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분류: 한국사/교과서
지은이: 국사전자교과서/편집: K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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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1. 고대의 경제
        1) 삼국의 경제 생황
            삼국의 경제 정책
            귀족의 경제 생활
            농민의 경제 생활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통일 신라의 경제 활동
            귀족의 경제 생활
            농민의 경제 생활
            발해의 경제 발달
    2. 중세의 경제
        1) 경제 정책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
            국가 재정의 운영
            수취제도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
        2) 경제 활동
            귀족의 경제 생활
            농민의 경제 생활
            수공업자의 활동
            상업 활동
            화폐 주조와 고리대의 유행
            무역 활동
    3. 근세의 경제
        1) 경제 활동
            농본주의 경제 정책
            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수취 체제의 확립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양반 지주의 생활
            농민 생활의 변화
            수공업 생산 활동
            상업 활동
            수취 제도의 문란
    4. 경제 상황의 변동
        1) 수취 체제의 개편
            농촌 사회의 동요
            전세의 정액화
            공납의 전세화
            균역법의 시행
        2) 서민 경제의 발전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농민 경제의 변화
            민영 수공업의 발달
            민영 광산의 증가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사상의 대두
            장시의 발달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
            중계 무역의 발달
            화폐 유통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농촌 생활(민화)
농촌 생활(민화)

[KH4 P.04-01 001] 경제는 인간 생활의 기초로서 인간의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살았을까 또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등 생활에 관련된 의문을 해결하려면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들을 알아야 한다.

[KH4 P.04-02 002] 우리 조상들도 다른 민족과 같이 좀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바로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당시의 생산력 수준, 토지와 생산 도구의 소유 형태, 잉여 생산물의 수취 방식, 경제 정책 등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지배층의 가혹한 수취나 자연 재해 등 농민 생활을 악화시킬 수 있는 조건과 농민 스스로의 노력, 정부의 권농 정책과 사회 정책 등 농민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조건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을 변화시켜 왔다.

[KH4 P.04-03 003] 경제사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과정을 살피면서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모습을 이해하고,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1. 고대의 경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KH4 P.04-04 004] 삼국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군사력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관심을 가졌다. 수취 제도 정비, 철제 농기구 보급, 우경 장려 등 여러정책을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였고, 농민 생활도 점차 향상되어갔다. 왕실과 귀족의 필요에 따라 높은 수준의 기술이 있어야 생산할 수 있는 물품도 제조되었다.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생산력 향상은 잉여 생산물을 증가시켜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게 하였다.

[KH4 P.04-05 00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국내 정세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농민의 생활도 나아지고, 수공업과 상업 및 무역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KH4 P.04-06 006] 신라 말에 이르러 중앙 정치의 혼란으로 지배층이 농민에 대한 수취를 점차 가혹하게 하면서 농민 경제가 침체되고 사회가 동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점차 성장하여 독자적인 경제 영역을 형성하고,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무역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1) 삼국의 경제 생황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1) 삼국의 경제 생활]



삼국의 경제 정책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1) 삼국의 경제 생활 - 삼국의 경제 정책]

삼국 시대의 행상

고구려의 미천왕은 어렸을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피해 남의 집 머슴을 하거나 소금 행상을 하였다고 한다.
삼국의 경제 활동
삼국의 경제 활동

[KH4 P.04-07 007] 삼국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과 전쟁을 벌여 정복한 지역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공물로 수취하였다. 또, 삼국은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군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으로 주었다.

[KH4 P.04-08 008] 삼국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각국은 피정복민을 노비처럼 지배하던 방식을 개선하려 하였다. 피정복민을 무리하게 전쟁에 동원하거나 가혹하게 물자를 수취하면 이들이 다른 나라로 도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지배 정책의 변화로 삼국은 정복 지역에 대한 차별을 점차 줄여 갔지만 피정복민들은 일반 백성에 비하여 여전히 신분적 차별을 받고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졌다.

[KH4 P.04-09 009] 삼국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농민에게서 거두고 그들을 군사로 동원하였다. 농민에 대한 과도한 수취는 농민 경제의 발전을 억누르고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탈시켜 사회 체제가 동요하는 계기가 되었다.

[KH4 P.04-10 010] 이런 이유로 삼국은 가능한 한 합리적인 방식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대체로 재산의 정도에 따라 를 나누어 곡물과 를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왕궁, 성, 저수지 등을 만드는 데에 국가에서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가에서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KH4 P.04-11 011] 아울러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홍수, 가뭄 등으로 흉년이 들면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거나 빌려 주었다. 고구려 고국천왕 때 시행한 진대법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KH4 P.04-12 012] 또한 삼국은 노비들 중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여기에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KH4 P.04-13 013] 정부와 지배층의 필요에 따라 시장을 설치하였다. 삼국 시대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 같은 도시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KH4 P.04-14 014] 삼국의 무역은 대개 왕실과 귀족의 필요에 의하여 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런 무역을 통하여 문물이 교류되었다.

[KH4 P.04-15 015]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유목민인 북방 민족과 무역을 하였다.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으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당항성을 통하여 직접 교역하게 되었다.

삼국의 수취 제도

○ 세(인두세)는 포목 5필에 곡식 5섬이다. 조(租)는 상호가 1섬이고, 그 다음이 7말이며, 하호는 5말을 낸다.(고구려) <수서>

○ 세는 포목, 명주실과 삼, 쌀을 내었는데,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받았다.(백제) <주서>
    2월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백제) <삼국사기>


귀족의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1) 삼국의 경제 생활 - 귀족의 경제 생활]

녹읍(祿邑)

국가에서 관료 귀족에게 지급한 일정 지역의 토지로서, 조세를 수취할 뿐만 아니라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식읍(食邑)

국가에서 왕족, 공신 등에게 준 토지와 가호로서,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KH4 P.04-16 016] 삼국 시대의 귀족은 본래 스스로 소유하였던 토지와 노비 외에도 국가에서 준 녹읍, 식읍,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토지와 노비 등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귀족들은 이 토지와 노비를 통하여 곡물이나 베 등 필요한 물품을 얻었다.

[KH4 P.04-17 017] 귀족은 토지, 농기구, 소 등 생산 조건에서 농민보다 유리하였다. 그들은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일반 농민들은 가지기 어려운 철제 농기구와 소도 많이 소유하였다.

[KH4 P.04-18 018] 귀족은 노비와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농민을 동원하여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그리고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들어 재산을 늘려 갔다.

[KH4 P.04-19 019]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귀족들은 기와집, 창고, 마구간, 우물, 주방 등을 갖추고 높은 담을 쌓은 집에서 살면서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보석과 금, 은으로 치장하였다.

[KH4 P.04-20 020] 그러나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 체제가 안정되면서 귀족들의 과도한 수취는 점차 억제되었다.

고구려 귀족 생활(중국 길림성 집안 각저총)
고구려 귀족 생활(중국 길림성 집안 각저총)
고구려 귀족 저택의 주방(황해 안악 안악3호분)
고구려 귀족 저택의 주방(황해 안악 안악3호분)


농민의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1) 삼국의 경제 생활 - 농민의 경제 생활]

기와집 모양 토기
기와집 모양 토기
초가집 모양 토기(대구 달성)
초가집 모양 토기(대구 달성)

[KH4 P.04-21 021] 농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다. 농민들의 토지는 대체로 척박한 토지가 많았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 동안 묵혀 두어야 하였다.

[KH4 P.04-22 022] 농기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과 일부분을 철로 보완한 것을 사용하다가 4세기에서 5세기를 지나면서 철제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었다. 철제 농기구는 6세기에 이르러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우경도 점차 확대되었다.

[KH4 P.04-23 023] 국가는 농업을 장려하여 농민 생활의 안정을 꾀하였지만, 지나친 수취는 농민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다. 농민들은 국가와 귀족에게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과도하게 곡물 · 삼베 · 과실 등을 내야 했고, 성이나 저수지를 쌓는 일, 삼밭을 경작하고 뽕나무를 기르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KH4 P.04-24 024] 또, 삼국 간의 전쟁이 치열해지기 전에는 귀족을 비롯한 중앙의 지배층이 군사력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지방 농민들은 전쟁 물자의 조달을 담당하거나 잡역부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삼국 사이의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지방 농민도 전쟁에 군사로 동원되었고, 전쟁 물자의 조달 부담도 더욱 증가하였다.

[KH4 P.04-25 025] 농민들은 이러한 수취 체제하에서도 생활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어 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점차 농업 생산력은 향상되었지만,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등의 경제적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면 노비가 되거나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귀족과 평민

○ 그 나라는 3만 호인데 …… 그 중에서 대가(大家)들은 경작하지 않고 먹는 자가 1만 명이나 되며, 하호는 먼 곳에서 쌀, 낟알, 물고기, 소금 등을 져서 날라다 대가에 공급하였다. <삼국지>

○ 대가들은 밭갈이를 하지 않고 하호들은 부세를 바치며 노비와 같다 <위략>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민정 문서 |1933년 일본 도다이 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 때의 문서로, 당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행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장적,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
민정 문서 |1933년 일본 도다이 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 때의 문서로, 당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행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장적,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

[KH4 P.04-26 026]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신라는 피정복민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삼국의 경쟁 시기와는 다른 경제적 조치를 취하였다.

[KH4 P.04-27 027]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군역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KH4 P.04-28 028] 신라는 그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특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매년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

[KH4 P.04-29 029] 신라는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왕토 사상에 의거하여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민정(촌락) 문서의 내용

토지는 논, 밭, 촌주위답, 내시령답 등 토지의 종류와 면적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인구, 가호, 노비의 수와 3년 동안의 사망, 이동 등 변동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소와 말의 수,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까지 기록하였다.

특히 사람은 남녀별로 구분하고, 16세에서 60세의 남자의 연령을 기준으로 나이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호(가구)는 사람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기록된 4개 촌은 호구 43개에 총인구는 노비 25명을 포함하여 442명(남 194, 여 248)이며, 소 53마리, 말 61마리, 뽕나무 4,249그루 등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통일 신라의 경제 활동

남북국 시대의 무역로
남북국 시대의 무역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 통일 신라의 경제 활동]

[KH4 P.04-30 030] 통일 후 신라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성장을 토대로 경주의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생산이 늘어나 이전에 설치된 동시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서시남시를 설치하였다. 소경과 같은 지방의 중심지 혹은 교통의 요지에도 시장이 생겨 물물 교환의 형태로 각자 필요한 물건을 좀더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KH4 P.04-31 031] 통일 후 당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무역이 번성하였고, 공무역뿐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하였다.

[KH4 P.04-32 032] 처음에는 일본과 교류를 제한하여 무역이 성행하지 못하였으나, 8세기에 이르러 활발해졌다.

[KH4 P.04-33 033] 한편,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슬람 상인이 울산까지 와서 무역하였다

[KH4 P.04-34 034] 8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져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KH4 P.04-35 035] 무역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졌다.




귀족의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 귀족의 경제 생활]

[KH4 P.04-36 036] 통일이 되면서 왕실과 귀족은 이전보다 풍족한 경제 기반을 가졌다. 왕실은 삼국의 경쟁 과정에서 새로 획득한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국가의 수입 중의 일부를 왕실의 수입으로 삼았다.

[KH4 P.04-37 037] 국가는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할 금은 세공품, 비단류, 그릇, 가구, 철물 등을 만들기 위한 관청을 정비하여 이에 속한 장인과 노비에게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게 하였다.

[KH4 P.04-38 038] 귀족들은 식읍녹읍을 통하여 그 지역의 농민들을 지배하여 조세공물을 거두었고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통일 후에는 문무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귀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녹읍을 폐지하는 대신에 해마다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귀족은 경제적 특권을 제약받았지만, 국가에서 준 토지와 곡물 이외에도 물려받은 토지, 노비, 목장, 섬도 가지고 있었다.

[KH4 P.04-39 039] 귀족들은 당이나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비단, 양탄자, 유리 그릇, 귀금속 등 사치품을 사용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당의 유행을 따라 옷을 입을 정도였다. 귀족들은 경주 근처에 호화스러운 별장을 짓고 살았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노비에게 만들게 하여 사용하였고, 그 나머지는 시장에서 팔기도 하고 당이나 일본 등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농민의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 농민의 경제 생활]

[KH4 P.04-40 040] 통일 이후 사회 안정으로 농업 생산력이 늘어났으나 한계가 많았다. 당시는 시비법이 발달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경작할 수 없고 1년 또는 몇 년을 묵혀 두었다가 경작하여야 하였다. 대체로, 비옥한 토지는 왕실, 귀족, 사원 등 세력가가 가졌고, 농민의 토지는 대부분이 척박하여 생산량이 귀족의 것보다 적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 대신 수확량의 반 이상을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야 하였다.

[KH4 P.04-41 041] 전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였지만, 그 밖에 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여러 가지 물품을 공물로 내고 부역도 많아 농사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군역에 나가면 농사지을 노동력이 없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농민도 많았다.

[KH4 P.04-42 042] 조세 부담은 통일 이전보다 줄었으나 귀족이나, 촌주 등 세력가에 의한 수탈은 줄지 않았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귀족이나 지방 유력자(호족)들이 토지 소유를 늘려 나가면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점차 많아졌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거나, 노비로 자신을 팔거나, 때로는 유랑민이나 도적이 되었다. 고리대가 성행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KH4 P.04-43 043] 이나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 농민보다 어려운 형편이었다. 농민과 대체로 비슷한 생활을 하였으나,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KH4 P.04-44 044] 노비들은 왕실, 관청, 귀족, 절 등에 속하여 있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하여 음식, 옷 등 각종 필수품을 만들고 일용 잡무를 하였으며, 주인을 대신하여 농장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통일 신라의 평민

○ 진정 법사는 신라 사람으로, 출가하기 전 군역에 나가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가지 못하고 동원되었는데, 남는 시간에 날품팔이를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솥뿐이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문 앞에 와서 절을 짓는 데 필요한 철을 구하자, 그 어머니는 이 솥을 시주하였다. <삼국유사>


발해의 경제 발달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1. 고대의 경제 - 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 발해의 경제 발달]

[KH4 P.04-45 045]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 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들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KH4 P.04-46 046]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KH4 P.04-47 047]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수렵도 활발해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KH4 P.04-48 048]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숭어, 문어, 대게 등 다양한 어종과 고래를 잡았다.

[KH4 P.04-49 049] 수공업은 철, 구리, 금, 은 등 금속 가공업과 삼베, 명주, 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철의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고, 구리의 제련술도 뛰어나 좋은 품질의 구리를 생산하였다.

[KH4 P.04-50 050] 한편,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품 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외국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KH4 P.04-51 051]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 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KH4 P.04-52 052] 당과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KH4 P.04-53 053] 발해는 일본과 외교 관계를 중시하여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무역 규모도 커서 한 번에 수백 명이 오가기도 하였다.

심화과정: 토지와 농민을 둘러싼 국왕과 귀족 간의 갈등

① 재상가에는 (祿)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奴)이 3,000명이고 비슷한 수의 갑옷과 무기, 소, 말, 돼지가 있었다.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길러 필요할 때 활로 쏘아서 잡아먹었다. 곡식을 꾸어서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신당서>

② <삼국사기>:
  1. 관료전과 정전을 지급한 사실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말해 보자.
  2. 위의 자료에 나타난 토지 제도의 변화를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 갈등과 관련하여 설명하여 보자.
심화과정: 해상 세력의 성장

①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찾아 보고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널리 우리사람들을 노비로 삼으니 청해진을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신라의 요충으로 지금의 완도를 말하는데, 대왕은 그 말을 따라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해상을 방비하게 하니, 그 후로는 해상으로 나간 사람들이 잡혀가는 일이 없었다. <삼국사기>

②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이 자기 딸을 왕비로 맞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 (문성왕) 13년(851) 2월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곳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1. 청해진을 근거로 한 장보고의 활동 내용을 조사해 보자.
  2. 장보고가 중앙 정부의 권력 쟁탈전에 끼어 들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을 추론해 보자.


2. 중세의 경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KH4 P.04-54 054]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KH4 P.04-55 055]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KH4 P.04-56 056] 농업에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민간 수공업으로 발전해 갔다. 송, 을 중심으로 거란, 여진, 일본 등과 무역을 전개하였다.



1) 경제 정책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1) 경제 정책 -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

[KH4 P.04-57 057] 고려는 재정의 토대가 되는 주요 산업인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개간한 땅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면세하여 줌으로써 개간을 장려하고, 농번기에는 잡역 동원을 금지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였다.

[KH4 P.04-58 058] 재해를 당했을 때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고리대의 이자를 제한하였으며, 의창제를 실시하는 등 농민 안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KH4 P.04-59 059] 고려는 개경에 시전을 만들었고, 국영 점포를 열었다. 아울러 화폐처럼 유통되는 곡물이나 삼베를 대신하여 쇠, 구리, 은 등을 금속 화폐로 만들어 유통하는 등 상업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KH4 P.04-60 060] 수공업은 관청에 기술자를 소속시켜 무기, 비단 등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형태였으며, 민간 기술자나 일반 농민을 동원하여 생산을 보조하게 하였다. (所)에서도 먹, 종이, 금, 은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를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부진하였다.

고려의 농업 장려 정책

○ 임금(태조)이 명령을 내리기를 "……(몰락한 사람들에게) 조세를 면제해 주고 농업을 권장하지 않으면 어찌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될 수 있으랴.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자는 농토로 돌아가게 하며, 곧 대사면을 행하여 함께 휴식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 진전(황폐해진 경작지)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자는 사전(개인 소유지)의 경우 첫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2년째부터 경작지의 주인과 수확량을 반씩 나눈다, 공전(국가 소유지)의 경우는 3년까지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4년째부터 법에 따라 조(租)를 바친다. <고려사>


국가 재정의 운영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1) 경제 정책 - 국가 재정의 운영]

양안

경작지의 소유자와 크기를 적은 토지 대장
호적

부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등재하되, 때에 따라서는 여러 세대의 가족이 한 호적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KH4 P.04-61 061] 고려는 신라 말의 문란한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고려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KH4 P.04-62 062] 이런 수취 제도를 기반으로 고려는 재정 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왕실, 중앙 및 지방 관리, 향리, 군인 등 국가와 관청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토지로부터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나누어 주었다.

[KH4 P.04-63 063]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는 호부삼사를 두었다. 호부는 호적양안을 만들어 인구와 토지를 파악, 관리하였으며, 삼사는 재정의 수입과 관련된 사무만 맡고 실제의 조세 수취와 집행은 각 관청이 하였다.

[KH4 P.04-64 064] 재정은 관리의 녹봉, 일반 비용, 국방비, 왕실 경비 등에 지출하였다. 녹봉은 중앙과 지방의 문 · 무관, 종실 등에게 지급하였다. 재정의 쓰임새는 왕실의 공적 경비, 각종 제사 및 연등회팔관회의 비용, 건물의 건축이나 수리비, 왕의 하사품, 군선이나 무기의 제조비 등이었다. 특히, 국방비로 많은 비용이 들었다.

[KH4 P.04-65 065] 각 관청은 관청 운영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토지를 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필요한 비용을 각 관청에서 스스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수취제도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1) 경제 정책 - 수취제도]

토지등급

1결당 생산량을 최고 18석(최하 5석)을 기준으로 비옥도에 따라 상중하의 3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부과하였다. 1결은 100부(짐), 1부는 10속(묶음), 1속은 10파(한 줌)이다.
조창

조운할 곡식을 모아 보관하는 창고

[KH4 P.04-66 066] 고려의 세금은 토지에서 거두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물, 장정의 수에 따라 부과하는 이 있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호적과 양안을 만들었다.

[KH4 P.04-67 067]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서 개경의 , 우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

[KH4 P.04-68 068] 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이다.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속현, 부곡,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부과하여 공물을 거두었다. 공물에는 매년 내어야 하는 상공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다. 공물은 거두는 시기가 정해져 있어 그 시기에 각 관청에서 납부하여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공물은 조세보다 부담이 컸다.

[KH4 P.04-69 069] 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역은 성곽, 관아, 제방의 축조, 도로 보수 등의 토목 공사, 광물 채취, 그 밖의 일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KH4 P.04-70 070] 이 밖에도 어민에게 어염세를 거두거나 상인에게 상세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하였다.

고려의 수취 제도

○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를 올리기를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들을 맞이하면서 '최근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가혹해지면서 1결의 조세가 6석에 이르러 백성의 삶이 너무 어려우니 나는 이를 매우 가련하게 여긴다. 지금부터 마땅히 10분의 1세로 하여 밭 1부의 조를 3되로 하여라'라고 한탄하여 말하였는데 …… "라고 하였다. <고려사>

○ 편성된 호는 인구와 장정이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부역을 시킨다. <고려사>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1) 경제 정책 -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

[KH4 P.04-71 071] 고려는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일찍이 태조 때에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토지였다. 경종 때에 공복 제도와 역분전 제도를 토대로 전시과 제도를 만들었다. 이 때는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기 때문에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목종 때에는 전시과를 개정하여 관직만을 고려하여 지급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지급량도 재조정하였다. 그러나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문종 때에 현직 관료에게만 주도록 다시 조정하였다.

[KH4 P.04-72 072]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전시과 제도에 따라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이 때 지급된 토지는 수조권만 갖는 토지였다.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이 토지를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과전(科田)

문 · 무반 관료에게 지급한 토지

[KH4 P.04-73 073] 관리에게 보수로 주던 과전과 달리 문벌 귀족의 세습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데,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음서제와 함께 귀족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었다.

[KH4 P.04-74 074] 한인전은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였다. 군인전은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KH4 P.04-75 075] 한편,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내장전을 두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는 공해전을 지급하여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고, 사원에는 사원전을 지급하였다.

[KH4 P.04-76 076] 민전은 매매, 상속, 기증, 임대 등이 가능한 사유지로서, 귀족이나 일반 농민들이 상속, 매매, 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또, 소유권이 보장되어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토지였으며, 민전의 소유자는 국가에 일정한 세금을 내어야 했다. 대부분의 경작지는 개인 소유지인 민전이었지만, 왕실이나 관청의 소유지도 있었다.

[KH4 P.04-77 077] 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제도가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다시 분배하여야 할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 용인되면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런 폐단은 무신 정변을 거치면서 극도로 악화되었다. 전시과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일시적으로 관리의 생계를 위하여 녹과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KH4 P.04-78 078] 이런 미봉책으로는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하는 폐단을 막을 수 없었다. 권문세족이 권력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토지와 몰락한 농민을 모아 농장을 형성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져 고려 말에는 국가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전시과의 토지 지급 액수 (단위: 결)
전시과의 토지 지급 액수 (단위: 결)


2) 경제 활동



귀족의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2) 경제 활동 - 귀족의 경제 생활]

녹봉(祿俸)

관료를 47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400석을 받고, 최하 47등급은 10석을 받았다.

[KH4 P.04-79 079] 귀족의 경제 기반은 대대로 상속받은 토지와 노비, 관료가 되어 받은 과전과 녹봉 등이 있었다.

[KH4 P.04-80 080] 과전은 관료가 사망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유족의 생계 유지라는 명목으로 그 토지를 일부분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공음전이나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계속 관직에 나갈 수 없다면 경제 기반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귀족들은 과전에서 생산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받았다. 자신이 소유할 수 있었던 공음전이나 공신전에서는 대체로 수확량의 반을 거둘 수 있었다.

[KH4 P.04-81 081] 문종 때 완비된 녹봉 제도에 따라 현직에 근무하는 관리들은 쌀, 보리 등의 곡식을 주로 받았으나, 때로는 베나 비단을 받기도 하였다. 녹봉은 1년에 두 번씩 녹패라는 문서를 창고에 제시하고 받았다.

신공(身貢)

노비가 주인에게 제공하는 노동력이나 물품

[KH4 P.04-82 082]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에서도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소유지를 노비에게 경작시키거나 소작을 시켜 생산량의 반을 거두었다. 또, 외거 노비에게 신공으로 매년 베나 곡식을 받았다.

[KH4 P.04-83 083] 귀족들은 권력이나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빼앗기도 하고 헐값에 사들이거나 개간을 하여 토지를 늘렸다. 이렇게 늘어난 토지를 농장이라 하였고, 대리인을 보내 소작인을 관리하고 지대를 거두어 갔다.

[KH4 P.04-84 084] 이러한 수입을 기반으로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문벌 귀족이나 권문세족들은 큰 누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외출할 때는 남녀 모두가 시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방에서 즐기기도 하였다.

[KH4 P.04-85 085] 귀족들은 전문 기술자가 짜거나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당시 전문 기술자들이 만든 비단, 고운 모시 등은 왕실이나 귀족들이 쓰거나 중국에 수출도 하였다.

귀족의 생활

예종이 돌아가고 어린 왕이 즉위하니 …… (이자겸의) 아들들이 앞을 다투어 제택(第宅)을 건축하여 길거리에 죽 뻗쳐 있고, 권세가 더욱 떨치며,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으며, 자기 종들을 풀어놓아 다른 사람의 말과 수레를 빼앗아서 자기 물건을 실어 들이므로 힘없는 백성은 수레를 부수고 말과 소를 팔아 도로가 시끄러웠다. <고려사절요>

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 산은 민둥하여 초목이 없으므로 그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와 기이한 꽃과 이채로운 풀을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의 방을 꾸몄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하고 대의 섬돌괴석(怪石)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이 곳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쪽 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휘장, 장막과 그릇이 사치스럽고 음식이 진기하여 왕이 재상, 근신들과 더불어 매우 흡족하게 즐겼다. <고려사>


농민의 경제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2) 경제 활동 - 농민의 경제 생활]

[KH4 P.04-86 086] 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토지인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 · 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또, 품팔이를 하거나 부녀자들이 삼베, 모시, 비단 등을 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KH4 P.04-87 087] 대개 농민은 소득을 늘리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웠다. 농민이 진전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 국가에서 일정 기간 소작료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경작하던 주인이 방치해서 황폐해진 토지인 진전을 개간할 때 주인이 있으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주인이 없으면 개간한 사람의 토지로 인정해 주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연해안의 저습지와 간척지도 개간되어 경작지가 확대되어 갔다.

시비법(施肥法)의 발달

밭을 묵혀서 그 밭에 자란 풀을 태우거나 갈아엎어 비료를 주던 방식에서 들의 풀이나 갈대를 베어 와 태우거나 갈어엎은 녹비에 동물의 똥오줌을 풀이나 갈대와 함께 사용하는 퇴비가 만들어졌다.

[KH4 P.04-88 088] 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수리 시설의 발달 외에도 호미보습 등의 농기구와 종자도 개량되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었다.

[KH4 P.04-89 089] 밭농사는 2년 3작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고, 논농사도 고려 말에는 직파법 대신에 이앙법(모내기)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KH4 P.04-90 090] 고려 후기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거대한 규모의 농장을 만들고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면서 농민들은 몰락하였다. 몰락한 농민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노비로 전락하였다.

고려의 농업

○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험하고 평지가 적다. 그러므로 경작지가 산간에 많은데, 오르내리면서 경작하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멀리서 보면 계단과 같다. <고려도경>

○ 〔명종 18년(1182) 3월〕때에 맞추어 농사를 권장하고 힘써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저수(貯水)하고 물을 대게 하여 황모지(荒耗地)가 없도록 하여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하라. <고려사>


수공업자의 활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2) 경제 활동 - 수공업자의 활동]

[KH4 P.04-91 091] 고려의 수공업은 관청 수공업, 소(所) 수공업, 사원 수공업, 민간 수공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관청 수공업과 소 수공업이 중심이었으나, 후기에는 사원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공장안(工匠案)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 생산에 동원할 수 있는 기술자를 조사하여 기록한 장부

[KH4 P.04-92 092] 중앙과 지방에 있던 관청에서는 그 곳에서 일할 기술자들을 공장안에 올려 물품을 생산하게 하였으며, 농민을 부역으로 동원해 보조하게 하였다. 기술자들은 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칼, 창, 활 등 무기류, 가구류, 금은 세공품, 견직물, 마구류 등을 제조하였다.

[KH4 P.04-93 093] 에서는 금, 은, 철, 구리, 실, 각종 옷감, 종이, 먹, 차, 생강 등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KH4 P.04-94 094] 사원에서는 기술이 좋은 승려와 노비가 있어 베, 모시, 기와, 술, 소금 등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였다.

[KH4 P.04-95 095] 민간 수공업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이 중심이었다. 국가에서 삼베를 짜게 하거나 뽕나무를 심어 비단을 생산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이유로 농민들은 직접 사용하거나 공물로 바치거나 팔기 위하여 삼베, 모시, 명주 등을 생산하였다.

[KH4 P.04-96 096] 고려 후기에는 유통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간에서는 수공업품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관청 수공업에서 주로 생산하던 놋그릇, 도자기 등을 민간 수공업에서 거의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나무 제품, 명주, 삼베, 모시, 종이 등 다양한 물품을 민간에서 만들었다.



상업 활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2) 경제 활동 - 상업 활동]

고려의 교통로와 산업 중심지
고려의 교통로와 산업 중심지

[KH4 P.04-97 097] 고려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고려는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등의 대도시에는 관청의 수공업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판매하는 서적점 · 약점과 술 · 차 등을 파는 주점, 다점 등 관영 상점을 두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비정기적인 시장이 있어 도시 거주민이 일용품을 매매할 수 있었다. 매점매석과 같은 상행위를 감독하는 경시서도 두었다.

[KH4 P.04-98 098] 지방에서는 농민, 수공업자, 관리 등이 관아 근처에 모여들어 쌀, 베 등 일용품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이 열었다. 행상들은 이런 지방 시장에서 물품을 팔거나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베나 곡식을 받고 소금, 일용품 등을 판매하였다.

[KH4 P.04-99 099] 사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과 승려나 사원 노비들이 만든 수공업품을 민간에 팔았다.

[KH4 P.04-100 100] 고려 후기에 이르러 도시와 지방의 상업 활동이 전기보다 활발해졌다. 개경도 인구가 증가하여 민간의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으며, 관청의 물품 구입량이 증가하여 시전 규모도 확대되고 업종별 전문화가 나타났다. 개경의 상업활동은 점차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비롯한 항구들이 교통로와 산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KH4 P.04-101 101] 지방 상업에서는 행상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운로를 따라 미곡, 생선, 소금, 도자기 등이 교역되었으며, 새로운 육상로가 개척되면서 여관인 이 발달하여 이곳이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KH4 P.04-102 102] 고려 후기에는 국가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또, 관청, 관리, 사원 등은 강제로 농민에게 물건을 판매하거나 구입하도록 하고 조세를 대납하는 등 농민들을 강제적으로 유통 경제에 참여시켰다.

[KH4 P.04-103 103] 이 과정에서 상업 발달에 힘입어 부를 축척하여 관리가 되는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생겨났다. 그러나 농민들은 지배층의 가혹한 수취와 농업 생산력의 한계로 경제적 여유가 없어 적극적으로 상업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고려의 상업

신우(우왕) 7년(1381) 8월에 서울(개성)의 물가가 뛰어올랐는데, 장사하는 자들이 조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최영이 이를 미워하여 무릇 시장에 나오는 물건은 모두 경시서로 하여금 물가를 평정(評定)하고 세인(稅印: 세금을 바쳤다는 도장)을 찍게 하고 난 뒤에 비로소 매매하게 하였고, 도장을 찍지 않은 물건을 매매하는 자는 ……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경시서에 큰 갈고리를 걸어 두고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장사하는 자들이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삼한통보 해동통보
삼한통보 / 해동통보
활구(은병)

우리나라의 지형은 본떠서 은 1으로 만든 고가의 화폐로서 은병 하나의 값은 포 100여이나 되었다.


화폐 주조와 고리대의 유행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2) 경제 활동 - 화폐 주조와 고리대의 유행]

[KH4 P.04-104 104]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 발행과 사용이 논의되었다. 화폐를 발행하면 이익금을 재정에 보탤 수 있고, 정부가 경제 활동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KH4 P.04-105 105] 성종때에는 철전건원중보를 만들었으나 유통에 실패하였다. 그 뒤 숙종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동전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어 강제적으로 유통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자급자족의 경제 활동을 하였던 농민들은 화폐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았으며, 귀족들도 국가가 화폐 발행을 독점하고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이 때문에 동전 등은 도시에서도 주로 다점이나 주점 등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인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를 사용하였다.

[KH4 P.04-106 106] 왕실, 귀족, 사원은 고리대로 재산을 늘렸다. 생활이 빈곤했던 농민들은 부족한 식량을 구하거나 혼인, 상례 등에 쓰려고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기거나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KH4 P.04-107 107] 이와 같이 고리대가 성행하자, 일정한 기금을 만들어 그 이자를 공적인 사업의 경비로 충당하는 가 출현하였다. 보에는 학보, 경보, 팔관보, 제위보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보는 오히려 이자 취득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폐해을 끼쳤다.

고려의 화폐 정책

○ 내(목종) 선대의 조정에서는 이전의 법도와 양식을 따라서 조서를 반포하고 화폐를 주조하니 수년만에 돈꿰미가 창고에 가득 차서 화폐를 통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에 선대의 조정을 이어서 전폐(錢幣: 돈)는 사용하고 추포(발이 굵고 바탕이 거친 베)를 쓰는 것을 금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은, 국가의 이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갓 백성들의 원성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였다. …… 문득 근본을 힘쓰는 마음을 지니고서 돈을 사용하는 길을 다시 정하니, 차와 술과 음식 등을 파는 점포들에서는 교역에 전과 같이 전폐를 사용하도록 하고, 그 밖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서로 교역하는 데에는 임의로 토산물을 쓰도록 하라. <고려사>
고려 전기의 대외 무역
고려 전기의 대외 무역


무역 활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2. 중세의 경제 - 2) 경제 활동 - 무역 활동]

[KH4 P.04-108 108] 통일 신라 시대부터 서해안의 호족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사무역이 고려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점차 중앙 집권화되면서 그동안 성행하였던 사무역은 쇠퇴하고 공무역이 중심이 되었다.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KH4 P.04-109 109]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는 서해안의 해로를 통하여 송으로부터 왕실과 귀족의 수요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종이, 인삼 등 수공업품과 토산물을 수출하었다. 특히, 고려의 종이와 먹은 질이 뛰어나 송의 문인들이 귀하게 여겼으므로 비싼 값으로 수출되었다.

[KH4 P.04-110 110] 거란여진은 은을 가지고 와서 농기구, 식량 등과 바꾸어 갔다. 일본과도 무역을 하였으나, 송, 거란 등에 비하여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11세기 후반부터 내왕하면서 수은, 황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인삼, 서적 등과 바꾸어 갔다.

[KH4 P.04-111 111] 한편, 대식국인이라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에 들어와서 수은, 향료, 산호 등을 팔았다. 이들을 통하여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KH4 P.04-112 112] 원의 간섭기에는 공무역이 행해지는 한편, 사무역이 다시 활발해졌다. 상인들이 독자적으로 원과 교역하면서 금, 은, 소, 말 등이 지나치게 유출되어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날 정도였다.

심화과정: 수리 시설과 벼농사의 발달

① 무릇 토지의 등급은 묵히지 않는 토지를 상으로 하고 한 해 묵히는 토지를 중으로 하고 두 해 묵히는 토지를 하로 한다. <고려사>

② 수리 시설이 이어져 있는 토지는 밭 혹은 논으로 서로 경작하여, 토지의 등급을 헤아려 비옥한 토지는 해마다 돌려 가며 벼를 경작하되, 3월 안에 심을 수 없으면 5월 중순은 넘기 지 말아야 한다. <농서집요>

③ (공민왕) 11년(1362) …… 논을 다루는 우리나라 사람은 반드시 크고 작은 도랑에서 물을 끌어들일 뿐이요, 수차(水車)로 하면 물을 쉽게 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논 아래에 웅덩이가 있고 깊이가 한 길이 채 못 되어도 그 물을 내려다만 보지 감히 퍼 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땅은 물이 항상 고여 있고, 높은 땅은 항상 풀이 무성해 있는 것이 십중팔구나 됩니다. 그러니 계수관(界首官: 지방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차를 만들게 하고 그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한다면 민간에 전해 내려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뭄의 해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있어서 제일의 계책입니다. <고려사>
  1. 고려 시대 농업 기술의 발달 내용을 정리해 보자.
  2.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농업 경영상 변화를 추론해 보자.
심화과정: 승려의 상공업 활동

① 고려는 도선비기에 의거하여 국가의 비보 사찰을 정하여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도록 하고, 그 절에는 사원전과 노비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귀족들도 자기 가문의 절을 짓고 토지와 노비를 기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국가적으로 연등회팔관회를 개최하고, 국립 여관의 구실을 하던 을 절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② 승려들이 심부름꾼을 시켜 절의 돈과 곡식을 각 주군에 장리를 놓아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고려사절요>

③ 지금 부역을 피하려는 무리들이 부처의 이름을 걸고 돈놀이를 하거나 농사, 축산을 업으로 삼고 장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 어깨를 걸치는 가사는 술 항아리 덮개가 되고, 범패를 부르는 장소는 파, 마늘의 밭이 되었다. 장사꾼과 통하여 팔고 사기도 하며, 손님과 어울려 술 먹고 노래를 불러 절간이 떠들썩하다. <고려사>  
  1. 고려 시대 불교 정책과 사원 경제의 발달을 관련지어 설명해 보자.
  2. 고려 시대 사원이 수공업이나 상업의 경영에도 관여할 수 있었던 배경을 추론해 보자.


3. 근세의 경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KH4 P.04-113 113] 조선은 조세, 공납, 수취 제도를 다시 정립하여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충하고, 양반 지배층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KH4 P.04-114 114] 농업에서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농서의 편찬과 보급, 수리 시설의 확충 등 안정된 농업 조건을 만들기 위한 권농 정책이 추진되었다. 상공업에서는 시전의 설치, 관영 수공업의 정비 등을 통하여 안정적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토대 위에 점차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방에서 장시가 출현하였다. 민간 상공업이 성장하면서 점차 관영 상공업 체제가 동요되었다.

[KH4 P.04-115 115]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여 양반 지주들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수취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들로 사회적 동요가 심해졌다.



1) 경제 활동



농본주의 경제 정책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1) 경제 활동 - 농본주의 경제 정책]

[KH4 P.04-116 116] 조선은 고려 말의 파탄된 국가 재정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위민, 애민을 중요하게 여기는 왕도 정치 사상에서 민생 안정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KH4 P.04-117 117] 조선 건국을 주도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은 중농 정책을 표방하면서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다.

[KH4 P.04-118 118] 반면,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을 규제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 간의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KH4 P.04-119 119]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으로 소비는 억제되었고, 도로와 교통 수단도 미비하였다. 자급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화폐 유통, 상공업 활동, 무역 등이 부진하였다. 정부가 화폐를 만들어 보급,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약간의 저화동전만이 삼베, 무명, 미곡과 함께 사용되었다.

[KH4 P.04-120 120] 16세기에 이르러 국가의 농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상공업에 대한 통제 정책은 해이해졌다. 이후 상공업에 대한 통제 체제가 무너져 가면서 국내 상공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의 농업 장려 정책

성세창이 아뢰기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살게 한 뒤에 교화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세종 임금이 농상(농업과 뽕나무심기)에 적극 힘쓴 까닭에 수령들이 사방을 돌면서 살피고 농상을 권하였으므로 경작하지 않은 땅이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백성 중에 힘써 농사짓는 사람이 없고, 수령도 들에 나가 농상을 권하지 않습니다. 감사 또한 권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방에 타일러 농상에 힘쓰도록 함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8도 관찰사에게 농상을 권하는 글을 내렸다. <중종실록>


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1) 경제 활동 - 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과전

관리들에게 준 토지로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과전법의 과전 분급 액수
과전법의 과전 분급 액수

[KH4 P.04-121 121] 조선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고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토지 제도를 운영하였다. 고려 후기 이래로 누적된 토지 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려 말에 만들어진 과전법은 국가의 재정 기반과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KH4 P.04-122 122]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KH4 P.04-123 123]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15세기 후반에는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KH4 P.04-124 124]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에 양반 관료들이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KH4 P.04-125 125] 이어서 16세기 중엽에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과전법의 시행

…… (전하께서) 국내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식구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를 회복하려 한 것인데, 당시 구가(舊家)ㆍ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온갖 방해를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뜻을 같이하는 2~3명의 대신과 함께 전 시대의 법을 강구하고 현실에 알맞은 것을 참작하여 국내의 토지를 측량하여 파악한 다음, 토지를 결수로 계산하여 그 중의 얼마를 상공정(上共田), 국용전(國用田), 군자전(軍資田), 문무역과전(文武役科田)으로 분배하고, 한량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자이거나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 향역(鄕驛)이나 도진(渡津)의 관리, 또는 서민과 공장(工匠)으로서 공역을 맡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토지를 분배해 주었다. <조선경국전>
개국 원종 공신 녹권 | 개국 원종 공신인 심지백에게 포상해 준 내용을 목활지로 인쇄해 준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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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 체제의 확립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1) 경제 활동 - 수취 체제의 확립]

세종의 전분6등법에서
1결의 토지크기


1등전: 2,986.6평
6등전: 11,946.4평
당시 1두(말)의 용량

대략 현재 1말(18리터)의 3분의 1정도이다.
정포 1의 크기

폭 32.8cm
길이 16m 38cm
저화 10장=포 1필
조선 시대의 조운로
조선 시대의 조운로

[KH4 P.04-126 126] 조선의 수취 제도는 토지에 부과하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납,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 등이 있다. 이것이 국가 재정의 토대를 이루었다.

[KH4 P.04-127 127] 조선 시대의 토지 소유자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인 지주들은 소작 농민에게 그 세금을 대신 내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KH4 P.04-128 128] 조세는 과전법의 경우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KH4 P.04-129 129] 조세는 쌀, 콩 등으로 냈다. 군현에서 거둔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으로 운반하였다가 전라도ㆍ충청도ㆍ황해도는 바닷길로,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고, 특히 평안도는 사신의 내왕이 잦은 곳이라서 그 지역의 조세는 군사비와 사신 접대비로 썼다.

[KH4 P.04-130 130] 공납은 고려처럼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호에게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공물의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거나 생산지의 변화로 인하여 납부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맞추기 어려우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입해다가 납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물은 전세보다 납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담도 훨씬 컸다.

[KH4 P.04-131 131] 한편,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군역과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교대로 근무하는 정군과, 정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이 있었다. 양반, 서리, 향리 등은 관청에서 일하기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다.

[KH4 P.04-132 132] 요역은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의 수를 고려하여 뽑아서 성, 왕릉, 저수지 등의 공사에 동원하였다. 성종 때 경작하는 토지 8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KH4 P.04-133 133] 국가 재정은 조세, 공물, 역 이외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 상인, 수공업자 등이 내는 세금으로 마련하였다. 국가는 재정을 군량미나 구휼미로 비축하고, 나머지는 왕실 경비, 공공 행사비, 관리의 녹봉, 군량미, 빈민 구제비, 의료비 등으로 지출하였다.

조선의 수취 제도

각 도의 수전(水田) · 한전(旱田)의 소출 다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공법(貢法)에서의 수세액을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부터는 전척(田尺)으로 측정한 매 1결에 대하여 상상(上上)의 수전에는 몇 석을 파종하고 한전에서는 무슨 곡종 몇 를 파종하여, 상상년에는 수전은 몇 석, 한전은 몇 석을 수확하며, 하하년에는 수전은 몇 석, 한전은 몇 석을 수확하는지, 하하(下下)의 수전에서는 역시 몇 두를 파종하고 한전에서는 무슨 곡종을 몇 두를 파종하여 상상년에는 수 · 한전 각기의 수확이 얼마며, 하하년에는 수ㆍ한전 각기의 수확이 얼마인지를, …… 각 관의 관둔전에 대해서도 과거 5년간의 파종 및 수확의 다소를 위와 같이 조사하여 보고토록 합니다. <세종실록>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녹봉 지급량

대략 정1품은 곡식 97석, 삼베21필, 저화 10장을, 종9품은 곡식 12석, 삼베 2필, 저화 1장을 받았다.
조선 전기 양반의 토지 소유 규모

조선 전기 양반의 토지 소유 규모대략 200~300 마지기 정도이나 2,000 마지기 이상의 소유자도 있었다. 대체로 논 한 마지기의 넓이는 200평이다.
노비 신공

노(남자)는 면포 1필, 저화 20장, 비(여자)는 면포 1필, 저화 10장이다.
양진당(경북안동) | 유성룡의 생가로, 하회 마을에 있는 양반 가옥이다.
양진당(경북안동) | 유성룡의 생가로, 하회 마을에 있는 양반 가옥이다.


양반 지주의 생활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 양반 지주의 생활]

[KH4 P.04-134 134] 양반의 경제 기반은 과전, 녹봉, 그리고 자신 소유의 토지와 노비 등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주였으며, 주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였다. 특히, 양반 소유의 토지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규모가 커서 농장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KH4 P.04-135 135] 양반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다. 그러나 토지의 규모가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으면 그 주변 농민들에게 생산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양반은 자기 토지가 있는 지역에 집과 창고를 지어 놓고 직접 노비를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하였지만, 대개 친족을 그 곳에 거주시키면서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만 파견하여 농장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KH4 P.04-136 136] 이런 농장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증가하였다. 농장주들은 유망민들을 모아 자신 소유의 노비처럼 만들어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KH4 P.04-137 137] 양반들은 재산의 한 형태로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 양반들은 10여 명에서 많게는 300여 명이 넘는 노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비를 구매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출산한 자녀는 노비가 되는 법에 따라 노비 수를 늘리기도 하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양인 남녀와 혼인을 시켜 늘리기도 하였다.

[KH4 P.04-138 138] 양반은 노비에게 가사 일을 돌보게 하거나 농경에 종사시키고 옷감을 짜게 하였다. 다수의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양반들은 이들 외거 노비에게 매년 신공으로 포와 돈을 거두었다.

[KH4 P.04-139 139] 이런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양반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농민 생활의 변화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 농민 생활의 변화]

[KH4 P.04-140 140] 조선 정부는 세력가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농업을 권장하였다. 농민들도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농민 생활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KH4 P.04-141 141] 정부는 개간을 장려하고, 각종 수리 시설을 보수 확충하는 등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양반들도 간이 수리 시설을 만들고,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는 등 농업에 관심이 높았다.

[KH4 P.04-142 142] 이 시기에 이르러 고려 시대의 농업 기술이 개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였다. 밭농사는 조ㆍ보리ㆍ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논농사도 남부 지방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모내기는 봄가뭄에 따른 수리 문제 때문에 남부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시비법도 발달하여 밑거름덧거름을 주게 되면서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지을 수 있었다. 쟁기, 낫, 호미 등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목화 재배도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약초와 과수 재배 등이 확대되었다.

[KH4 P.04-143 143] 이런 농업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농민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주제가 점차 확대되면서 농민들이 자연 재해, 고리대, 세금 부담 등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로 수확의 반 이상을 내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KH4 P.04-144 144]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자,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잡곡, 도토리, 나무 껍질 등을 가공하여 먹을 수 있는 구황 방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호패법, 오가작통법 등을 강화하여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주인 지방 양반들도 향약을 시행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조선 전기 여러 가지 농기구류
조선 전기 여러 가지 농기구류


수공업 생산 활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 수공업 생산 활동]

조선 초 공장(수공업자)의 수

- 경공장: 2,800여 명
- 외공장: 3,500여 명

[KH4 P.04-145 145] 조선은 고려보다 관영 수공업 체제를 잘 정비하였다. 전문적인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소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관장)들은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이들은 근무하는 동안에 식비 정도만 지급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고 판매하여 가계를 꾸렸다. 이 기술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관영 수공업은 16세기에 들어와 부역제가 해이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KH4 P.04-146 146] 관영 수공업자 이외에 민영 수공업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농민들을 상대로 농기구 등의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양반의 사치품도 생산하였다. 이 밖에, 농가에서 자급자족의 형태로 생활 필수품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이 있었다. 의류로서 무명, 명주, 모시, 삼베 등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목화 재배가 확대 보급되면서 무명 생산이 점차 증가하였다.



상업 활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 상업 활동]

[KH4 P.04-147 147]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KH4 P.04-148 148]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보부상들이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판매하여 유통시켰다.

[KH4 P.04-149 149] 한편,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KH4 P.04-150 150]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명과는 사신들이 왕래할 때 하는 공무역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하였고,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하였다. 그러나 국경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역은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거래된 물화는 무명과 식량이었다.

조선 전기의 상업

○ 장사꾼이 의복 등속을 판매하며, 심지어는 신ㆍ갓끈ㆍ빗ㆍ마늘ㆍ분(粉) 같은 물품을 가지고, 무지한 백성에게 교묘하게 말하여 미리 그 값을 정하고 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그 값을 독촉해서 받는다. <세종실록>

○ 경인년(1470년) 흉년 때 전라도 백성들이 서로 모여들어 점포를 열어 장문(場門: 시장)이라 칭하고,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였다. <성종실록>

○ 임진왜란 이후 백성들은 정해진 곳 없이 교역으로 생활하는 것이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 각 읍에서 장시가 서는 것이 적어도 3 ~ 4곳이 되어 …… 한 달 30일 이내에 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 없다. <선조실록>
장시의 발달

농촌 시장인 장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부정기적으로 주현시(州縣市)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시는 이로부터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전라도 무안, 나주 등지의 사람들은 큰 흉년을 맞아 스스로 한 달에 두 번 읍내 거리에 시장을 열고 필요한 물건들을 교역하면서 이를 장문(場門)이라고 불렀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교환하여 생계를 도모하였다.

15세기 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해안 지역의 농토 개간이 완료되고 농업 생산력이 현저히 발달 하였다. 특히, 넓은 나주 평야를 끼고 있으며 서해안에 인접한 나주와 무안 지역은 다양한 물품이 생산되고, 생산자들이 이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시는 점차 삼남 전 지역과 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었고, 출현할 당시 15일이나 10일 간격이던 개시일도 점차 5일 간격으로 조정되었다. 이러한 장시 확산 추세는 18세기에 더욱 두드러져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전국의 장시 수효가 1,000여 곳에 달하게 되었다.

장시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과 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였다. 이들은 먼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상을 통하는 것 보다, 장시에서 싼 값에 사고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장시는 몇 개 촌락의 주민이 하루에 왕복하여 교역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30~40리의 거리를 두고 확산되었으며, 장시의 번성으로 행상들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 행상들은 꽁무니에 짚신 켤레를 매고 이 장 저 장 돌아다니고, 장이 파한 후에는 다음 날 다른 장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생활을 하였다.

다음 민요는 이렇게 장시를 돌아다니는 행상들의 생활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짚신에 감발 치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 차고 이고 지고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
목소리 높여 고래고래 지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쳐 가며
돌도부 장사하고 해질 무렵
손잡고 인사하고 돌아서네.
다음 날 저 장에서 다시 보세.


수취 제도의 문란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3. 근세의 경제 - 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 수취 제도의 문란]

[KH4 P.04-151 151] 16세기에 이르러 수취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폐단이 심해지면서 몰락하는 농민이 증가하였다.

[KH4 P.04-152 152] 공납에서는 중앙 관청의 서리들이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많이 챙기는 방납이라는 폐단이 나타났다. 방납이 증가할수록 농민의 부담도 증가하였다. 공물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이 도망을 하면 그 지역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대신 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유망 농민이 급증하였다.

[KH4 P.04-153 153]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공납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는 수령도 나타났고, 이이와 유성룡 등은 공물을 쌀로 거두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군적(육군) 박물관 소장 | 호적을 근거로 만든 군역 동원 장부이다.
군적(육군) 박물관 소장 | 호적을 근거로 만든 군역 동원 장부이다.

[KH4 P.04-154 154] 또, 농민 생활이 점차 어려워지고 요역 동원으로 농사에 지장을 가져오자, 농민들이 요역 동원을 기피하였다. 이에 농민 대신에 군인들을 왕릉 축조, 성곽 보수 등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들도 이런 힘든 군역을 기피하였다.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KH4 P.04-155 155] 그러나 군포 부담의 과중과 군역 기피 현상으로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적도 부실해졌다. 각 군현에서는 정해진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 부족한 군포를 부담시키자 남아 있는 농민도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KH4 P.04-156 156] 환곡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곤궁한 농민에게 곡물을 빌려 주고 10분의 1 정도의 이자를 거두는 제도였다. 그러나 지방 수령과 향리들은 정한 이자보다 많이 거두어 사적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KH4 P.04-157 157] 이런 변화 과정에서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각 지방에서 유민이 증가하였다. 유민들 중 일부는 도적이 되어 양반들과 중앙 정부로 바치는 물품을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들이 도성에까지 출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6세기 농민들의 처지

○ 백성으로 농지를 가진 자가 없고 농지를 가진 자는 오직 부유한 상인들과 사족(士族)들의 집뿐입니다. <중종실록>

○ 근래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공공연하게 노략질을 하며 양민을 죽이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여도 주현에서 막지 못하고 병사(兵使)도 잡지 못하니, 그 형세가 점점 커져서 여러 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떼로 일어나 빈집에 진을 치고 밤이면 모였다가 새벽이면 흩어지고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명종실록>

○ 지방에서 토산물을 공물로 바칠 때 (중앙 관청의 서리들이) 공납을 일체 막고 본래 값의 백배가 되지 않으면 받지도 않습니다.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여 세금을 못 내고 도망하는 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선조실록>
심화과정: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의 변화

과전법은 고려 말 전제 개혁을 마무리한 토지 제도의 근간이다. 이 법에는 토지를 나누어 주는 규정, 조세의 규정, 땅 주인과 소작인에 대한 규정, 토지 관리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과전법은 고려 말 세금을 내지 않던 농장에 대하여 과세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켰다. 이 법에서 토지를 나누어 주는 주요 대상은 왕실을 비롯하여 국가 기관, 지방 관부, 공공 기관, 관료, 벼슬이 없는 관인, 이(吏) 등이었으나, 사전 재분배의 중심이 된 것은 관료에게 나누어 준 과전이었다. 과전법은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고, 10분의 1조를 공정하게 하며 병작반수를 금하였다. 과전법에서는 과전의 지급을 경기도에 있는 토지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1417년(태종 17) 과전의 3분의 1을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옮겨 나누어 주었고, 1431년(세종 13) 이것을 경기도로 환급함과 아울러 새로운 토지 분급법이 재정되었다. 이 결과, 과전의 수가 감소하였다. 이후 과전법은 유지가 어려워 폐지되고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과전법이 현직 관료와 퇴직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하던 것과는 달리, 직전법은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또, 관료의 유가족에게 나누어 주던 수신전, 휼양전이 폐지되었다.
  1. 과전법과 직전법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자.
  2.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바뀐 이유를 설명해 보자.
심화과정: 성리학적 경제관

○ 검소한 것은 덕(德)이 함께 하는 것이며, 사치는 악(惡)의 큰 것이니, 사치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농사와 양잠은 의식(依食)의 근본이니, 왕도 정치에서 우선이 되는 것이다.

○ 우리나라에는 이전에 공상(工商)에 관한 제도가 없어, 백성들 중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줄어들었으며, 말작(末作: 상업)이 발달하고 본실(本實: 농업)이 피폐하였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경국전
  1. 성리학적 경제관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2. 성리학적 경제관이 당시 산업 정책에 미친 영향을 정리해 보자.


4. 경제 상황의 변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KH4 P.04-158 158]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경제면에서 변화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그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근대 경제로 넘어가는 준비 과정이었다.

[KH4 P.04-159 159] 서민들은 점차 경제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삶의 자세를 바꾸어 갔다. 농민들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는 등 새로운 영농 방법을 추구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리려 하였다. 상인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도 출현하였다.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 활동을 주도하여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상공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상업 도시가 출현할 수 있었다.



1) 수취 체제의 개편



농촌 사회의 동요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1) 수취 체제의 개편 - 농촌 사회의 동요]

[KH4 P.04-160 160]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KH4 P.04-161 161]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하여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전세의 정액화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1) 수취 체제의 개편 - 전세의 정액화]

[KH4 P.04-162 162] 양 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토지 제도의 문란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전국의 토지 결수는 150만 결이었는데, 직후에는 30여만 결로 크게 줄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권장하면서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또, 전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도 서둘렀다. 이것은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빠진 토지를 찾아 내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KH4 P.04-163 163] 이런 정책으로는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줄여 주는 정책을 기대하였다. 이에 정부는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고 한다(1635).

[KH4 P.04-164 164] 이러한 개편으로 전세의 비율이 이전보다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났다. 전세를 납부할 때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 비용 등이 함께 부과되었기 때문인데, 그 액수가 전세액보다 훨씬 많아 때로는 전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전국의 토지 면적
조선 시대 전국의 토지 면적


공납의 전세화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1) 수취 체제의 개편 - 공납의 전세화]

[KH4 P.04-165 165] 당시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던 것은 공납이었다. 특히, 방납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의 토지 이탈은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결과이지만, 일종의 조세 저항이기도 하였다.

[KH4 P.04-166 166]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결국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고, 이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대동법은 농민 집집마다에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였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KH4 P.04-167 167] 따라서, 농민들은 대체로 토지 1결당 미곡 12두만을 납부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게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공물 부담은 없어지거나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KH4 P.04-168 168]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들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농민들도 대동세를 내기 위하여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쌀, 베, 돈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KH4 P.04-169 169] 그러나 이후 대동법의 운영 과정에서 폐단이 다시 나타나게 되면서 농민들은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1) 수취 체제의 개편 - 균역법의 시행]

[KH4 P.04-170 170]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KH4 P.04-171 171] 또,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 또는 3필 등으로 달랐다.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릴 수밖에 없었다.

[KH4 P.04-172 172]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들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농민들이 군역 부과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이로부터 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선무군관(選武軍官)

군포 1필을 납부하는 선무군관은 양반층이 아니면서 양반 행세를 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지방의 토호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KH4 P.04-173 173]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선박세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KH4 P.04-174 174] 군포 부담이 줄어들자, 농민들의 군역 부과에 대한 저항도 다소 진정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군적 문란이 다시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2) 서민 경제의 발전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2) 서민 경제의 발전 -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KH4 P.04-175 175] 양반들은 양 난 이후 토지 개간에 주력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를 사들여 소유한 농토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 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경영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KH4 P.04-176 176]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 갔다. 양반들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이며 경제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마음대로 강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소작인의 저항이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낮추거나 일정액으로 정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 관계보다 경제적인 관계로 바뀌어 갔다.

[KH4 P.04-177 177] 대체로 양반들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이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장에 팔아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 토지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토지 매입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지주들도 나타났다.

[KH4 P.04-178 178] 양반 중에는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을 대거나 고리대를 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변동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양반도 나타났다.

18세기 황씨 가문의 토지 집적과 추수기(충남 부여)
18세기 황씨 가문의 토지 집적과 추수기(충남 부여)


농민 경제의 변화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2) 서민 경제의 발전 - 농민 경제의 변화]

[KH4 P.04-179 179] 정부가 수취 체제를 조정함에 따라 농촌 사회의 동요는 18세기에 이르러 다소 진정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수취 체제의 개편은 궁극적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농촌 사회의 안정을 달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KH4 P.04-180 180] 이에 농민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스스로가 해결해야 했다. 농민들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다.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더구나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

광작(廣作)

모내기법으로 제초 노동력이 절약되어 한 농가에서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현상이다.
지대(소작료)의 형태

- 타조법: 일정 비율로 소작료를 내는 방식이다.
- 도조법: 일정 액수를 소작료로 내는 방식으로, 점차 화폐로 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KH4 P.04-181 181] 농민들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KH4 P.04-182 182]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들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KH4 P.04-183 183] 소작 농민들은 좀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수확량의 반이나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내게 되면서 근면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점차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KH4 P.04-184 184] 그러나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여 늘려 갔다. 이런 현상은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토지를 잃은 농민은 농촌을 떠나야만 하였다.

[KH4 P.04-185 185]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시키고 일부 농토만 직접 경영하던 지주들도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들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농민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농촌에 그대로 머물러 있더라도 품팔이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하였다.

[KH4 P.04-186 186] 농촌을 떠난 다수의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일부 농민은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다.

19세기 초의 도별 저수지 수
19세기 초의 도별 저수지 수
상품 작물의 재배

농민들이 밭에 심는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모시, 오이, 배추, 도라지 등의 농사도 잘 지으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도회지 주변에는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 등이 많다. 특히 서도 지방의 담배밭, 북도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에서의 수확은 모두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그 이익의 10배에 이른다. <경세유표>


민영 수공업의 발달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2) 서민 경제의 발전 - 민영 수공업의 발달]

대장간(김홍도)
대장간(김홍도)

[KH4 P.04-187 187]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는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여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KH4 P.04-188 188] 종래의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면서 발달하고 있었던 민영 수공업이 증가하는 수요를 거의 충족시켰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과 비교할 때 경쟁력도 높았다.

[KH4 P.04-189 189]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은 흔히 점(店)으로 불려져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다. 판매를 위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민영 수공업은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였지만, 점차 농촌에서도 나타났다.

[KH4 P.04-190 190] 농촌의 수공업은 지금까지 자급자족을 위한 부업의 형태로 제조하였으나, 점차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었고, 더 나아가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도 나타났다. 농촌에서는 주로 옷감과 그릇 종류가 생산되었다.

[KH4 P.04-191 191] 그런데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다. 대부분 공인이나 상인들에게 주문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서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공업자들은 상업 자본에 예속되었다. 특히 종이, 화폐, 철물 등의 제조 분야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KH4 P.04-192 192]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민영 광산의 증가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2) 서민 경제의 발전 - 민영 광산의 증가]

[KH4 P.04-193 193]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다. 그런데 17세기에 이르러 허가를 받은 민간인에게 정부의 감독 아래 광물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민간인의 광물 채굴이 어느 정도 가능하였으나, 활발하지는 않았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가의 감독을 받지 않고 민간인이 광물을 자유롭게 채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민간인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덕대(德大)

광산의 주인과 계약을 맺고 광물을 채굴하여 광산을 경영하는 사람

[KH4 P.04-194 194] 민영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그 원료인 광물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면서 금, 은, 구리 등의 채굴을 촉진시켰다. 특히,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이 채굴과 제련이 쉬운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의 개발도 활발해졌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몰래 채굴하는 이른바 잠채도 성행하였다.

[KH4 P.04-195 195]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 광산촌의 모습

황해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수안에는 본래 금광이 다섯 곳이 있었다. 두 곳은 금맥이 다하였고, 세 곳만 금맥이 풍성하였다, 그런데 지난해 장마가 심해 작업이 중지되어 광군들이 대부분 흩어졌다. 금년(1799) 여름 새로이 39개소의 금혈을 팠는데, 550여 명의 광군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부가 도내의 무뢰배들이지만, 대부분은 사방에서 이득을 쫓아 몰려온 무리들이다. 그리하여 금점 앞에는 700여 채의 초막이 세워졌고, 광군과 그 가족, 좌고, 행상, 객주 등 인구도 1,500여 명에 이른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곳에서는 생필품의 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변사 등록>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사상의 대두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사상의 대두]

[KH4 P.04-196 196]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도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널리 확산된 부세소작료금납화는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보다 촉진시켰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인구의 자연 증가뿐만 아니라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에서 유리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업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보부상(褓負商)

부상이란 나무 그릇, 토기 등의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등짐장수를 말한다. 보상은 비교적 값비싼 필묵, 금ㆍ은ㆍ동제품 등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봇짐장수를 가리킨다.

[KH4 P.04-197 197]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처음에는 공인들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KH4 P.04-198 198]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들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KH4 P.04-199 199]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장시의 발달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장시의 발달]

[KH4 P.04-200 200]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하였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KH4 P.04-201 201] 장시는 지방민들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ㆍ수공업자ㆍ상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농민들은 행상에게 물건을 파는 것보다 장시를 이용하면 필요한 물건을 좀 더 싸게 구입하고, 가진 물건은 비싸게 팔 수 있어 이를 이용하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였다.

[KH4 P.04-202 202] 18세기 말의 장시 중에서 광주의 송파장, 은진의 강경장, 덕원의 원산장, 창원의 마산포장 등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KH4 P.04-203 203]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일정 지역 안이나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단결을 굳게 하기 위하여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도고(道賈)의 활동

그 (허생)는 안성의 한 주막에 자리잡고서 밤, 대추, 감, 배, 귤 등의 과일을 모두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도거리로 사 두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과일값은 크게 폭등하였다. 허생은 이에 10배의 값으로 과일을 되팔았다. 이어서 허생은 그 돈으로 곧 칼, 호미, 삼베, 명주 등을 사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가서 말총을 모두 사들였다. 말총은 망건의 재료였다. 얼마 되지 않아 망건값이 10배나 올랐다. 이렇게 하여 허생은 50만냥에 이르는 큰 돈을 벌었다. <연암집, 허생전>
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장터길(김홍도)
장터길(김홍도)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

[KH4 P.04-204 204] 조선 후기에 상업 중심지로서 새로이 성장한 곳이 포구이다. 포구에서의 상거래는 장시에서의 그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KH4 P.04-205 205] 도로와 수레가 발달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물화의 대부분이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하여 운송되었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연해안이나 큰 강 유역에는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는 포구 간에 또는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면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KH4 P.04-206 206] 그 후 선상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전국 각지의 포구가 하나의 유통권을 형성하여 갔다. 특히, 칠성포, 강경포, 원산포 등의 포구에서는 장시가 열리기도 하였다. 포구를 거점으로 상행위를 하는 상인으로는 선상, 객주, 여각 등이 있었다.

[KH4 P.04-207 207]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 상인이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KH4 P.04-208 208] 한편, 객주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들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포구 상업

우리나라는 동ㆍ서ㆍ남의 3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배에 물건을 싣고 오가면서 장사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포, 영광의 법성포, 흥덕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은 비록 작은 강이나 모두 바닷물이 통하므로 장삿배가 모인다.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는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바닷가 사람들과 내륙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서 서로의 물건을 교역한다. 매년 봄, 여름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포구에 줄을 서고 있다. <택리지>



중계 무역의 발달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중계 무역의 발달]

개시(開市)

조선 후기 중국, 일본 등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으로 압록강 하류에서 열리는 중강 개시와 함경도의 회령 개시 및 경원 개시, 동래의 왜관 개시 등이 열렸다.
후시(後市)

조선 후기 사상(私商)들이 전개한 밀무역으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중구의 회동관에서 이루어진 회동관 후시, 중강에서 이루어진 중강 후시, 의주 맞은편의 책문(柵門)에서 이루어진 책문 후시가 대표적이다. 또, 함경도 경원 등에서 야인들과 거래한 북관 후시, 부산 등의 왜관에서 왜인들과 거래한 왜관 후시가 있었다.

[KH4 P.04-209 209]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기를 띠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다.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ㆍ약재ㆍ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ㆍ종이ㆍ무명ㆍ인삼 등이었다.

[KH4 P.04-210 210]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인삼, 쌀, 무명 등을 팔고,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주는 중계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KH4 P.04-211 211]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상인들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들은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이었으며,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화폐 유통


[한국사: IV.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4. 경제 상황의 변동 -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화폐 유통]

상평통보
상평통보

[KH4 P.04-212 212]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정부도 화폐의 유통에 힘써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KH4 P.04-213 213] 이 시기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동전의 원료인 구리는 18세기 후반부터 동광의 개발이 활발히 추진되어 공급이 쉬워졌다. 정부도 각 기관으로 하여금 동전의 발행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동전 발행에 대한 통제가 해이해지면서 사적으로 주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KH4 P.04-214 214]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이 나타났다. 이는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KH4 P.04-215 215]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신용 화폐가 점차 보급되어 갔다. 동전은 곡물이나 옷감에 비하여 간편하기는 하였지만 그 중량 때문에 대규모의 상거래에서는 불편하였다. 이에 , 어음 등의 신용 화폐가 이용되었다. 이는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과 상업 자본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심화과정: 상품 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①  부농층은 땅이 넓어서 빈민을 농업 노동에 고용함으로써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향락을 누릴 수 있으며, 빈농층 가운데 어떤 농민은 지주의 농지를 빌려 경작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 가운데 어떤 자는 농지를 얻을 수가 없으므로 임노동자가 되어 타인에게 고용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것도 할 수 없는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유리걸식하게 된다. <농포문답>

②  방짜 유기를 생산하는 제조장의 노동자 구성
주물 공정: 곁대장[鑄物夫] 1명, 발풍구 1명
압연 공정: 대장 1명, 앞망치(제1망치군) 1명, 겉망치(제2망치군) 1명, 제망치(제3망치군) 1명, 네핌가질(압연 선반군) 1명, 네핌앞망치(연연망치군) 1명, 안풍구(숙련 풍구 책임자) 1명
선반 공정: 가질(선반공) 2명

③  조정에서 은이 나는 곳에 은점 설치를 허가만 내주면 돈 많은 장사꾼은 각자 재물을 내어 일꾼을 모집할 것입니다. 땅이 없어 농사짓지 못하는 백성들은 점민이 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곳에 모여 살며 은을 캐어 호조와 각 영, 고을에 세를 바치고, 남는 대로 물주에게 돌릴 것입니다. 땅 없는 백성들도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나갈 수 있으니 공사 간에 유익한 일입니다. 어찌 백성들에게 폐가 되겠습니까? <경제야언>

④  근래 소민이 견디기 힘든 폐단은 도고입니다. 도고라는 것은 물화를 모두 모아 그 이익을 독점하는 것으로 백 가지 물종이 다 한 곳으로 귀속되니 다른 사람들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영조실록>
  1. 위의 자료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을 다른 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비교해 보자.
  2. 위의 자료를 읽고, 각 산업 분야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의 싹을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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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30 20:18: KSY Version 1.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