323 323]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정밀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역사 지리서로는 한백겸동국지리지, 정약용아방강역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택리지가 편찬되었다. 특히, 택리지는 각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물산, 풍속, 인심 등을 서술하고,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인가를 논하였다.

[KH6 P.06-324 324] 중국으로부터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고, 그 중에서도 정상기김정호가 만든 지도가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지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KH6 P.06-325 325] 우리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진전되어 신경준훈민정음운해유희언문지 등이 나왔고, 우리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고금석림도 편찬되었다.

[KH6 P.06-326 326]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지봉유설이며, 그 뒤를 이어 18~19세기에 이익성호사설, 이덕무청장관전서, 서유구임원경제지, 이규경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나왔다. 또, 영 · 정조 때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으로서 가치가 있다.

안정복의 삼국 인식

삼국사에서 신라를 으뜸으로 한 것은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고, 뒤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으며,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으므로 편찬한 것이 모두 신라의 남은 문적(文籍)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편찬한 내용이 신라에 대하여는 약간 자세히 갖추어져 있고, 백제에 대하여는 겨우 세대만을 기록했을 뿐 없는 것이 많다. …… 고구려의 강대하고 현저함은 백제에 비할 바가 아니며, 신라가 자처한 땅의 일부는 남쪽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김씨(김부식)는 신라사에 쓰여진 고구려 땅을 근거로 했을 뿐이다.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 인식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고구려)가 망한 다음, 김씨(신라)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발해)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하였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당연히 남북국을 다룬 역사책이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발해고>


3) 과학 기술의 발달



서양 문물의 수용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3) 과학 기술의 발달 - 서양 문물의 수용]

[KH6 P.06-327 327]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면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KH6 P.06-328 328] 서양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서 들어왔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 지도를,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 천리경 · 자명종 등을 전하였다. 당시 명 · 청의 수도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들은 베이징에서 이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KH6 P.06-329 329]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벨테브레(Weltevree)

인조 때 제주도에 표류하여 귀화하였다.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고 하며 박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KH6 P.06-330 330] 17세기에는 벨테브레하멜 일행이 우리나라에 표류해 왔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법과 조종법을 가르쳐 주었고, 하멜 일행은 15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다.

[KH6 P.06-331 331]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은 18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한 채 정체되고 말았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3) 과학 기술의 발달 - 천문학과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숭실 대학교 박물관 소장)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숭실 대학교 박물관 소장)

[KH6 P.06-332 332] 조선 후기에는 국민의 생활 개선을 중요시하여 과학과 기술 분야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많았다.

[KH6 P.06-333 333]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지전설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같이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김석문과 홍대용의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KH6 P.06-334 334] 역법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어렵게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던 것이다.

[KH6 P.06-335 335] 수학에서도 마테오 리치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이 도입되었다. 홍대용은 주해수용을 저술하여 우리나라, 중국, 서양 수학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KH6 P.06-336 336]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홍대용의 지전설

천체가 운행하는 것이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그 세가 동일하니,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9만 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이처럼 빠르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밖에 되지 않는데도 몇천만억의 별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천체들이 서로 의존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고 있는 우주 공간의 세계 밖에도 또 다른 별들이 있다. 별들이 있다. …… 칠정(七政: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이 수레바퀴처럼 자전함과 동시에, 맷돌을 돌리는 나귀처럼 둘러싸고 있다. 지구에서 가까이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해와 달이라 하고, 지구에서 멀어 작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오성(五星: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담헌집>


의학의 발달과 기술의 개발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3) 과학 기술의 발달 - 의학의 발달과 기술의 개발]

동의보감
동의보감

[KH6 P.06-337 337] 조선 후기의 의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17세기 초에 허준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책은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뛰어난 의학서로 인정되었다.

[KH6 P.06-338 338] 허준과 같은 시기에 허임침구경험방을 저술하여 침구술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KH6 P.06-339 339] 19세기에 이제마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으로 오늘날까지 한의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KH6 P.06-340 340]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기술의 개발에 앞장섰던 사람은 정약용이었다. 그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기술 때문이라고 보고, 기술의 발달이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였다. 그는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는데, 이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배다리도 설계하였다.



농서의 편찬과 농업 기술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3) 과학 기술의 발달 - 농서의 편찬과 농업 기술의 발달]

경작도(김홍도) | 소를 이용하여 논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경작도(김홍도) | 소를 이용하여 논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KH6 P.06-341 341] 17세기에 이르러 농업 경영과 농업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농서가 편찬되고, 농업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KH6 P.06-342 342] 17세기 중엽에 신속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그 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만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 농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박세당색경을, 홍만선산림경제를, 서호수해동농서를 저술하여 농업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세기에 서유구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종합하여 임원경제지라는 농촌 생활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KH6 P.06-343 343]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를 뒷받침한 것은 농업 기술의 발달이었다. 논농사에서는 17세기부터 이앙법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 노동력 절감과 생산량 증대에 이바지하였다. 밭농사에서는 이랑과 이랑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깊이갈이이랑고랑의 높이 차이를 크게 하였다.

[KH6 P.06-344 344] 쟁기의 기능이 개선되고 소를 이용한 쟁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쟁기갈이에서는 초벌갈이로서 가을갈이가 보편화되었고, 봄갈이 등이 여러 번 시행되었다. 시비법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여러 종류의 거름이 사용됨으로써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KH6 P.06-345 345] 논농사를 위한 수리 관개 시설이 발달하여 당진의 합덕지, 연안의 남대지 등의 저수지와 그 밖의 작은 저수지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에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해졌으며, 정조 때에는 농경지 중에서 논의 비율이 밭보다 높아졌다.

[KH6 P.06-346 346] 조선 후기에는 황무지 개간과 해안 지방의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진전되어 경지 면적이 늘어났다. 황무지 개간은 주로 내륙 산간 지방에서, 간척 사업은 서해안과 큰 강 유역의 저습지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서민 문화의 발달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3) 과학 기술의 발달 - 서민 문화의 발달]

[KH6 P.06-347 347]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배경으로 문화에서 새 기운이 나타났다.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 · 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대두하였다.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 중인층과 서민층이 참여하여 큰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 및 상공업 계층과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고, 상민이나 광대들의 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판소리

광대가 한 편의 이야기를 노래에 해당하는 창과 이야기에 해당하는 아니리와 몸놀림인 발림으로 연출한다.

[KH6 P.06-348 348] 교양이나 심성 수련이 목표였던 조선 전기의 문예가 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면, 조선 후기의 문예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경향은 자연히 양반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KH6 P.06-349 349]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의 보급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한글 소설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현실적인 세계가 배경이 되었다. 춤과 노래 및 사설로 서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표현한 판소리와 탈춤은 서민 문화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민화가 유행하였다. 음악과 무용에서는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판소리와 탈놀이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3) 과학 기술의 발달 - 판소리와 탈놀이]

[KH6 P.06-350 350] 조선 후기 문화의 새 기운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고 인기 있는 분야는 판소리와 탈춤이었다. 판소리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사설로 엮어 가기 때문에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고 솔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따라 광대가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빼거나 더할 수 있었고, 관중들이 추임새로써 함께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민을 포함한 넓은 계층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판소리는 이 시기 서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KH6 P.06-351 351]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KH6 P.06-352 352] 탈놀이산대놀이도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 함께 성행하였다. 탈놀이는 향촌에서 마을굿의 일부로서 공연되어 인기를 얻었고, 산대놀이는 산대라는 무대에서 공연되던 가면극이 민중 오락으로 정착되어 도시의 상인이나 중간층의 지원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KH6 P.06-353 353]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하층 서민인 말뚝이취발이를 등장시켜 양반의 허구를 폭로하고 욕보이기까지 하였다.

[KH6 P.06-354 354] 가면극과 판소리는 상품 유통 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성장하여 당시 사회적 모순을 예리하게 드러내면서 서민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는 데 기여하였다.



4)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홍길동전
홍길동전
시사(詩社)

중인층의 시인들이 서울 주변지역에서 시사를 조직하여 문학 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역대 시인들의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4)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KH6 P.06-355 355]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글 소설사설시조가 대표적이었는데, 이는 문학의 저변이 서민층에까지 확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KH6 P.06-356 356] 최초의 한글 소설인 허균홍길동전서얼에 대한 차별의 철폐, 탐관오리의 응징을 통한 이상 사회의 건설을 묘사하는 등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KH6 P.06-357 357] 대표적인 한글 소설로 꼽히는 춘향전은 신분 차별의 비합리성을 나타내었다. 이 밖에도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못된 용왕을 골려 주는 토끼,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왕비가 된 심청, 불합리한 가족 관계에서 희생된 장화 · 홍련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서민들은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KH6 P.06-358 358] 한편, 시조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비들의 절의와 자연관을 담고 있던 이전의 시조와는 달리, 이 시기의 시조에는 서민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설시조 형식을 통하여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거리낌없이 표현하였다.

[KH6 P.06-359 359] 양반층이 중심이 된 한문학실학의 유행과 함께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삼정의 문란을 폭로하는 한시를 남겼고, 박지원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현실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로 혁신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KH6 P.06-360 360]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인들이 모여 시사를 조직하였다. 김삿갓, 정수동 같은 풍자 시인은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어우러져 활동하기도 하였다.

사설시조와 한시

사설시조
작가 모름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아차, 나라고 할지라도 피멍들 뻔하였도다.
<청구영언>
여름날 술을 마시며
정약용

떵떵거리는 수십 집안이
대를 이어 가며 국록을 먹는다.
서로들 돌아가며 싸우고 죽이면서
약한 이를 고기 삼아 힘센 놈이 먹어 치우네.
세력을 휘두르는 대여섯 집안
재상 자리 대감 자리 모두 다 차지하고
관찰사, 절제사도 완전히 차지하네.
……
<여유당전서>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4)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운룡도(민화) | 용 그림은 대개 기우제에 지낼 때 쓰였다. 구름 속에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과 색채가 정감이 간다.
운룡도(민화) | 용 그림은 대개 기우제에 지낼 때 쓰였다. 구름 속에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과 색채가 정감이 간다.

[KH6 P.06-361 361] 조선 후기 그림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새 경향은 진경 산수화풍속화의 유행이었고, 서예에서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글씨의 등장이었다. 진경 산수화는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으며,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적인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KH6 P.06-362 362] 17세기부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고, 이런 의식은 우리의 고유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려는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진경 산수화는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었다.

[KH6 P.06-363 363]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들을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인왕제색도(정선)
단오 풍정(신윤복)
단오 풍정(신윤복)

[KH6 P.06-364 364]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김홍도였다. 그는 산수화, 기록화, 신선도 등을 많이 그렸지만,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그림에서 18세기 후반의 생활상과 활기찬 사회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KH6 P.06-365 365] 김홍도에 버금가는 풍속화가로 신윤복이 있었다. 그는 주로 양반들과 부녀자들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하였다.

[KH6 P.06-366 366]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는 19세기에 이르러 김정희 등의 문인화의 부활로 침체되었다가 한말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KH6 P.06-367 367] 이 밖에도 강세황, 조영석, 김두량, 최북 등의 화가들이 개성 있는 그림으로 18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서양화 기법을 반영하여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였으며, 장승업은 강렬한 필법과 채색법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KH6 P.06-368 368] 이와 함께 민중의 미적 감각을 잘 나타낸 민화가 유행하였다. 해, 달, 나무, 꽃, 동물, 물고기 등을 소재로 삼아 소원을 기원하고 생활 공간을 장식하였다. 이런 민화에는 소박한 우리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KH6 P.06-369 369] 서예에서도 우리의 정서와 개성을 추구하는 단아한 글씨의 동국진체이광사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김정희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김정희의 글씨(추사체) |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는 글귀로 친구에게 써 준 다실(茶室)의 명칭
김정희의 글씨(추사체) |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는 글귀로 친구에게 써 준 다실(茶室)의 명칭
법주사 팔상전(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충북 보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조선 시대 화성(수원) 성곽 축조에 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수록한 책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조선 시대 화성(수원) 성곽 축조에 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수록한 책


건축의 변화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4)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건축의 변화]

[KH6 P.06-370 370] 조선 후기에 불교가 신앙의 자리를 어느 정도 차지하고 정치 · 경제적인 변화가 나타나면서 건축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양반들과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부농, 상공업 계층의 지원 아래 많은 사원이 세워졌고,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대규모 건축물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KH6 P.06-371 371] 17세기의 건축으로는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법주사 팔상전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규모가 큰 다층 건물로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불교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양반 지주층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KH6 P.06-372 372] 18세기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부상한 부농과 상인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근거지에 장식성이 강한 사원이 많이 세워졌다. 논산 쌍계사, 부안 개암사, 안성 석남사 같은 사원이 대표적이다.

[KH6 P.06-373 373] 그리고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축물은 수원 화성이다. 정조 때의 문화적인 역량을 집약시켜 새롭게 만든 화성은 이전의 성곽과는 달리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을 겸한 성곽 시설로,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며 평상시의 생활과 경제적 터전까지 조화시킨 종합적인 도시 계획 아래 건설되었다.

[KH6 P.06-374 374] 19세기의 건축으로는 흥선 대원군이 국왕의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재건한 경복궁의 근정전경회루가 화려하고 장중한 건물로 유명하다.




백자와 생활 공예, 음악


[한국사: VI. 민족 문화의 발달 - 4. 문화의 새 기운 - 4)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백자와 생활 공예, 음악]

[KH6 P.06-375 375] 조선 후기에는 산업 부흥에 따라 공예가 크게 발전하였다. 자기 공예에서는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청화 백자가 유행하는 가운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는데, 제기와 문방구 등 생활용품이 많았다. 형태와 문양이 어울려 우리의 독특하고 준수한 세련미를 풍겼다. 이와 함께 서민들은 옹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KH6 P.06-376 376] 목공예도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발전하였다. 장롱, 책상, 문갑, 소반, 의자, 필통 등 나무의 재질을 살리면서 기능을 갖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화각 공예도 독특한 우리의 멋을 풍기는 작품들이 많았다.

청화 백자 대나무무늬 각병
청화 백자 대나무무늬 각병
달항아리 | 몸체는 유려한 둥근 선을 그리고 굽은 주동이보다 좁은 순백자
달항아리 | 몸체는 유려한 둥근 선을 그리고 굽은 주동이보다 좁은 순백자
무동 (김홍도)
무동 (김홍도)

[KH6 P.06-377 377] 음악에 있어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음악의 향유층이 확대됨에 따라 성격이 다른 음악이 다양하게 나타나 발전하였다. 양반층은 종래의 가곡, 시조를 애창하였고, 서민들은 민요를 즐겨 불렀다. 이와 함께 상업의 성황으로 직업적인 광대기생들이 판소리, 산조와 잡가 등을 창작하여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였다.

가곡(歌曲)

관현악의 반주가 따르는 전통 성악곡으로 선율로 연결되는 27곡의 노래 모음으로 노랫말은 짧은 시를 쓴다.
산조(散調)

느린 장단으로부터 빠른 장단으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의 민속 음악으로 장구 반주가 따르며 무속 음악과 시나위에 기교가 확대되어 19세기경에 탄생하였다.
잡가(雜歌)

조선 후기 평민들이 지어 부르던 노래의 총칭

심화과정: 17~18세기 조선과 중국의 공통적 문화 특징

① 17~18세기에 조선에서는 실증적 · 실용적 · 근대 지향적 학문인 실학이 발달하였고,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실용을 중시하는 경세치용의 학문이 발달하였다.

② 중국 명대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발달하였고, 청대에는 실증적이며 객관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학문은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강화 학파의 형성, 실학의 발달 등에 영향을 끼쳤다.

③ 조선 후기에는 한글 소설사설시조 등의 서민 문화가 발달하였고, 명 · 청 시대에는 연극이 생활화되고 구어체 소설이 많이 나와 서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④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비롯한 서양의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서양 문물을 전하였다. 중국의 베이징에 다녀온 조선의 사신들은 이들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서양의 과학 기구와 각종 서적들을 조선에 들여왔다. 
  1. 17~18세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문화 내용을 정리해 보자.
  2. 그러한 문화가 나타나게 된 공통적인 사회 · 경제적 변화를 조사해 보자.
  3. 위와 같은 사회 · 경제 · 문화적 변화의 의의를 발표해 보자.
심화과정: 조선 후기의 서민 문화

① 향단이는 미음상 이고 동농 들고, 어사또는 뒤를 따라 옥문간 당도하니, 인적이 고요하고 사정이도 간 곳 없네. 이 때 춘향이 비몽사몽간에 서방님이 오셨는데, 머리는 금관이요, 몸에는 홍삼이라. 상사일념의 목을 안고 만단정회하는 차라, "춘향아." 부른들 대답이 있을쏘냐. 어사또 하는 말이, "크게 한번 불러 보소." "모르는 말씀이오. 예서 동헌이 마주치는데, 소리가 크게 나면 사또 염문할 것이니 잠깐 지체하옵소서." <춘향가>

② 양반: 나는 사대부의 자손인데.
선비: 아니, 나는 팔대부의 자손인데.
양반: 팔대부는 또 뭐야?
선비: 아니, 양반이란게 팔대부도 몰라?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뭐.       ……
양반: 첫째, 지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선비: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도 읽었네.
양반: 도대체 팔서육경이 뭐냐?
초랭이: 나도 아는 육경, 그걸 몰라? 팔만대장경, 중의바라경, 봉사 안경, 처녀 월경, 약국 길경(도라지), 머슴 새경(품삯). <하회 탈춤 대사>

③ 우리나라 소산물도 부끄럽지 않건마는
타국 물화 교합하니 백각전 장할시고
칠패의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 석수어며 도미 준치 고도어며
낙지 소라 오적어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남문 안 큰 모전에 각색 실과 다 있구나.
청실뇌 황실뇌 건시 홍시 조홍시며
밤 대도 잣호도며 포도 경도 외얏시며
석류 유자 복숭아며 용안 여지 당대추다. <민요 한양가>
  1. 위의 자료와 같은 문화적 특징을 가진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2. 조선 후기 문화의 특징을 정치 · 사회 · 경제적인 변동과 연결하여 설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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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내용
  • 2009/09/30 20:18: KSY Version 1.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