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분류: 한국사/교과서
지은이: 국사전자교과서/편집: K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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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1. 고대의 사회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사회 계층과 신분 제도
            귀족ㆍ평민ㆍ천민
        2) 삼국 사회의 모습
            고구려의 사회 기풍
            백제인의 생활상
            신라의 골품 제도와 화랑도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발해의 사회 구조
            통일 신라인의 생활
            통일 신라말의 사회 모순
    2. 중세의 사회
        1) 고려의 신분 제도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농민의 공동 조직
            사회 시책
            여러 가지 사회 제도
            법률과 풍속
            혼인과 여성의 지위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봉기
            몽고 칩입과 백성의 생활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3. 근세의 사회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
            양반
            중인
            상민
            천민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사회 정책
            사회 제도
            법률제도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향촌 사회의 모습
            촌락의 구성과 운영
            촌락의 풍습
        4) 성리학적 사회 질서의 강화
            예학과 족보의 보급
            서원과 향약
    4. 사회의 변동
        1) 사회 구조의 변동
            신분제의 동요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노비의 해방
            가족 제도의 변화와 혼인
            인구의 변동
        2) 향촌 질서의 변화
            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부농 계층의 대두
        3) 농민층의 변화
            농민층의 분화
            지주와 임노동자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사회 불안의 심화
            예언 사상의 대두
            천주교의 전파
            동학의 발생
            농민의 항거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대쾌도 (유숙)
대쾌도 (유숙)

[KH5 P.05-01 001] 사회사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여러 모습을 살피는 분야를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다양한 사회 조직의 틀 속에서 집단 생활을 해 왔다.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비롯하여 사회 구조의 형성과 변동, 그리고 각 사회 집단의 성격과 서로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온 과정을 알 수 있다.

[KH5 P.05-02 002] 사회사는 개인의 일상 생활과 집단 생활을 사회 풍속과 신분 제도, 가족과 친족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사회사를 공부할 때는 사회 구조의 형성과 변동, 사회 신분과 사회 세력, 촌락과 도시, 사회 조직과 그 기능, 인구의 변화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권력자나 두드러진 활동가는 물론, 이름 없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농민과 노비 등 하층민의 처지를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KH5 P.05-03 003] 우리는 역사 인물을 파악할 때 사회 구조 속에서 차지한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가족 구성과 사회 신분 등에서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알게 되면 생생한 삶 속에서 역사의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1. 고대의 사회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KH5 P.05-04 004] 고대 사회는 계층 분화를 바탕으로 성립하여 정복 전쟁을 치르며 발전하였다. 고대인은 잦은 전쟁을 통하여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였고,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의 적용도 매우 엄격하였다. 고대 사회의 신분은 귀족, 평민, 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혈통에 따른 신분의 세습이 철저하였다.

[KH5 P.05-05 005] 혈연과 문화적 동질성을 간직하고 있던 삼국이 통일된 이후 고대 사회는 한층 발전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사회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골품제의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한 신라는 중앙 귀족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골품 제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이탈로 말미암아 고대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사회 계층과 신분 제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 사회 계층과 신분 제도]

[KH5 P.05-06 006] 청동기의 사용과 함께 시작된 정복 전쟁은 철제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정복과 복속으로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지배층 사이에 위계 서열이 마련되었고, 그 서열은 신분 제도로 발전해 갔다.

[KH5 P.05-07 007]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그 아래에 하호가 있었다. 하호는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이었다. 읍락의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생활하고 있는 천민층이었다.

[KH5 P.05-08 008] 한편, 부여와 초기 고구려에는 , 대가로 불린 권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호민을 통하여 읍락을 지배하는 한편, 자신의 관리와 군사력을 지니고 정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차츰 귀족으로 편제되어 갔다. 그리하여 삼국 시대가 되면서 사회는 크게 귀족, 평민, 천민의 신분 구조를 갖추었다.

[KH5 P.05-09 009] 삼국은 이러한 계층 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다시 그 지배층 내부에서 엄격한 신분 제도를 운영하였다. 삼국 시대 귀족들은 출신 가문의 등급에 따라 관등 승진에서 특권을 누리거나 제한을 받았고, 국가에서 받는 경제적 혜택에도 차등이 있었다. 이러한 신분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골품 제도였다.



귀족ㆍ평민ㆍ천민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 귀족ㆍ평민ㆍ천민]

[KH5 P.05-10 010] 고조선 시대 이래로 존재하였던 신분적 차별은 삼국 시대에 와서 법적으로 더욱 강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왕을 정점으로 최하위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제적 질서가 유지되었다. 신분 구성은 왕족을 비롯한 귀족, 평민, 천민으로 크게 구분되지만, 기능상으로는 더욱 세분화된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지배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령을 만들었고,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KH5 P.05-11 011] 삼국에서는 왕족을 비롯한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정치 권력과 사회 ·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삼국 시대 신분제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골품제와 같이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신분제를 운영한 데 있다.

[KH5 P.05-12 012] 평민층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귀족층에 비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였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다.

[KH5 P.05-13 013] 천민은 노비와 촌락을 단위로 한 집단 예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비들은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들은 평민과 같이 정상적인 가족 구성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들며 생활하거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KH5 P.05-14 014] 대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거나 죄를 짓거나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빈번하였던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며,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는 소멸되어 갔다.

정복민을 노비로 만든 사례

○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황해도 백주)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니 곧장 치양으로 가서 고구려군을 급히 깨뜨리고 5,000명을 사로잡았다. 그 포로를 장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삼국사기>
정복민을 노비에서 해방한 사례

가야가 배반하니 왕(진흥왕)이 이사부에게 토벌하도록 명령하고, 사다함에게 이를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들이닥치니……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였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농토와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 사양했으나 왕이 굳이 주자, 받은 사람은 놓아주어 양민을 만들고, 농토는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고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2) 삼국 사회의 모습



고구려의 사회 기풍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2) 삼국 사회의 모습 - 고구려의 사회 기풍]

[KH5 P.05-15 015]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들은 절할 때에도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은 펴서 몸을 일으키기 쉬운 자세를 취하였고, 걸음을 걸을 때도 뛰는 듯이 행동을 빨리 하였다.

[KH5 P.05-16 016]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

사마르칸트 지역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도 복원 | 머리에 깃털을 꽂고 있는 오른쪽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이다.
사마르칸트 지역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도 복원 | 머리에 깃털을 꽂고 있는 오른쪽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이다.

[KH5 P.05-17 017]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고분 벽화에는 이들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는데, 신분의 귀천에 따라 인물의 크기에 차등을 두어 묘사하였다.

[KH5 P.05-18 018] 백성들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의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고국천왕 때 시행한 진대법은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시책인데, 먹을거리가 부족한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도록 한 제도였다.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같이 사는 혼인 제도

[KH5 P.05-19 019]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피정복민이나 몰락한 평민이었다. 한편,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KH5 P.05-20 020]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들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신부 집에서 재물을 받았을 때에는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서옥제

혼인하는 풍속을 보면, 구두로 약속이 정해지면 신부 집에서 큰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 밖에 와서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며 안에 들어가서 신부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신부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 자도록 허락한다. ……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삼국지>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백제 사신도(중국 난징 박물관 소장)| 6세기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의 모습을 그리고 해설한 것이다.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백제 사신도(중국 난징 박물관 소장)|
6세기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의 모습을 그리고 해설한 것이다.


백제인의 생활상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2) 삼국 사회의 모습 - 백제인의 생활상]

[KH5 P.05-21 021]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화를 수용하였다. 백제 사람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깔끔하다는 중국의 기록은 그 세련된 모습을 알려 준다.

[KH5 P.05-22 022] 백제 사람들은 상무적인 기풍이 있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한 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하였다.

[KH5 P.05-23 023]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실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및 장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신라의 골품 제도화랑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2) 삼국 사회의 모습 - 신라의 골품 제도와 화랑도]

화백(和白) 제도

화백 제도는 귀족들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진지왕(576∼579)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 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KH5 P.05-24 024]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만큼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던 신라 초기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KH5 P.05-25 025] 초기의 전통을 유지한 대표적인 제도가 화백 회의였다. 귀족들은 이를 통하여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KH5 P.05-26 026]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 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골품 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인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골품제의 생활 규제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을 넘지 못한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하고, 우물천장을 만들지 못하며, 당기와를 덮지 못하고, 짐승 머리 모양의 지붕 장식이나 높은 처마 …… 등을 두지 못하며, 금은이나 구리 …… 등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섬돌로는 산의 돌을 쓰지 못한다. 담장은 6척을 넘지 못하고, 또 를 가설하지 않으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대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못하고, 마구간에는 말 2마리를 둘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의 골품과 관등 · 관직표
신라의 골품과 관등 · 관직표

[KH5 P.05-27 027]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다. 이 조직은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들이 그를 따랐다.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다.

[KH5 P.05-28 028]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KH5 P.05-29 029] 화랑도는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왕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여기서 훈련받은 청소년들은 스스로 나라의 일꾼으로 자처하였고,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원광은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양성되었다.

원광과 세속 5계

귀산은 젊을 때 같은 부(部) 사람 추항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우리들이 군자와 놀기를 기약하여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으면 욕된 일을 당하지 않을까 두렵다. 어진 이의 곁에 가서 도를 듣지 않으려나." 하고 말하였다. 이 때 원광법사가 나라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와 가실사에 머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 문하에 가서 단정한 태도로 "저희 세속의 선비들이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으니, 원컨대 한 말씀을 내려주셔서 종신토록 계명을 삼았으면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법사는 "불교의 계율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종목이 10가지라서 너희처럼 남의 신하된 자로서는 아마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 세속 5계가 있으니, 하나는 충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둘은 효로써 부모를 섬기며, 셋은 믿음으로써 친구를 사귀고, 넷은 전장에 나아가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은 생명 있는 것을 가려서 죽인다는 것이다. 너희는 실행에 옮기되 소홀히 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 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KH5 P.05-30 030] 삼국은 상호간에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도 동질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언어와 풍습은 비슷하였고, 복장을 비롯하여 절하는 모습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법흥왕 때, 백제 사신을 따라 중국 양나라에 간 신라 사신이 백제인 통역을 이용할 정도로 두 나라의 언어가 비슷하였다.

[KH5 P.05-31 031] 삼국 통일은 삼국이 지니고 있던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 문화가 하나의 국가 아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KH5 P.05-32 032] 신라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배층에게 신라 관등을 주어 포용하였다. 통일 직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9서당에 편성함으로써 민족 통합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라 지배층은 삼한(삼국)이 하나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KH5 P.05-33 033] 통일 신라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게 됨으로써 경제력도 그만큼 증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00여 년 동안 안정된 사회가 유지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 이후 왕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최고 군사령관으로서 국왕의 역할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는 왕권 강화에 장애가 되는 진골 귀족의 일부를 숙청하기도 하였다.

[KH5 P.05-34 034] 그러나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고,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통도 여전히 유지하였다.

신라의 골품과 관등 · 관직표
신라의 골품과 관등 · 관직표

[KH5 P.05-35 035] 한편,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인하여 중앙 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KH5 P.05-36 036] 삼국 통일 이후 골품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골품의 구분이 하급 신분층에서부터 점차 희미해지면서, 3두품에서 1두품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고 평민과 동등하게 간주되었다.



발해의 사회 구조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 발해의 사회 구조]

[KH5 P.05-37 037]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의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KH5 P.05-38 038] 발해의 주민 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 이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KH5 P.05-39 039] 발해의 지식인은 에 유학하여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인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하층 촌락민들은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 신라인의 생활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 통일 신라인의 생활]

안압지 출토 주사위 | 각 면마다 주사위놀이를 하면서 받는 벌칙이 새겨져 있다.
안압지 출토 주사위 | 각 면마다 주사위놀이를 하면서 받는 벌칙이 새겨져 있다.

[KH5 P.05-40 040] 통일 신라의 서울인 금성(경주)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서, 귀족들이 모여 사는 대도시로 번성하였다. 그리고 5소경은 과거 백제, 고구려, 가야의 일부 지배층은 물론 신라의 수도에서 이주한 귀족들이 거주하는 지방의 문화 중심지였다.

[KH5 P.05-41 041] 전성기의 금성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된 시가지에 궁궐과 관청, 사원을 비롯하여 귀족들의 저택과 민가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대부분이 기와로 지붕을 이었고, 밥 짓는 데도 숯을 사용할 정도였다. 수도 경주는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조세와 특산물, 국제 무역품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소비 도시였다.

[KH5 P.05-42 042] 귀족들은 금입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대토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업도 수입원의 하나였다. 귀족들은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귀족 출신의 한 여성은 자신의 재산으로 불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KH5 P.05-43 043]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아라비아산 고급 향료, 동남아시아산 거북딱지로 만든 장식품과 고급 목재, 에메랄드 등이 그러한 물품들이었다. 사치 풍조가 신분 구분을 문란하게 할 상황에 이르자, 흥덕왕 때 사치를 금하는 왕명이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라 사람들이 본래 지녔던 소박함과 강인함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집 모양 뼈 용기(경북 경주) |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집을 표현하 였다.
집 모양 뼈 용기(경북 경주) |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집을 표현하였다.
페르시아 문양석(경주 박물관 소장) | 사자와 공작무늬가 있는 도안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하였던 것이다.
페르시아 문양석(경주 박물관 소장) | 사자와 공작무늬가 있는 도안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하였던 것이다.

[KH5 P.05-44 044] 지배층의 호화로운 생활과는 대조적으로 평민의 대부분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며 근근이 생활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귀족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며 생계를 잇거나 귀족에게 빌린 빚을 갚지 못하여 결국 노비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흥덕왕의 사치 금지

흥덕왕 9년(834), 왕이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위와 아래가 있고, 벼슬에도 높음과 낮음이 있어 명칭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 또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습속은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은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오로지 외래품의 진귀한 것만을 숭상하고 토산품의 야비한 것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예절이 분수에 넘치는 데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옛날 법에 따라 엄한 명령을 베푸는 것이니, 그래도 만약 일부러 범하는 자가 있으면 진실로 응당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통일 신라말의 사회 모순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1. 고대의 사회 -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 통일 신라말의 사회 모순]

[KH5 P.05-45 045] 신라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의 정권 다툼과 대토지 소유 확대로 백성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 갔고, 지방의 토착 세력과 사원들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유력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지방의 자영농들은 귀족들의 농장이 확대되면서 몰락해 갔다. 더욱이 중앙 정부의 통치력 약화로 대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농민들이 더 많은 조세를 감당하게 되었다.

[KH5 P.05-46 046] 9세기 이후 자주 발생한 자연 재해는 농민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의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무장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들을 아우른 큰 세력가들이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KH5 P.05-47 047] 중앙 정부는 지배 체제를 다시 확고히 하고자 수리 시설을 정비하고 자연 재해가 심한 지역에는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또, 굶주리는 농민들을 구휼하고, 연해에 출몰하는 해적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함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KH5 P.05-48 048]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버리고 떠돌게 되었으며, 걸식을 하거나 산간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자신의 몸을 팔아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KH5 P.05-49 049]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증폭되었다.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지방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게 되자 마침내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거의 사라져 갔다.

통일 신라 말기의 전란

○ 진성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ㆍ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비어 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독촉하였지만,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 떼같이 일어났다. 이에 원종ㆍ애노 등이 사벌주(상주)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나마 벼슬의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 하였다. 영기가 적진을 쳐다보고는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 당나라 19대 황제(소종: 889~904)가 중흥을 이룰 때, 전쟁과 흉년 두 가지 재앙이 서쪽(당)에서 멈추어 동쪽(신라)으로 왔다. 어디고 이보다 더 나쁜 것이 없었고 굶어 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였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심화과정: 골품제의 성립 배경

① 신라는……그 관료를 세울 때 친속(親屬)을 상으로 하며, 그 족의 이름은 제 1골, 제 2골이라 하여 나뉜다. 형제의 딸이나 고종 자매, 이종 자매를 모두 처로 맞아들인다. 왕족을 제 1골로 하여 처도 같은 족인데 자식을 낳으면 모두 제 1골로 한다. 제 2골의 여자와 혼인하지 않으며 비록 혼인하더라도 언제나 첩으로 삼는다. <신당서>

② 골품제는 처음에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개의 체제로 성립하였다. 진평왕 때에 이르러 왕족 내부에서 다시 성골이 분리되어 성골진골이라는 2개의 골과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 등 모두 8등급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7세기 중반에 성골이 사라졌고, 통일 이후에는 1두품에서 3두품에 이르는 신분의 구별도 차츰 사라져 일반 백성과 비슷하게 되었다. 
  1. 신라의 골품을 열거해 보자.
  2. 골품 제도의 성립 시기와 목적을 알아보자.
심화과정: 고대 사회 귀족들의 합의 제도

① 고구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서 논의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삼국지>

② 백제: 호암사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국가에서 재상을 뽑을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어 바위 위에 두었다. 얼마 뒤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정사암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삼국유사>

③ 신라: 큰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중의를 따른다. 이를 화백이라 부른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통과하지 못하였다. <신당서
  1.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고대 사회의 정치적 특징을 말해 보자.
  2. 고대 국가에서 귀족들의 합의 제도가 발달하였던 배경을 조사해 보자.


2. 중세의 사회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KH5 P.05-50 050] 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중류층은 새로이 등장한 신분층이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지배 신분 안에서는 과거 제도를 통하여 계층 이동이 이루어졌으며, 정치적 변동에 따라 신분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KH5 P.05-51 051]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소, 부곡과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시책을 실시하였다.



1) 고려의 신분 제도



귀족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1) 고려의 신분 제도 - 귀족]

[KH5 P.05-52 052] 고려의 신분 구성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략 귀족중류, 그리고 양민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귀족 세력은 왕족을 비롯하여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음서공음전의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다.

[KH5 P.05-53 053] 귀족들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여 문벌 귀족을 형성하였으며, 고려 사회를 이끌어 갔다. 중앙 집권적 체제인 고려 사회에서 귀족들은 개경에 거주하였는데, 그들 중에서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형벌로 귀향을 시키기도 하였다.

[KH5 P.05-54 054] 중앙 관직에 진출한 집안은 귀족 가문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관직을 바탕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등 재산을 모았고, 유력한 귀족 가문과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귀족들이 사돈맺기를 가장 원하는 집안은 물론 왕실이었다. 왕실의 외척이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지름길로 여겼으므로 여러 딸을 동시에 왕비로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KH5 P.05-55 055] 지방 향리의 자제들도 과거를 통하여 벼슬에 나아가 신진 관료가 됨으로써 어렵게 귀족의 대열에 들 수가 있었다. 반대로, 중앙 귀족에서 낙향하여 향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KH5 P.05-56 056] 귀족층의 변화는 무신정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종래의 문벌 귀족들이 약화되면서 무신들이 권력을 잡았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면서 등장한 지배 귀족은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고 농장을 소유한 최고 권력층이었으며,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음서로써 신분을 세습시켜 갔다. 이들은 강과 하천을 경계로 삼을 만큼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도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또한 몰락한 농민들을 농장으로 끌어들여 노비처럼 부리며 부를 축적하였다.

[KH5 P.05-57 057] 고려 후기에는 경제력을 토대로 하여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관계에 진출한 향리 출신들이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 부른다. 이들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전시과의 붕괴로 과전을 받지 못하게 되자, 사전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권문세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신진 사대부들은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구질서와 여러 가지 모순을 비판하고, 전반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 혁신을 추구하였다.

권문세족

이제부터 만약 종친으로서 같은 성에 장가드는 자는 황제의 명령을 위배한 자로서 처리할 것이니, 마땅히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취하여 부인을 삼을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왕족의 딸과 혼인함을 허락할 것이다. 만약 집안의 세력이 미비하면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평강 채씨, 청주 이씨, 당성 홍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파평 윤씨, 평양 조씨는 다 여러 대의 공신 재상의 종족이니 가히 대대로 혼인할 것이다. 남자는 종친의 딸에게 장가가고 딸은 종비(宗妃)가 됨 직하다. <고려사>


중류층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1) 고려의 신분 제도 - 중류층]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부호장과 함께 호장층을 형성,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들이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KH5 P.05-58 058] 고려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사이에는 중류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지배 기구의 말단 행정직으로 존재하였는데, 중앙 관청의 말단 서리인 잡류, 궁중 실무 관리인 남반,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한 향리, 직업 군인으로 하급 장교인 군반, 지방의 역(驛)을 관리하는 역리 등이 있었다. 중류층은 후삼국의 혼란을 거쳐 고려의 지배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통치 체제의 하부 구조를 맡아 중간 역할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들은 직역을 세습적으로 물려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국가로부터 받았다.

[KH5 P.05-59 059] 각 지방의 호족 출신은 향리로 편제되어 갔다. 호족 출신들은 호장, 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한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통혼 관계나 과거 응시 자격에 있어서도 하위의 향리와는 구별되었다.



양민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1) 고려의 신분 제도 - 양민]

[KH5 P.05-60 060] 양민은 일반 주 · 부 · 군 · 현에 거주하며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KH5 P.05-61 061] 양민의 대다수는 농민들로서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자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거나 개간 등을 통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백정 농민층은 사유지나 국 · 공유지 등의 각종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고, 그럴 경우 일정량의 소작료를 주인에게 납부하였다. 또, 이들에게는 조세 · 공납 · 이 부과되었다.

[KH5 P.05-62 062] 양민보다 하급 신분으로는 양민이면서도 일반 양민에 비하여 규제가 심한 특수 집단이 있었다. 양민인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 , 부곡에 거주한 이들 특수 집단은 양민에 비하여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곳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KH5 P.05-63 063] 일반 군현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군현을 부곡 등으로 강등하기도 하였다.

[KH5 P.05-64 064] 향이나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농업을, 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수공업이나 광업품의 생산을 주된 생업으로 하였다. 이 밖에, 의 주민은 각각 육로 교통과 수로 교통에 종사하였다.



천민

노비의 구분

- 공노비〈 입역 노비
외거 노비
- 사노비〈 솔거 노비
외거 노비
송광사 노비 문서(전남 순천 송광사 소장) | 충렬왕 때, 수선사의 주지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를 수선사에 바친다는 내용이다. 수선사는 송광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송광사 노비 문서(전남 순천 송광사 소장) | 충렬왕 때, 수선사의 주지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를 수선사에 바친다는 내용이다. 수선사는 송광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1) 고려의 신분 제도 - 천민]

[KH5 P.05-65 065] 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공공 기관에 속하는 공노비와 개인이나 사원에 예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공노비에는 궁중과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고 생활하는 입역 노비와 지방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농경을 하여 얻은 수입 중 규정된 액수를 관청에 납부하였다.

[KH5 P.05-66 066] 사노비는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분되었다. 솔거 노비는 귀족이나 사원에서 직접 부리는 노비로 주인의 집에서 살면서 잡일을 돌보았으며, 외거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사는 노비로서 주로 농업 등의 일에 종사하고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다.

[KH5 P.05-67 067] 특히, 외거 노비는 주인의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토지도 소작할 수 있어서 노력에 따라서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으며, 자신의 토지도 소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외거 노비는 비록 신분적으로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양민 백정과 비슷하게 독립된 경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KH5 P.05-68 068] 그리하여 외거 노비 가운데에는 신분의 제약을 딛고 지위를 높인 사람이나 농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늘린 사람도 있었다.

[KH5 P.05-69 069] 원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국가로부터 엄격히 관리되었다. 매매, 증여, 상속의 방법을 통하여 주인에게 예속되어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귀족들은 재산으로 간주된 노비를 늘리기 위하여 부모 중의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게 하였다.

노비의 신분 상승

○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집안 노비로,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유하게 되었다. 그는 권세가 있는 중요한 길목에 뇌물을 바쳐 천인에서 벗어나 산원동정의 벼슬을 얻었다. 그의 처는 소감 왕원지의 집안 노비인데, 왕원지는 집안이 가난하여 가족을 데리고 가서 의탁하고 있었다. 평량이 후하게 위로하여 서울로 돌아가기를 권하고는 길에서 몰래 처남과 함께 원지의 부처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그 주인이 없어졌으므로 계속해서 양민으로 행세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고려사>

○ 고종 45년(1258) 2월에 최의가 집안 노비인 이공주를 낭장으로 삼았다. 옛 법제에 노비는 비록 큰 공이 있다 하더라도 돈과 비단으로 상을 주었을 뿐 관작을 제수하지는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최항이 집정해서는 인심을 얻고자 처음으로 집안 노비인 이공주와 최양백ㆍ김인준을 별장으로 삼고, 섭장수는 교위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사천 매향비(경남 사천) | 1387년에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 내세의 행운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천 매향비(경남 사천) | 1387년에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 내세의 행운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농민의 공동 조직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 농민의 공동 조직]

[KH5 P.05-70 070] 농민들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불교 신앙의 하나로,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었다가, 이를 통하여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하였다. 이 향나무를 땅에 묻는 활동을 매향(埋香)이라고 하고, 이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들을 향도라고 하였다.

[KH5 P.05-71 071] 향도는 단순히 매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되어 갔다.



사회 시책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 사회 시책]

[KH5 P.05-72 072] 고려 시대의 농민들은 조세, 잡역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부담을 졌다.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국가 안정에 필수적이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여러 사회 시책을 펼쳤다. 우선 농번기에 잡역을 면제하여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연 재해를 입은 농민들에게는 그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또, 고리대 때문에 농민이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빌린 곡식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KH5 P.05-73 073] 아울러 권농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으며, 농토를 늘리고 곡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갈지 않고 버려둔 진전을 새로 경작하는 경우에는 일정 기간 동안 면제해 주었다. 이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 줌으로써 체제 유지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사회 제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 여러 가지 사회 제도]

[KH5 P.05-74 074] 고려의 사회 제도 중에는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또, 개경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KH5 P.05-75 075]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ㆍ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케 하였다.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그리고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법률과 풍속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 법률과 풍속]

고려 형벌의 종류

- 태: 볼기를 치는 매질
- 장: 곤장형
- 도: 징역형
- 유: 멀리 유배 보내는 형
- 사: 사형으로, 교수형과 참수형       의 두 가지가 있음.

[KH5 P.05-76 076] 고려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법으로 중국의 당률을 참작한 71개조의 법률이 시행되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관습법을 따랐다. 고려 시대에는 지방관의 사법권이 커서 중요 사건 이외에는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역죄, 불효죄 등 사람의 기본 도리를 어길 경우 중죄로 다스렸다. 반면에, 귀양형을 받은 사람이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는 유형지에 도착하기 전에 7일간의 휴가를 주어 부모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70세 이상의 노부모를 두고 봉양할 가족이 없는 경우는 형벌의 집행을 보류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태ㆍ장ㆍ도ㆍ유ㆍ사 등 5종의 형벌이 시행되었다.

[KH5 P.05-77 077] 장례와 제사에 관한 의례는 유교적 규범을 시행하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대개 토착 신앙과 융합된 불교의 전통 의식과 도교 신앙의 풍속을 따랐다. 명절로는 정월 초하루, 삼짇날, 단오, 유두, 추석 등이 있었으며, 단오 때에는 격구와 그네뛰기 및 씨름 등을 즐겼다.



혼인과 여성의 지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2) 백성들의 생활 모습 - 혼인과 여성의 지위]

[KH5 P.05-78 078] 고려 시대에는 대략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이 사라지지 않아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KH5 P.05-79 079]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을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받들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KH5 P.05-80 080]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

박유가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는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청컨대 여러 신하, 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品位)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처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며, 여러 처에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 안에 원한을 품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없어지고 인구도 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녀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연등회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저놈의 늙은이이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그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봉기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봉기]

[KH5 P.05-81 081] 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다.

[KH5 P.05-82 082] 12세기에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조위총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명종 때 공주 명학소망이ㆍ망소이의 봉기, 운문ㆍ초전의 김사미ㆍ효심의 봉기 등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KH5 P.05-83 083] 초기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봉기는 1190년대에 들어와 경상도와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신라 부흥 운동과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는 성격에서부터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는 타협적인 성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봉기가 일어났다.

[KH5 P.05-84 084]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들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다.



몽고 칩입과 백성의 생활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 몽고 칩입과 백성의 생활]

[KH5 P.05-85 085]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고자 최씨 무신 정권은 송악에서 강도(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꾀하였다. 지방의 주현민들에게는 산성이나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서 오랜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산성과 섬에서의 생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되었으므로 일반 백성들은 몽고의 침략에 자력으로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KH5 P.05-86 086] 이렇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일반 백성들이 각지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충주 다인철소, 처인 부곡의 승리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KH5 P.05-87 087] 그러나 몽고군은 이르는 곳마다 살육을 자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KH5 P.05-88 088] 일반 백성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의 간섭과 원을 따르는 정치 세력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특히, 전쟁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동원됨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몽고침입 시 백성의 생활

고종 42년(1255) 3월, 여러 도의 고을들이 난리를 겪어 황폐해지고 지쳐 조세, 공부, 요역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자를 모두 나오게 하였다. 그 때 산성에 들어갔던 백성들로서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가에서 죽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붙잡아 매고 가는 자가 있었다.

4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병란과 흉년이 든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백성이 줄을 이었다. 도병마사가 날마다 쌀 한 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2. 중세의 사회 -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KH5 P.05-89 089] 무신 집권기 이후로는 하층 신분에서 신분 상승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 역관, 향리, 평민, 부곡민, 노비, 환관 중에서 전공을 세우거나 몽고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몽고어에 능숙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KH5 P.05-90 090]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자연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아졌고,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사회에는 몽고풍이 유행하여 변발, 몽고식 복장, 몽고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KH5 P.05-91 091] 이와 반대로 고려 사람이 몽고에 건너간 수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전란 중에 포로 내지는 유이민으로 들어갔거나 몽고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고려 사람들에 의하여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고에 전해졌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한다.

[KH5 P.05-92 092] 원의 공녀 요구는 고려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결혼도감을 통하여 원으로 끌려간 여인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오른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므로 공녀의 공출은 고려와 원 사이에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KH5 P.05-93 093] 몽고와 마찬가지로 왜구도 고려 백성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왜구는 이미 13세기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으나, 14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침략해 왔다. 원의 간섭하에서 국방력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고려는 초기에 효과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지 못하였다. 주로 쓰시마 섬규슈 서북부 지역에 근거를 둔 왜구는 부족한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하고자 자주 고려 해안에 침입하였고, 식량뿐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약탈해 갔다.

[KH5 P.05-94 094]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점차 전라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심지어 개경 부근에도 나타났다. 많을 때에는 한 해 동안에도 수십 번 침략해 왔기 때문에 해안에서 가까운 수십 리의 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잦은 왜구의 칩입에 따른 사회의 불안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몽고풍

공민왕이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을 하고 호복(胡服 : 몽고의 옷차림)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이연종이) 말하기를 "임금 앞에 나아가 직접 대면해서 말씀드리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들어와서는 좌우(左右 : 왕의 측근)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왜구의 피해

조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바닷가까지 수백 리를 가면 흥해라는 고을이 있다. 땅이 매우 궁벽하고 험하나, 어업, 염업이 발달하고 비옥한 토지가 있었다. 옛날에는 주민이 많았는데, 왜란을 만난 이후 점점 줄다가, 경신년(1380) 여름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을은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들이 살해되고 약탈당해 거의 없어졌다. 그 중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과 거리는 빈 터가 되고 가시덤불이 길을 덮으니, 수령으로 온 사람들이 먼 고을로 가서 움츠리고 있고 감히 들어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양촌집>
심화과정: 고려 사회의 개방성

① 삼국 이전에는 과거의 법이 없었다.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쌍기의 의견을 채용하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하였으니, 이때로부터 문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법은 대체로 당의 제도를 많이 채용한 것이다.

② 고려의 신분 제도는 조상의 신분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세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는 향 · 부곡 · 소가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외거 노비 가운데는 재산을 모아 양인의 신분을 얻는 자도 있었다. 
  1. 위 자료에서 고려 시대의 신분 변동이 가능하였던 경우를 정리해 보자.
  2.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가 통일 신라와 비교하여 다른 점을 분석해 보자.
심화과정: 고려 시대의 신앙

① 나의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는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五岳) · 명산 · 대천 · 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사한 신하가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를 늘리거나 줄이자고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 속에 행여 행사일이 황실의 제일(祭日)과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고려사>

② 나주 사람이 일컫기를 “금성산의 산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진도, 탐라(제주)를 정벌할 때는 실로 내가 힘을 썼는데, 장수와 군사들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 녹을 주지 않는 것은 어째서이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으로 봉하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정)가신이 그 말에 미혹(迷惑)되어 (충렬)왕에게 넌지시 아뢰어 정녕공으로 봉하게 하고, 또 (나주)읍의 녹미(祿米) 5석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당에 보내 주게 하였다. <고려사
  1. 위의 자료에서 고려 시대의 민간 신앙을 찾아보자.
  2. 위의 자료를 참고하여 고려의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의식이 시행되지 않았던 까닭을 추론해 보자.


3. 근세의 사회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KH5 P.05-95 095] 조선은 고려 말의 여러 모순을 시정하면서 국가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개인의 능력이 존중되고 사회 제도가 합리적으로 개편되는 등 이전 시대와는 다른 면을 보여 주었다. 조선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로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여 양반 중심의 사회 체제를 확립해 갔다.

[KH5 P.05-96 096] 엄격한 신분제와 가부장적 가족 제도 중심의 사회 질서로 말미암아 서얼을 차별하였고, 여자들의 재가를 금지하였다. 양반들은 향촌 사회에서 향약을 시행하여 권익을 옹호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두레와 계로써 자기들의 생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 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

[KH5 P.05-97 097]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KH5 P.05-98 098] 양천 제도는 갑오개혁(1894) 이전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적인 신분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들을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KH5 P.05-99 099]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 사회는 고려 사회에 비하여 개방적이었지만, 지배층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인 상민과 천민이 존재하는 점에서 아직 신분 사회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양반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 양반]

[KH5 P.05-100 100] 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ㆍ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KH5 P.05-101 101] 일단 지배층이 된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지배층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이들은 문무 양반의 관직을 받은 자들만 사족으로 인정하였다. 현직 향리층을 비롯하여 중앙 관청의 서리와 기술관, 군교, 역리들은 하급 지배 신분인 중인으로 격하시켰다. 사족과 이서층(서리층)이 분화하여 양반과 중인 신분으로 고정된 것이다. 양반들은 에서 난 소생들을 서얼이라고 하여 차별하였고, 정부에서는 이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였다.

[KH5 P.05-102 102]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KH5 P.05-103 103]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양반은 각종 국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양반이 하나의 사회 신분으로 고정되어 가면서 양인은 점차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화하였다. 

선비의 하루

새벽 2~4시: 기상(여름철). 앎과 느낌을 개발하는 공부.
4~6시: 기상(겨울철). 새벽 문안. 뜻을 세우고 몸을 공경히 하는 공부.
6~8시: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침. 독서와 사색.
8~10시: 식사. 마음을 가다듬고 고요히 살핌.
10~12시: 손님 접대. 독서.
정오~오후2시: 일꾼들을 살핌. 친지에게 편지. 경전과 역사서 독서.
2~4시: 독서 또는 사색. 여가를 즐기거나 실용 기술을 익힘.
4~6시: 식사. 여유 있는 마음으로 독서. 성현의 기상을 본받는 묵상.
6~8시: 가족과 일꾼의 일을 점검함. 자제들 교육.
8~10시: 일기 장부 정리. 자제 교육. 우주와 인생, 자기 행동에 대한 묵상.
10~12시: 수면. 심신을 안정시키고 원기를 배양함.
자정~새벽 2시: 깊은 잠. 밤기운으로 심신을 북돋음.
<일용지결>


중인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 중인]

[KH5 P.05-104 104]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기술관만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중인은 15세기부터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루었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청의 서리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 안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다.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라고도 불리었다. 이들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간혹 무반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KH5 P.05-105 105] 중인은 양반들로부터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므로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으며, 향리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상민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 상민]

[KH5 P.05-106 106] 평민, 양인으로도 불리는 상민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이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으므로 상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전쟁이나 비상시에 군공을 세우는 등의 경우가 아니면 상민의 신분 상승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KH5 P.05-107 107] 대부분의 농민들은 조세, 공납, 부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세는 때에 따라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과중하였다.

[KH5 P.05-108 108] 수공업자들은 공장으로 불리며, 관영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에게는 장인세가 부과되었다. 상인은 시전 상인보부상 등이 있었는데,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상거래에 종사하였다. 이들에게도 상인세가 부과되었으며,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보다 아래에 위치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는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하였다.



천민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 천민]

[KH5 P.05-109 109] 천민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비자유민으로 교육받거나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막혀 있었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므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경우, 그 소생 자녀도 자연히 노비가 되는 제도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KH5 P.05-110 110] 조선 시대 노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신공을 바쳤으며, 공노비도 국가에 신공을 바치거나 관청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한편, 백정, 무당, 창기, 광대 등도 천민으로 천대받았다.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사회 정책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 사회 정책]

[KH5 P.05-111 111]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 신분 질서의 유지와 농민의 생활 안정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KH5 P.05-112 112]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무거운 조세와 요역의 부담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게다가 관리 또는 양반 지주들에게 수탈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들은 전호가 되거나, 노비나 유민이 되어 자신에게 부과된 역을 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민의 몰락은 곧바로 국가의 안정과 재정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였으므로,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회 제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 사회 제도]

환곡제(還穀制)

춘궁기에 양식과 종자를 빌려 준 뒤에 추수기에 회수하는 제도이다. 본래 의창에서 담당하였지만 의창은 빌려준 원곡만을 받았기 때문에 곧 원곡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평창에서는 모곡이라 하여 원곡의 소모분을 감안한 10%의 이자를 거두었다.

[KH5 P.05-113 113]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종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KH5 P.05-114 114]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KH5 P.05-115 115] 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ㆍ서 대비원, 제생원, 동ㆍ서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ㆍ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에 거주하는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 및 진료를 담당하였다. 동ㆍ서활인서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법

ㅇ 굶주린 사람 중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관아에 나아 환곡을 직접 받아 갈 수 없는 사람은 가져다 줄 것.
ㅇ 모자라는 구휼의 곡식을 보충하기 위해서 산나물 등을 많이 캐어 먹도록 할 것.
ㅇ 여러 날 굶주린 사람에게 간장물을 마시게 하면 즉사하므로, 먼저 죽물을 식혀서 천천히 먹여 허기를 면하게 한 다음 밥을 줄 것.
ㅇ 깊은 산골과 외떨어진 곳의 굶주린 사람을 먼저 살필 것. <세종실록>


법률제도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 법률제도]

대명률(大明律)

명의 기본 법전으로 태 · 장 · 도 · 유 · 사의 5형 형벌 체제인 당률(唐律)을 계승하면서 자자(刺字: 글자로 문신을 새기는 일)와 능지처사(凌遲處死) 같은 극형을 추가하였다.
강상(綱常)

삼강(三綱)과 오상(娛常)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종법(宗法)

종법은 조선 가족 제도의 토대였으며, 가족 윤리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를 지탱한 중요 원리의 하나이다.

[KH5 P.05-116 116] 조선 시대에는 관습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고려 시대와 달리, 경국대전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벌과 주로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KH5 P.05-117 117] 범죄 가운데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이 같은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낮은 근무 성적을 받거나 파면되기도 하였다. 형벌은 태ㆍ장ㆍ도ㆍ유ㆍ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KH5 P.05-118 118] 민사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수령 등 지방관이 처리하였다. 초기에는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남의 묘지에 자기 조상의 묘를 쓰는 데에서 발생하는 산송이 주류를 이루었다. 상속은 종법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조상의 제사와 노비 상속을 중요시하였다. 물건에 대한 소유권과 토지의 소유권 관념이 고려 시대에 비하여 발달하였다.

[KH5 P.05-119 119]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KH5 P.05-120 120] 재판에 불만이 있을 경우에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신문고나 징을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제도들은 백성의 억울함을 해결해 줌으로써 이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문고 제도

고할 데가 없는 백성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품은 자는 나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소하기를 "서울과 외방의 고할 데 없는 백성이 억울한 일을 소재지의 관청에 고발하여도 소재지의 관청에서 이를 다스려 주지 않는 자는 나와서 등문고를 치도록 허락하소서. 또, 법을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등문한 일을 추궁해 밝히고 아뢰어 처결하여 억울한 것을 밝히게 하소서. 그 중에 사사롭고 (남에게) 원망을 품어서 감히 무고를 행하는 자는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여 참소하고 간사하게 말하는 것을 막으소서." 하여 그대로 따르고, 등문고를 고쳐 신문고(申聞鼓)라 하였다. <태종실록>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향촌 사회의 모습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 향촌 사회의 모습]

[KH5 P.05-121 121] 향촌은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향은 행정 구역상 군현의 단위를 말하며, 촌은 촌락이나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에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 목, 군, 현을 두어 각각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또, 군, 현 아래에는 면, 이(里) 등을 설치하였으나,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지는 않았다.

[KH5 P.05-122 122] 지방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유향소와 경재소는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가 분화, 발전한 것이다.

[KH5 P.05-123 123] 그러나 경재소가 혁파되면서(1603) 유향소는 향소 또는 향청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고 향촌 질서 역시 변화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 농민을 지배하고 있던 계층은 사족(士族)들이었다. 사족들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들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KH5 P.05-124 124] 지방 사족은 그들 중심의 향촌 사회 운영 질서를 강구하고 향약 등의 보급을 통하여 면리제와 병행된 향약 조직을 형성해 나갔다. 향약은 중종조광조에 의하여 처음 시행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향안, 향규, 향약 등은 군현 내에서 지방 사족이 그들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였다.



촌락의 구성과 운영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 촌락의 구성과 운영]

[KH5 P.05-125 125] 촌락은 농민 생활의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향촌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연촌으로 존재하면서 동, 이(里)로 편제된 조직이다. 정부는 조선 초기에 자연촌 단위의 몇 개의 이(里)를 면으로 묶은 면리제를 통해, 그리고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가작통제를 통하여 촌락 주민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여기에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KH5 P.05-126 126] 조선 시대에 신흥 사족이 향촌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향촌 사회에는 주로 양반들이 거주하는 반촌(班村)과 평민들이 거주하는 민촌(民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향촌에서는 두서너 개의 씨족이 서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양반 · 평민 · 천민이 섞여 살았다. 반촌은 동성의 특정 성씨만이 아니라 친족, 처족, 외족의 동족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성씨가 거주하다가 18세기 이후에 동성 촌락으로 발전하였다.

[KH5 P.05-127 127] 민촌은 대부분 평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다른 촌락에 거주하는 지주의 소작농으로 생활하였다. 민촌도 18세기 이후에 그 신분 구성이 변하여 구성원 가운데 다수가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KH5 P.05-128 128] 사족들은 동계, 동약을 조직하여 촌락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신분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지주제를 통하여 사회 · 경제적 지배를 관철시켰다. 일반 백성들은 농촌에서 향도계, 동린계 등의 자생적인 생활 문화 조직을 만들었다. 동계, 동약에는 대체로 사족들만이 참여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양반과 평민층이 함께 참여하는 상하 합계의 형태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양 난을 거치면서 향촌의 사회 · 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족 지배 체제가 동요를 일으키게 됨으로써 가능하였다.

[KH5 P.05-129 129] 한편, 촌락의 농민 조직으로 두레향도가 있었다. 두레는 공동 노동의 작업 공동체였다. 향도는 불교와 민간 신앙 등의 신앙적 기반과 동계 조직과 같은 공동체 조직의 성격을 모두 띠는 것이었다.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돕는 활동을 하였다.



촌락의 풍습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 촌락의 풍습]

[KH5 P.05-130 130] 조선 초기에는 상무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 전부터 이어 오던 석전이라고 부르는 돌팔매놀이를 자주 거행하였는데, 국왕도 이를 관전할 정도였다. 그러나 뒤에는 이 행사로 말미암은 사상자가 속출하여 국법으로 이를 금하였으나, 민간 풍습으로 계속 이어졌다.

[KH5 P.05-131 131] 양반 사족들은 향도계, 동린계 등의 자생적인 생활 문화 조직들을 음사라 하여 금지하였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활 풍습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행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며칠 동안 술과 노래로 즐기는 일종의 마을 축제였는데, 점차 장례를 도와주는 기능으로 전환되어 갔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이 향도에서 유래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4) 성리학적 사회 질서의 강화



예학과 족보의 보급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4) 성리학적 사회 질서의 강화 - 예학과 족보의 보급]

[KH5 P.05-132 132] 성리학은 신분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명분론을 강조하였다. 예학은 양반들이 성리학적 도덕 윤리를 강조하면서 신분 질서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성립한 학문이며, 삼강오륜을 기본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특히, 삼강오륜은 현실적으로 가부장적 종법 질서로 구현되어 성리학 중심의 사회 질서 유지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KH5 P.05-133 133] 사림은 향약을 시행하고 도덕과 예학의 기본 서적인 소학을 보급하여 향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가묘사당을 건립하여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KH5 P.05-134 134] 사림 간의 정쟁의 구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예학과 예론은 양반 사대부의 신분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양반 사림들은 이와 함께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가족의 내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암기하는 보학이 발전하였다.

[KH5 P.05-135 135] 예학이 종족 내부의 의례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보학은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므로 족보를 통해서 안으로는 종족 내부의 결속을 다짐하였고, 밖으로는 다른 종족이나 하급 신분에 대하여 우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족보는 결혼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족보의 편찬과 보학의 발달은 조선 후기에 더욱 활발해짐으로써 양반 문벌 제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족보의 의미

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代數)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서자의 자손이 구별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 종법이 없어지고서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 반드시 그 근본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 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을 구별하게 된다. 이로써 종족 간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안동 권씨 성화보>


서원과 향약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3. 근세의 사회 - 4) 성리학적 사회 질서의 강화 - 서원과 향약]

해주 향약(이이)
해주 향약(이이)

[KH5 P.05-136 136]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 지낸다는 설립 목적 이외에도 지방 사족들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서원은 사화로 인하여 향촌으로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들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급속히 발전하였다.

[KH5 P.05-137 137] 선현의 제사와 교육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서원은 유교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시키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서원은 교육 기관이므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적게 받는다는 이점과 자기 문중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번창하게 되었다.

[KH5 P.05-138 138] 서원과 함께 사림의 세력 기반을 이루고 상민층에까지 유교의 예속을 침투시켜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바로 향약이었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단결하여 서로 도와주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더욱 알맞도록 구성한 것이다.

[KH5 P.05-139 139] 향약은 조선 사회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사림들이 향약을 통하여 지방 자치를 구현하고자 한 데에는 농민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KH5 P.05-140 140] 향촌 사회에 향약이 보급되어 유교 윤리가 뿌리를 내리게 되자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토호향반 등 지방 유력자들이 주민들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였고, 향약의 간부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다투고 모함함으로써 오히려 풍속과 질서를 해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해주 향약 입약 범례문

무릇 뒤에 향약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먼저 규약문을 보여 몇 달 동안 실행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헤아려 본 뒤에 가입하기를 청하게 한다. 가입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단자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적어서 모임이 있을 때에 진술하고, 사람을 시켜 약정(約正)에게 바치면 약정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좋다고 한 다음에야 글로 답하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게 한다. <율곡전서>
심화과정: 유교적 지배 질서의 확립 과정

① 성종 13년 4월 신해 사헌부 대사헌 채수가 아뢰었다. "어제 전지를 보니 통역관, 의관을 권장하고 장려하고자 능통하고 재주가 있는 자는 동시 양반에 발탁하여 쓰라고 특별히 명령하셨다니 듣고 놀랐습니다. 무릇 벼슬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직책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약사, 통역관은 사대부의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 의관, 역관 무리는 모두 미천한 계급 출신으로서 사족이 아닙니다. <성종실록>

② 인륜의 도는 진실로 삼강 밖에서 나오는 것이 없고, 천성의 참됨은 진실로 만대에 같은 것입니다. 마땅히 앞선 사람들의 행실에 대한 기록을 모아 오늘의 모범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절개를 바치는 것은 하늘의 법칙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신하로서 이것을 하고 아들로서 이것을 하며 아내로서 이것을 하는 것은 순종하는 땅의 도리에 근원을 둔 것입니다. ……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효자, 충신, 열녀로 우뚝 높아서 기록으로 남길 만한 사람을 각각 110명씩 찾아 내었습니다. 앞에는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를 붙였습니다. <삼강행실도>

③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가 막히어 행하여지지 않으면, 예의를 버리고 염치가 없어짐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오랑캐나 짐승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실로 국가의 큰 근심이다. 이것을 살펴 바로잡는 책임은 유향소에 있다. …… 이제부터 우리 고을 선비들이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근본으로 하고 국가의 법을 준수하여 집에서나 고을에서 각기 질서를 바로잡으면, 나라에 좋은 선비가 될 것이요, 출세하든지 가난하게 살든지 서로 의지가 될 것이다. 굳이 약속을 만들어 서로 권할 필요도 없으며, 법을 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진실로 이를 알지 못하고 올바른 것을 어기고 예의를 해침으로서 우리 고을 풍속을 무너뜨리는 자는 바로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백성이다. 벌을 주지 않으려 해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부득이 향약을 세우는 까닭이다. <퇴계집
  1. ①의 자료와 관련하여 조선 시대 양반들이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하였던 정책들을 조사해 보자.
  2. ②의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에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목적을 말해 보자.
  3. ③의 자료와 관련하여 지방 사림 세력이 향촌 지배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발표해 보자.
심화과정: 사림 세력의 성장과 성리학적 종법 질서의 확립

①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처가에서 자라나니 처부모를 볼때 오히려 자기 부모처럼 하고, 처의 부모도 또한 그 사위를 자기 아들처럼 대한다. <성종실록>

② 조선 중기의 상속 실태 비교



족보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하였다. 우선 족보 일반의 의의와 그 일족의 근원과 내력 등을 일족 가운데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기록한 서문(序文)이 권두(卷頭)에 있다. 다음에는 시조중시조의 사전(史傳)을 기록한 문장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시조의 분묘도(墳墓圖)와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 지도 등을 나타낸 도표가 들어가며, 그 밑에 범례가 있다. 끝으로 족보의 중심이 되는 계보표가 기재된다. 이것은 우선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宗系)를 이루며, 같은 항렬은 횡으로 배열하여 동일 세대임을 표시한다. 기재된 사람은 각 사람마다 그 이름, 호(號), 시호(諡號), 생몰(生沒) 연월일, 관직, 봉호(封號), 훈업(勳業), 덕행(德行), 충효(忠孝), 문장, 저술(著述) 등을 기록한다. 또, 자녀에 대해서는 입양 관계, 적서의 구별 및 남녀의 구별 등을 명백하게 한다.
  1. ①∼②를 보고, 조선 시대 가족 구성과 상속 제도의 변화를 설명해 보자.
  2. 위와 같은 변화가 나타난 배경을 사림 세력의 성장과 연결시켜 설명해 보자.
  3. ③의 자료와 관련하여 족보를 만든 목적을 정리해 보자.


4. 사회의 변동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KH5 P.05-141 141]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그동안 사회의 기반을 이루었던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농업 기술의 발달과 이로 인한 농업 경영의 변화, 상공업의 발달에 힘입은 바 컸다.

[KH5 P.05-142 142] 향촌 사회의 부농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양반으로 성장하여 종래의 전통적인 양반과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향촌 사회는 재향 사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수령권이 강화되는 등 향촌 질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KH5 P.05-143 143]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집권층의 자세는 극히 보수적이고 임기응변적이었다. 이에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19세기에 들어와 평등 사상을 담은 동학과 천주교가 유포되고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1) 사회 구조의 변동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1) 사회 구조의 변동]



신분제의 동요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1) 사회 구조의 변동 - 신분제의 동요]

[KH5 P.05-144 144] 조선 사회는 법제적으로 양천제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기본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이러한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하였다.

[KH5 P.05-145 145] 그러나 조선 후기,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분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권력을 장악한 일부의 양반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나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KH5 P.05-146 146] 양반 계층의 자기 도태 현상이 날로 심화되는 속에서도 양반의 수는 더욱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숫자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들이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또는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에서의 사회 · 경제적 변화로 인하여 신분 변동이 활발해져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양반의 분화

조선 시대에는 흔히 4조(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안에 벼슬한 사람이 없으면 양반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지방 지주로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을 공부하여 유림(儒林)의 대열에 끼이거나 족보, 서원, 사우, 묘비 등을 만들어 자신들의 조상들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가문의 경제력이 떨어져 몰락하게 되면 이름만 양반이지 일반 백성과 다름없는 잔반(殘班)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업이나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기도 하여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수가 많았다.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1) 사회 구조의 변동 -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KH5 P.05-147 147]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회 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서얼중인 등 중간 계층의 역할도 커졌다. 서얼은 양반 사대부의 소생이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하여 여러 분야의 사회 활동에서 각종 제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커져 갔다. 그리고 기술직을 담당하거나 이서로서 행정 실무를 맡고 있던 중인층은 사회적으로 그 역할이 크면서도 역시 고급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었다.

[KH5 P.05-148 148] 중인층은 조선 후기의 사회 · 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신분의 상승을 추구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자 서얼들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청요직(淸要職)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을 말하며 조선 시대 관리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이 청요직을 거쳐야만 판서나 정승으로 진출하는 데 유리하였다.

[KH5 P.05-149 149] 영 · 정조 때에 서얼을 어느 정도 등용하자,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수 차례에 걸쳐 집단적으로 상소하여 동반이나 홍문관 같은 청요직으로의 진출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신분 상승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KH5 P.05-150 150]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은 기술직 중인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그들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누적된 불만을 표출한 중인들은 철종 때 대규모의 소청 운동을 일으켰다. 비록 이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이를 통하여 전문직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켰다.

[KH5 P.05-151 151]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 서학을 비롯한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이들 중간 계층의 활동은 농민의 움직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 옷차림은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까닭인지 근래 이것이 문란해져 상민ㆍ천민들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것이 마치 조정의 관리나 선비와 같이 한다. 진실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시전 상인들이나 군역을 지는 상민들까지도 서로 양반이라 부른다. <일성록>

○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양반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ㆍ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은 자가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 나 하며 (字)를 부르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목민심서>



노비의 해방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1) 사회 구조의 변동 - 노비의 해방]

[KH5 P.05-152 152] 조선 후기에 노비는 군공과 납속 등을 통하여 부단히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공노비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어 그 효율성이 떨어지자, 공노비를 종래의 입역 노비에서 신공을 바치는 납공 노비로 전환시켰다.

[KH5 P.05-153 153] 신분을 상승하지 못한 노비들은 도망을 통하여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비의 도망이 확산된 이유는 도망간 뒤에도 임노동자, 머슴, 행상 등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KH5 P.05-154 154] 도망한 노비의 신공은 남아 있는 노비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노비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노비의 도망이 빈번해지자, 나라에서는 신공을 줄여 달래기도 하고, 이들을 찾아 내려고도 하였으나,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KH5 P.05-155 155] 노비의 신분 상승 추세는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법이 실시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인하여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키기도 하였다(1801).

[KH5 P.05-156 156] 사노비는 일반 농민이나 공노비에 비하여 더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 이르자 사노비의 도망도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갑오개혁(1894)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제는 법제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가족 제도의 변화와 혼인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1) 사회 구조의 변동 - 가족 제도의 변화와 혼인]

친영(親迎)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올리고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혼인 형태를 가리킨다.
신행(김홍도) | 신부가 혼례식을 마치고 친정으로 가는 의식을 그린 것이다.
신행(김홍도) | 신부가 혼례식을 마치고 친정으로 가는 의식을 그린 것이다.

[KH5 P.05-157 157] 조선의 가족 제도는 부계모계가 함께 영향을 미치는 형태에서 부계 위주의 형태로 변화하여 갔다.

[KH5 P.05-158 158] 조선 중기까지도 혼인 후에 남자가 여자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아들과 딸이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의 대를 잇는 자식에게 5분의 1의 상속분을 더 준다는 것 외에는 모든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재산 상속을 같이 나누어 받는 만큼 그 의무인 제사도 형제가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책임을 분담하기도 하였다.

[KH5 P.05-159 159] 그러나 17세기 이후 성리학적인 의식과 예절이 발달하고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확립되면서 혼인 후에 곧바로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친영 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제사는 반드시 큰아들이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큰아들이 우대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딸들이, 그리고 점차 큰아들 외의 아들들도 제사나 재산 상속에서 그 권리를 잃어 갔다.

[KH5 P.05-160 160] 조선 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는 동성 마을을 이루어 나갔다. 따라서, 이 때에는 개인이 개인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종중이라고 하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KH5 P.05-161 161]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는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가족 제도를 잘 유지하기 위한 윤리 덕목으로 효와 정절을 강조하였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고 효자나 열녀를 표창한 것 등은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KH5 P.05-162 162] 조선 시대의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였지만, 남자들이 첩을 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일부일처제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인과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어서 첩의 자식인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사나 재산 상속 등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혼인은 대개 집안의 가장이 결정하였는데, 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는 나이는 남자 15세, 여자 14세였다.

율곡 선생 남매 분재기(分財期) | 율곡이이의 7남매와 서모인 권씨가 가옥, 토지, 노비 등의 유산을 나누어 상속한 내용을 작성한 문서이다
율곡 선생 남매 분재기(分財期) | 율곡이이의 7남매와 서모인 권씨가 가옥, 토지, 노비 등의 유산을 나누어 상속한 내용을 작성한 문서이다
재가 금지

경전에 이르기를 "믿음은 부인의 덕이다. 한번 남편과 결혼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삼종(三從)의 의(義)가 있고, 한 번이라도 어기는 예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도덕이 날로 나빠진 뒤로부터 여자의 덕이 정숙하지 못하여 사족(士族)의 딸이 예의를 생각지 아니해서 혹은 부모 때문에 절개를 잃고, 혹은 자진해서 재가하니, 한갓 자기의 가풍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 누를 끼친다. 만일, 엄하게 금령을 세우지 않는다면 음란한 행동을 막기 어렵다. 이제부터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들은 관료가 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라. <성종실록>


인구의 변동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1) 사회 구조의 변동 - 인구의 변동]

[KH5 P.05-163 163] 조선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수시로 호구 조사를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인구에 관한 기본 자료는 원칙적으로 3년마다 수정하여 작성하는 호적 대장이었다.

[KH5 P.05-164 164] 국가에서는 호적 대장에 기록된 각 군현의 인구 수를 근거로 해당 지역에 공물군역 등을 부과하였다. 공물과 군역의 담당자들이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들이므로 국가의 인구 통계는 주로 남성들만을 기록하고 있어 실제 인구 수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KH5 P.05-165 165] 조선 시대에는 대체로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하삼도에 전 인구의 50% 정도가 살았으며, 경기도 · 강원도에는 20%, 평안도 · 황해도 · 함경도에는 30% 정도가 거주하였다.

[KH5 P.05-166 166] 조선 시대의 인구 수는 건국 무렵에는 550만에서 750만 명,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에는 1,000만 명을 돌파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란의 영향으로 인구가 줄었다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엽에는 1,7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KH5 P.05-167 167] 특히, 한성에는 세종 때에 이미 10만 명 이상이 거주하였다. 한성의 인구 수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금 줄어들었으나, 18세기에 들어와서는 20만 명이 넘게 되었다.



2) 향촌 질서의 변화



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2) 향촌 질서의 변화 - 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부농층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부농층을 당시에 요호부민(饒戶富民)으로 불렀다. 이들은 자기의 전지를 소유하고 지방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농민들이었다.

[KH5 P.05-168 168] 농촌 사회가 분화되고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양반 계층의 구성이 복잡하게 바뀌었고,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도 변화되었다.

[KH5 P.05-169 169] 양반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족보를 만들어 가족 집단 전체가 양반 가문으로 행세하고 상민과는 통혼하지 않았다. 양반의 명단인 청금록향안은 신분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 서류인 동시에, 향약 등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중요시되었다.

청금록 | 서원 및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들이 사용한 출석부의 일종이다. 푸른색 비단으로 치장한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청금록 | 서원 및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들이 사용한 출석부의 일종이다. 푸른색 비단으로 치장한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청금록 | 서원 및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들이 사용한 출석부의 일종이다. 푸른색 비단으로 치장한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KH5 P.05-170 170] 평민과 천민 가운데 재산을 모아 부농층으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가운데는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향촌 사회 내부에서 양반들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KH5 P.05-171 171] 양반들은 군현을 단위로 하여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거주지를 중심으로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사우가 세워졌다.

[KH5 P.05-172 172]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향촌 사회를 지배하였던 사족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부농층은 수령을 대표로 하는 관권과 결탁하여 성장의 기반을 굳건히 하면서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맡아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KH5 P.05-173 173] 이에 따라 종래에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에 의견을 물어 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화였다.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재지 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해 나갔다.



부농 계층의 대두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2) 향촌 질서의 변화 - 부농 계층의 대두]

향임직(鄕任職)

향촌에 있는 향청(유향소)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나 그 직책을 말한다.

[KH5 P.05-174 174] 향촌 사회에서 종래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 대신에 새로운 부농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경제적 능력은 갖추었지만, 아직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다. 정부는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를 통하여 이들 부농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KH5 P.05-175 175]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의 욕구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와 일치하였기에 정부도 이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부농층은 종래 향촌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직에 진출하지 못한 곳에서도 수령이나 기존의 향촌 세력과 타협하여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그러나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부농층도 여전히 많았다.



3) 농민층의 변화



농민층의 분화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3) 농민층의 변화 - 농민층의 분화]

[KH5 P.05-176 176] 양 난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기존의 사회 체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가 모색되었다. 특히, 이 당시 피지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농민들이 주목되었다.

[KH5 P.05-177 177] 조선 후기의 농민은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층은 중소 지주층으로,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어 소작제로 경영하여,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층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은 작은 규모의 자영농이거나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경작하고 소작료를 내던 소작농이었다.

[KH5 P.05-178 178] 국가는 농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무를 부과하였다.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호패법으로 이들의 이동을 억제하였다. 토지에 묶인 농민들은 대대로 한 곳에 정착하여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KH5 P.05-179 179] 양 난 이후 국가 재정의 파탄과 관리들의 기강 해이로 인한 수취의 증가는 농민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다. 사회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대동법균역법을 시행하는 등의 노력이 실제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농민의 불만은 더욱 커져 갔다.

[KH5 P.05-180 180]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시련이 거듭되는 속에서도 일부 농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그들은 농업 경영을 통하여 부농으로 부상하거나 상공업으로 생업을 영위하기도 하고, 아니면 도시나 광산의 임노동자가 되었다.



지주와 임노동자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3) 농민층의 변화 - 지주와 임노동자]

[KH5 P.05-181 181] 조선 후기에도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함께 양반 지주의 이윤 추구가 경제적 욕구를 자극하여 광작을 하는 대지주가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제 관계가 발달하자, 일반 서민들 중에는 적기는 하지만 지주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 갔다. 부를 축적한 새로운 지주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KH5 P.05-182 182] 양반이 되면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군역을 면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으며, 더욱이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제 활동에서 각종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력으로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 나가고자 하였다.

[KH5 P.05-183 183] 일부 농민이 부농층으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에, 다수의 농민은 오히려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주로 농민들의 부역 동원으로 충당되었다. 양반 지주층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노비나 소작농의 노동력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래로 부역제가 해이해져서 17~18세기에 이르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마저 동원이 어려워지면서 점차 임노동자를 고용해야 했다. 궁궐이나 관청에서 주관하는 성쌓기나 도로 공사에 동원되는 인부들도 노임을 주고 부려야 하는 처지였다.

[KH5 P.05-184 184] 이러한 현상은 부농들도 똑같이 겪는 일이었다. 부농층도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임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농촌에서는 대체로 1년 단위로 임금을 받는 품팔이 노동력이 많았다. 부농층의 대두와 임노동자의 출현은 이 시기 농민의 분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사회 불안의 심화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 사회 불안의 심화]

[KH5 P.05-185 185] 신분제의 동요는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지고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은 점차 높아져서 곳곳에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KH5 P.05-186 186]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관오리들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농민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지경이었다.

[KH5 P.05-187 187]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들 사이에 비기, 도참설이 널리 퍼지고, 서양의 이양선까지 연해에 출몰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갔다.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 감에 따라 각처에서는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화적들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들을 공격하였고, 수적들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하였다.

도선사 도솔암 마애불(전북 고창) | 고려시대에 만든 석가여래상이나 19세기에는 명치 부위에 있는 감실에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도선사 도솔암 마애불(전북 고창) | 고려시대에 만든 석가여래상이나 19세기에는 명치 부위에 있는 감실에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예언 사상의 대두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 예언 사상의 대두]

[KH5 P.05-188 188] 사회가 변화되면서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비기,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유행하였다.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 없는 낭설이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시켰다. 정감록은 이 때에 널리 유행한 비기였다.

[KH5 P.05-189 189] 여기에 무격 신앙이나 미륵 신앙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현세에서 얻지 못하는 행복을 미륵 신앙에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심지어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서민을 끌어모으는 무리도 나타났다.



천주교의 전파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 천주교의 전파]

천주실의 | 본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한문으로 지었으나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18세기에 한글로 옮긴 것이다.
천주실의 | 본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한문으로 지었으나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18세기에 한글로 옮긴 것이다.

[KH5 P.05-190 190]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경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KH5 P.05-191 191]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자, 드디어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KH5 P.05-192 192]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던 시파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큰 탄압이 없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집권하면서 대탄압이 가해졌다(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래에 앞장을 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천주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며 백성들에게 활발히 전파되었다.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KH5 P.05-193 193]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들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비판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힌 천주 교리서는 이탈리아의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였다. 천주실의는 17세기 초에 베이징에서 간행되었고, 곧이어 이수광유몽인 등에 의하여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러한 천주 교리서에 대하여 당시 유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탐독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실학자인 이익의 경우 천주교가 불교처럼 허망한 종교이고,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현혹하는 종교라고 하였다.


동학의 발생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 동학의 발생]

[KH5 P.05-194 194]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 · 불 · 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KH5 P.05-195 195]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시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KH5 P.05-196 196]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농민의 항거


[한국사: V.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4. 사회의 변동 -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 농민의 항거]

[KH5 P.05-197 197] 사회 불안이 점차 고조되자, 이제까지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유교적 왕도 정치는 점점 퇴색되어 갔다.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KH5 P.05-198 198]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소청(所請)

징계 처분, 본인에게 불이익 처분을 받은 자가 그 처분을 따르지 않고 심사를 청구하는 행정 심판
벽서, 괘서(掛書)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
19세기의 농민 봉기
19세기의 농민 봉기

[KH5 P.05-199 199] 가난과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세금을 피하여 산간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고, 도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농민들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KH5 P.05-200 200] 처음에는 소청이나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들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KH5 P.05-201 201] 농민들의 항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1862년의 농민 항쟁이었다.

[KH5 P.05-202 202]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 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아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KH5 P.05-203 203]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다.

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父老)와 자제와 공 · 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 유교 문화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고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는 자 있겠는가. ……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 ·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갖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君侯)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패림>
심화과정: 양반 중심 신분 체제의 변화

①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명분을 중히 여겼다. 양반들은 아무리 심한 곤란과 굶주림을 받더라도 팔짱 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실업에 힘써서 몸소 천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모두들 나무라고 비웃기를 노예처럼 무시하니, 자연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생산하는 자는 줄어든다.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목별로 조항을 엄격히 세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 중 사농공상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비록 농부나 장사치의 자식이 낭묘(廊廟)에 들어가 앉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재능과 학식이 없다면 비록 공경의 자식이 여대(하인)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한탄할 것이 없다. 위와 아래가 함께 그 직분을 닦는 데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상고하여 상벌을 베풀어야 한다. <담헌서>

② 울산 호적

     
(단위: %)
시기
양반 호
상민 호
노비 호
1729
1765
1804
1867
26.29
40.98
53.47
65.48
59.78
57.01
45.61
33.96
13.93
 2.01
 0.92
 0.56
  1. 자료 ①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해 보자.
  2.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던 사회 · 경제적 배경을 조사해 보자.
  3. ②의 신분별 인구 변동이 보여 주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 보자.
심화과정: 천주교의 전파와 유교 의례의 대립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도리와 덕행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비록 지극한 효자라 할지라도 맛좋은 것이라 하여 부모가 잠들어 있는 앞에 차려 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에는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잠시 잠들어 있을 동안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원히 잠들었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허위와 가식의 예로써 이미 돌아간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상재상서> 
  1.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조상 숭배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2. 천주교의 제사 거부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책을 조사해 보자.
심화과정: 후천개벽과 보국안민을 주장한 동학 사상


①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천을 나눔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차별을 없애고 선사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최시형의 최초 설법>

② 때가 왔네 때가 왔네. 다시 못 올 때가 왔네. / 뛰어난 장부에게 오랜만에 때가 왔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 무수 장삼 떨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한 몸으로 비켜서서 / 칼 노래 한 곡조를 때여 때여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해와 달을 놀리고, / 게으른 무수 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 명장 어디 있나? 장부 앞에 장사 없네. /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용담유사>

③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멸망하면 또한 입술이 떨어지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이니,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동경대전>
  1. 동학이 농민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던 이유를 알아보자.
  2. 동학이 정부의 탄압을 받았던 이유를 조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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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내용
  • 2009/09/30 20:18: KSY Version 1.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