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분류: 한국사/교과서
지은이: 국사전자교과서/편집: K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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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1. 고대의 정치
        1) 고대의 세계
        2) 고대 국가의 성립
            고대 국가의 성격
            삼국의 성립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삼국의 정치적 발전
            삼국간의 항쟁
            삼국의 통치 체제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고구려와 수ㆍ당의 전쟁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신라의 삼국 통일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통일 신라의 발전
            발해의 건국과 발전
            남북국의 통치 체제
            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후삼국의 성립
    2. 중세의 정치
        1) 중세의 세계
        2)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태조의 정책
            광종의 개혁 정치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3) 통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조직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군역제도와 군사 조직
            관리 등용 제도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무신 정권의 성립
        5) 대외 관계의 전개
            거란의 침입과 격퇴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거란족의 토벌과 몽고와의 전쟁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원의 내정 간섭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의 멸망
    3. 근세의 정치
        1) 근세의 세계
        2) 근세 사회의 성립
            조선의 건국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유교 정치의 실현 노력
            문물 제도의 정비
        3) 통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체제
            지방 행정 조직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관리 등용 제도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훈구와 사림
            사림의 정치적 성장
            붕당의 출현
            붕당 정치의 전개
            붕당 정치의 성격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의 관계
            여진과의 관계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관계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왜군의 침략
            수군과 의병의 승리
            전란의 극복과 영향
            광해군의 중립 외교
            호란의 발발과 전개
            북벌 운동의 전개
    4. 정치 상황의 변동
        1) 근대의 세계
        2) 통치 체제의 변화
            정치 구조의 변화
            군사 제도의 변화
            수취 제도의 개편
        3) 정쟁의 격화와 탕평 정치
            붕당 정치의 변질
            탕평론의 대두
            영조의 탕평 정치
            정조의 탕평 정치
        4) 정치 질서의 변화
            세도 정치의 전개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세도 정치의 폐단
        5) 대외 관계의 변화
            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
경복궁 근정전(서울 종로)

[KH3 P.03-01 001] 정치사란 국가와 사회의 운영을 둘러싸고 벌이는 정치 활동의 역사이다.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 세력, 정치 세력이 활동하는 틀인 정치 구조, 그들이 정국을 운영해 나가는 구체적인 실상인 정치 운영, 그 운영의 논리인 정치 운영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 정치 활동의 고리가 되는 권력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정치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시기별로 정치 세력의 존재 형태와 성격, 통치 체제의 정비와 운영, 각 시대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한 정국의 운영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KH3 P.03-02 002] 아울러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정치 활동은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해 온 과정이고, 통치 구조의 변화 과정도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노력한 결과로 나타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1. 고대의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KH3 P.03-03 003] 고대 국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정 체제였다. 왕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어 전제화되었고, 귀족들은 왕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귀족들은 원래 부족 사회족장 출신으로서 소수의 혈연적 특권 계층이고 매우 폐쇄적인 신분이었으므로, 지방 세력이나 다른 세력이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KH3 P.03-04 004] 따라서, 그들이 조직한 통치 체제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아직 관직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고, 행정 업무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국의 운영도 합리성이 부족했고, 힘의 논리가 더 작용하였다. 특히, 영토 확장을 위하여 주변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므로 군사력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1) 고대의 세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1) 고대의 세계]

[KH3 P.03-05 005]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 중국은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다. 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KH3 P.03-06 006] 진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고, 뒤를 이은 한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서역과 교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여 유교주의적 중국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KH3 P.03-07 007] 3세기 초 후한이 멸망한 뒤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삼국 시대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다. 이 때, 양쯔 강 이남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문벌 귀족이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불교가 융성하는 등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4~5세기의 세계
4~5세기의 세계

[KH3 P.03-08 008] 6세기 말에 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끝에 멸망하고, 7세기에 당이 건국되었다. 에서 발달한 한자, 유교, 불교, 율령 체제 등은 우리나라,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루었다.

[KH3 P.03-09 009] 한편, 인도에는 아리아 인이 남하하여 철기 문화를 보급하고, 브라만교와 카스트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어 브라만교에 반대하고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성립하였다. 마우리아 왕조 때 정리된 소승 불교는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쿠샨 왕조 때에 성립한 대승 불교간다라 미술과 함께 중국, 우리나라, 일본으로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교가 성립되고, 인도의 고전 문화가 완성되어 인도 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4~5세기의 세계
4~5세기의 세계

[KH3 P.03-10 010]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강력한 전제 국가가 발전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번성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였다. 7세기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이슬람교를 창시하여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되어 갔다.

[KH3 P.03-11 011] 서양에서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발전하여 서양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

[KH3 P.03-12 012] 그리스는 아테네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에서는 시민 중심의 민주 정치가 발전했고, 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가 몰락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하였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4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각지에 국가를 세우고 정착하였다.

[KH3 P.03-13 013] 로마는 기원전 3세기 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혼란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 제정이 성립되어 약 20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2세기 말경부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고, 사회ㆍ경제 기반도 흔들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4세기 말에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395).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하고(476),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4~5세기의 세계
4~5세기의 세계

[KH3 P.03-14 014]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 등을 종합하여 서양 고대 문화를 완성하였으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특성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법률이 발전하여 로마법이 성립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 종교로 성장한 크리스트교는 로마 문화에 계승된 그리스의 인간 중심 사상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조류가 되었다.



2) 고대 국가의 성립



고대 국가의 성격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2) 고대 국가의 성립 - 고대 국가의 성격]

삼국의 건국 순서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차례로 건국되었다고 하였으나,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은 일찍부터 중국 문화와 접촉한 고구려가 제일 이르다.

[KH3 P.03-15 015]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들은 그 중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KH3 P.03-16 016] 이러한 고대 국가로의 발전 과정은 선진 문화의 수용이나 지리적 위치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고대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가야는 삼국의 각축 속에서 중앙 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채 연맹이 해체되어 신라와 백제에 흡수되었다.



삼국의 성립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2) 고대 국가의 성립 - 삼국의 성립]

국내성 터(중국 길림성 집안) | 국내성은 초기 고구려의 수도이다.
국내성 터(중국 길림성 집안) | 국내성은 초기 고구려의 수도이다.
백제의 건국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알려진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하남 위례성에 정착한 후 마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
전기 가야 연맹
금관가야의 덧널무덤(경남 김해 대성동)
금관가야의 덧널무덤
(경남 김해 대성동)

[KH3 P.03-17 017]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들은 5부 체제로 발전하였다.

[KH3 P.03-18 018]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KH3 P.03-19 019]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B.C.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KH3 P.03-20 020]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KH3 P.03-21 021]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이 되었다(B.C.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 석 ·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KH3 P.03-22 022]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KH3 P.03-23 023] 내물왕 때에는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KH3 P.03-24 024] 한편,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어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 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다.

[KH3 P.03-25 025]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낙랑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

[KH3 P.03-26 026]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 연맹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 ~ 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신라의 발전과 왕호 변천

신라에서는 왕의 칭호가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泥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이런 변화는 신라의 발전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즉, 정치적 군장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리되면서 거서간과 차차웅으로 그 칭호가 나누어지게 되었고, 박 · 석 · 김의 3부족이 연맹하여 그 연맹장을 3부족에서 교대로 선출할 때에 연맹장이라는 의미에서 이사금을 칭하였다. 이후 김씨가 왕위 세습권을 독점하게 되면서 그 왕권의 강화를 표시하기 위해 대군장이라는 의미의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그 뒤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고, 이어 6부를 개편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면서 마립간 대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호우명 그릇 |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바닥에
호우명 그릇 |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바닥에 "을묘년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乙卯年國岡上 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삼국의 정치적 발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 삼국의 정치적 발전]

4세기 고구려의 위기

고국원왕 때 고구려는 전연요동 지방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큰 타격을 받아 서방 진출이 위축되었다. 이어 백제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왕이 평양성에서 전사하였다.

[KH3 P.03-27 027]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별로 흩어져 있던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전연과 백제의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KH3 P.03-28 028] 소수림왕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 체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은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4세기 백제의 발전
4세기 백제의 발전

[KH3 P.03-29 029]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KH3 P.03-30 030]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KH3 P.03-31 031]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백제의 해외 진출

○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 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晉代)에 구려(句麗: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 · 진평의 두 군을 차지하였다. <통전>

[KH3 P.03-32 032] 한편, 신라는 내물왕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국호 신라의 의미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이다.

[KH3 P.03-33 033]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KH3 P.03-34 034] 이어 법흥왕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삼국간의 항쟁

5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세력 판도
5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세력 판도
성왕의 체제 정비

성왕은 중앙관청을 22부로 확대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다.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 삼국간의 항쟁]

[KH3 P.03-35 035]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 · 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KH3 P.03-36 036]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고구려의 왜 격퇴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하였다. …… 10년(400) 경자에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

[KH3 P.03-37 037]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KH3 P.03-38 038]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KH3 P.03-39 039] 다음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KH3 P.03-40 040]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KH3 P.03-41 041]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탁본(서울 대학교 박물관 소장)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탁본(서울 대학교 박물관 소장)
신라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신라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가야의 금관 |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
가야의 금관 |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

[KH3 P.03-42 042]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동안 후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KH3 P.03-43 043]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삼국의 통치 체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 삼국의 통치 체제]

귀족 회의체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가 대표적인 귀족 회의체이다.

[KH3 P.03-44 044]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들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들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의 결정은 각 부의 귀족들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하였다.

백제의 정사암 회의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후보 3~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 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정사암(政事巖)이라 하였다.<삼국유사>

[KH3 P.03-45 045]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들과 그 밑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KH3 P.03-46 046] 고구려는 4세기경에 각 부의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0여 관등을 두었고,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미 6좌평제16관등제의 기본틀을 마련하였다. 신라도 법흥왕 때 각 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7관등제를 완비하였다.

[KH3 P.03-47 047]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관등제의 의미

관등제는 관리들의 등급을 정한 것으로, 종래의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 집단이 왕 아래에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상하 관계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초기부터 국가 권력을 독점하던 각 집단의 최고 귀족들이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항구적으로 보장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KH3 P.03-48 048] 삼국에는 왕 아래에 여러 관청을 두었는데, 고구려의 대대로(또는 막리지), 백제의 좌평은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이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6좌평 제도를 두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훨씬 정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집사부 등의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지방 통치

삼국은 외형상 중국의 군현제도와 유사한 지방 조직을 설치했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의 수가 많지 않아서 주요 거점만을 지배하는 데 그쳤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를 허용하여 간접적으로 주민을 지배하였다.

[KH3 P.03-49 049]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는 강력하게 미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KH3 P.03-50 050]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촌주는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촌락 내의 행정과 군사 실무의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KH3 P.03-51 051]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고구려와 수ㆍ당의 전쟁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 고구려와 수ㆍ당의 전쟁]

천리장성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47년(보장왕 6)에 16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성으로 북쪽의 부여성(농안)에서 남쪽의 비사성(대련)에 이른다. 연개소문은 이 성곽 축조를 감독하면서 요동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여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백암성(중국 요령성 등탑) | 랴오허 강 유역에 있는 성으로, 고구려와 당의 전쟁 때 주요한 싸움터였다.
백암성(중국 요령성 등탑) |
랴오허 강 유역에 있는 성으로, 고구려와 당의 전쟁 때 주요한 싸움터였다.

[KH3 P.03-52 052]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연결하고, 남으로 백제 ·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KH3 P.03-53 053] 수의 압박으로 돌궐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양제는 잇따라 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략해 왔다. 고구려는 병력 규모는 작았으나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냈고, 양제의 침입 때에는 을지문덕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12). 이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

[KH3 P.03-54 054] 수의 뒤를 이은 은 건국 초에는 유화 정책을 취했으나 곧이어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왔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 지방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은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내적으로 독재 정치를 단행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에 대하여 강경 정책을 추진하였다.

[KH3 P.03-55 055] 이에 당의 태종은 직접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동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다. 당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요동성, 개모성, 비사성 등을 빼앗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645). 안시성에서 군민이 합심하여 60여 일간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이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는 대대적인 반격을 펼쳐 마침내 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쳐 당의 동북아시아 지배 야욕을 좌절시켰다.

[KH3 P.03-56 056] 고구려가 수 · 당과 싸워 이겨 그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의 국가 보위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KH3 P.03-57 057] 고구려가 수 · 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KH3 P.03-58 058]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당과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하려 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당도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나 · 당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KH3 P.03-59 059]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뒤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주류성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 운동 근거지로서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임존성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성으로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있다.

[KH3 P.03-60 060]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 · 당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

[KH3 P.03-61 061]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요동 지방의 국경 방어선도 점차 무너졌다.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민심이 떠나고 있었으며, 연개소문이 죽은 뒤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KH3 P.03-62 062]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뒤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7세기 말에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고구려의 전통은 계승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운동 세력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운동 세력
나 · 당 전쟁의 전개
나 · 당 전쟁의 전개
나 · 당 전쟁의 전개


신라의 삼국 통일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 신라의 삼국 통일]

[KH3 P.03-63 063]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KH3 P.03-64 064]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 · 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 냈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KH3 P.03-65 065]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이용하였다는 점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신라의 삼국 통일은 의의가 있다.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통일 신라의 발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통일 신라의 발전]

[KH3 P.03-66 066] 통일 이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으며,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시중

경덕왕 때까지는 중시라고 하였으나 그 뒤에 시중으로 바뀌었다.
김흠돌의 모역 사건

신문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많은 귀족들이 관련되어 있어서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행해졌고, 이를 계기로 왕권이 전제화되었다.

[KH3 P.03-67 067] 통일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KH3 P.03-68 068]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KH3 P.03-69 069]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 김씨 왕족은 왕권 옹호 세력으로 변질되고, 박씨 세력이나 가야 및 고구려계 귀족은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KH3 P.03-70 070] 이렇게 확립된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녹읍이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중앙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사치 생활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발해의 건국과 발전]

[KH3 P.03-71 071]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당은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당에 포로로 잡혀 있던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임명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민족 분열 정책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의 동족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KH3 P.03-72 072]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의 영역
발해의 영역

[KH3 P.03-73 073]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그런데 그 영역에는 고구려 유민과 원래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KH3 P.03-74 074]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돌궐 ·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발해와 신라의 교통로

발해의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를 신라도라 한다. 8세기 전반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나 자주 이용된 것은 8세기 후반 이후 9세기 전반까지이다.

[KH3 P.03-75 075]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 지배층의 내분으로 한때 국력이 약화되었다.

[KH3 P.03-76 076] 발해가 다시 중흥한 것은 9세기 전반의 선왕 때부터이다. 발해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지방 제도를 완비하였다. 당시 중국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KH3 P.03-77 077]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결국 2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오던 발해는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이후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마저 실패함으로써 그 동안 우리 민족의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남북국의 통치 체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남북국의 통치 체제]

신라의 9주 5소경
신라의 9주 5소경

[KH3 P.03-78 078]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통일 신라의 중앙 행정

통일 신라에는 위화부(이부), 조부창부(호부), 예부, 병부, 좌 · 우 이방부(형부), 예작부(공부) 등이 있어 중국의 6전 제도와 비슷하게 행정을 분담하였다.

[KH3 P.03-79 079]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 · 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의 장관을 군주에서 총관(뒤에 도독)으로 바꾸어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에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주 밑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KH3 P.03-80 080] 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상수리 제도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기인 제도로 이어졌다.

[KH3 P.03-81 081]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정은 9주에 1정씩을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KH3 P.03-82 082]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의 중앙 관제 ※() 안은 당의 관제임.
발해의 중앙 관제 ※() 안은 당의 관제임.

[KH3 P.03-83 083]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 · 인 · 의 3부를, 우사정이 지 · 예 · 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고 교육 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KH3 P.03-84 084] 발해의 지방 지배 체제는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에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

[KH3 P.03-85 085]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지배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KH3 P.03-86 086]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싸움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김헌창의 난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822년(헌덕왕 14)에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원성왕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이라 하였다.
초적

백성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토지를 떠나 도적이 되면 백성을 풀에 비유하여 초적이라 부른다.
호족의 출신 성분

호족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몰락한 중앙 귀족, 무역에 종사하면서 재력과 무력을 축적한 세력, 군진 세력, 지방의 토착 세력인 촌주 출신 등으로 구분된다.

[KH3 P.03-87 087]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집사부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KH3 P.03-88 088]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에는 지방 세력들도 가담하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으로 웅천주 도독 김헌창과 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일부 지방 세력들이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더욱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KH3 P.03-89 089]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KH3 P.03-90 090]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KH3 P.03-91 091]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후삼국의 성립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 후삼국의 성립]

후삼국의 성립
후삼국의 성립

[KH3 P.03-92 092]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금성(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

본래 상주 지방의 호족 집안에서 태어나 신라 서남 지역 방위군의 장군으로 나가 세력을 키웠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상주의 농민 출신, 광주의 호족 출신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KH3 P.03-93 093]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KH3 P.03-94 094]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갖고 있었다.

[KH3 P.03-95 095] 궁예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인 양길의 아래에 들어가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양길을 몰아 낸 다음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KH3 P.03-96 096] 그 후 궁예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다음, 조령을 넘어 상주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영주를 차지하여 옛 신라 땅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이 영토가 확장되고 국가 기반이 다져지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KH3 P.03-97 097]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설치하고 9관등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위하여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게 되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견훤과 궁예

○ 견훤은 상주 가은현(경북 문경 가은)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자활하다가 후에 가업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 신라 진성왕 6년(892),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 있어 정권을 농간하매 기강은 문란하여 해이해지고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이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 주현들로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무리가 한달 사이에 5,000여인에 이르렀다.…"지금 내가 도읍을 완산(전주)에 정하고, 어찌 감히 의자왕의 쌓인 원통함을 씻지 아니하랴." 하고, 드디어 후백제 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었다. …… <삼국사기>

○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 신라 말기에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한 지역 주현(州縣) 중에서 조정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수가 반반이었으며, 이곳저곳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개미같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은 어지러운 때를 틈타서 무리를 끌어모으면 자기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북원(원주)의 도적 집단 괴수 양길(梁吉)에게 투탁(投託)하니, (양)길이 그를 잘 대우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으로 신라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 군사들과 함께 고생과 즐거움을 함께하며, 주고 빼앗는 일에 있어서는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었다. …… 패서(浿西)에 있는 도적 집단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이 스스로 무리들이 많아서 나라를 창건하고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 선종이 왕이라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은 오래되어서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심화과정: 중앙 집권 국가의 성립과 발전

① 고대 제국의 사회는 왕을 정점으로 하여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성되었다. 지배층은 관료 · 신관 · 무사들로 이루어졌고, 피지배층은 농민 · 상인 · 수공업자 등의 평민과 노예로 이루어졌다. 동양의 제국에서 생산을 주로 담당하는 계층은 평민들이었고, 노예는 가내 노예가 대부분으로, 주민의 10% 이내인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의 도시 국가와 로마 제국에서는 생산을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노동 노예제가 발달하였다.

② 우리나라의 국가 발전 단계에 관한 이론에 있어 중요한 계기는 군장 사회설의 수용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고대 국가의 출현에 이르는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은 군집(bands)-부족(tribes)-군장 사회(chiefdom)-초기 국가(primitive state)의 단계를 거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군장 사회설은 군장 사회-연맹 왕국-고대 국가의 발전 단계론으로 다시 정리되어 한국사의 서술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1. 동양과 서양의 고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을 추론해 보자.
  2. 우리나라에서 군장 사회와 연맹 왕국에 해당하는 나라들을 열거해 보자.
  3. 중앙 집권 국가에서 왕권이 강화되고 족장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보자.
  4.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와 교류하였던 중국의 왕조와 북방 민족의 활동을 정리해 보자.
심화과정: 삼국 통일의 의미와 한계

① 6세기 중엽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 지역을 독차지함으로써 12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나ㆍ제 동맹을 결렬시켰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협공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황해의 항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수, 당과 동맹을 맺었다.

② 신라의 통일 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ㆍ당 연합군과 백제, 고구려의 전쟁이었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이듬해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초기에는 이를 방어하였으나,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둘째 단계는 신라와 당의 전쟁이었다. 일찍이 신라는 당과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 적어도 평양 이남의 땅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밀약을 맺었으나, 당이 삼국 전체를 수중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이자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여 함께 당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차지하여 불완전하나마 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1.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외교 정책과 경제적 토대를 추론해 보자.
  2.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사 전개 과정에서 가지는 의미와 한계성을 말해 보자.
심화과정: 골품제의 모순

① 최치원이 서쪽으로 당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왔는데, 전후에 난세를 만나서 처지가 곤란하였으며, 모함을 받아 죄에 걸리겠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숲속과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책을 벗하여 자연을 노래하였다. <삼국사기>

② 설계두는 신라의 귀족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할 때, “신라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뛰어난 재주와 큰 공이 있어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 나는 멀리 중국에 가서 출중한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영화를 누리며, 높은 관직에 어울리는 칼을 차고 천자 곁에 출입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 <삼국사기>
  1. 최치원과 설계두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취한 행동을 말해 보자.
  2. 골품제의 모순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향은 어떠하였는지 조사해 보자.
심화과정: 발해사의 이해

①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이사하였다. …… 대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대조영은 용맹하고 병사 다루기를 잘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그에게 들어갔다. <구당서>

② 대조영과 그 후손들의 고구려 지향성은 일본과의 외교 과정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759년에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도 발해의 왕을 ‘고려국왕’으로 불렀다. 뿐만 아니라, 발해를 가리켜 자주 ‘고려’라고 불렀으며, ‘발해의 사신’으로 표현한 사례가 일본의 기록에 많이 있다.
  1. 발해 사람들이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을 정리해 보자.
  2. 발해가 우리 민족의 국가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자료를 통하여 조사해 보자.


2. 중세의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KH3 P.03-98 098]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우리 역사의 내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도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KH3 P.03-99 099]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KH3 P.03-100 100] 이후 무신 집권기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확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1) 중세의 세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1) 중세의 세계]

[KH3 P.03-101 101] 10세기 초 중국에서는 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 왕안석의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2세기 초에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쯔 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KH3 P.03-102 102] 13세기에는 몽고족이 크게 일어나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는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동서 문화 교류가 크게 촉진되었다.

몽고 제국의 최대 판도
몽고 제국의 최대 판도

[KH3 P.03-103 103] 일본은 9세기 중엽에 국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장원을 소유하고 무사를 고용함으로써 특유의 봉건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KH3 P.03-104 104]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침투하였다.

[KH3 P.03-105 105] 한편, 서양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 서양의 중세 사회는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 그리스 정교 중심의 비잔티움 문화권,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걸친 이슬람 문화권으로 형성되었다.

[KH3 P.03-106 106]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로마 교회와 제휴하여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9세기에 분열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세계에는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성장하였다.

[KH3 P.03-107 107] 서유럽에서는 봉건 제도가 성립되어,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봉건 제도의 경제적 단위는 귀족과 기사들이 소유한 장원이었다.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대체로 부자유 신분인 농노로서, 이들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와 토지에 예속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그 주교는 교황이라 불리고, 교단 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에 크리스트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KH3 P.03-108 108]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으며, 황제 교황주의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였다. 비잔티움 문화는 초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북동부의 슬라브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KH3 P.03-109 109] 한편,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한 뒤,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슬람 문화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크리스트교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슬람 세력은 유럽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2)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2) 중세 사회의 성립 -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고려의 민족 재통일
고려의 민족 재통일

[KH3 P.03-110 110] 궁예를 몰아 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KH3 P.03-111 111] 왕건은 본래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하여 성장한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강화하였다. 그 후에 궁예의 신하가 되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다. 특히,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광평성 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자신이 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KH3 P.03-112 112]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우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KH3 P.03-113 113]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

당시 고려에 온 발해 유민 가운데는 관리, 장군, 학자, 승려 등 상류층 지식 계급이 상당수 있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하였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태조의 정책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2) 중세 사회의 성립 - 태조의 정책]

취민유도(取民有度)

백성들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유교적 민본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흑창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 주고 추수 후에 갚게 했던 빈민 구제 기구이다. 986년(성종 5)에 의창으로 바뀌었다.
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寮書)

태조가 신하들의 임금에 대한 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지은 책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KH3 P.03-114 114]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호족들을 포섭하여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조세 제도를 재조정하여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아울러 골품제가 해체된 뒤, 지배층을 새로이 편성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하여야 했다.

[KH3 P.03-115 115] 태조는 후삼국으로 분열된 것이 신라 사회의 모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인한 것이며, 그러한 사회 혼란의 근본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조세 제도에서 비롯된 경제 모순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호족들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었다. 아울러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로 흑창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KH3 P.03-116 116] 태조는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에게는 향촌 사회에서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공신들에게는 역분전을 지급하여 새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KH3 P.03-117 117]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또,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KH3 P.03-118 118]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심관과 기인

○ 태조 18년 신라 왕 김부(경순왕)가 항복해 오니,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라 하였다. (김)부로 하여금 경주의 사심(事審)이 되어 부호장 이하의 (임명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이 이를 본받아 각기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이 되었다. 사심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

○ 건국 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其人)이라 한다. <고려사>


광종의 개혁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2) 중세 사회의 성립 - 광종의 개혁 정치]

왕규의 난

광주의 호족인 왕규가 혜종 때 자신의 외손인 광주원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일으킨 반란
노비안검법

956년(광종 7)에 실시한 노비안검법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주기 위한 법이다.

[KH3 P.03-119 119]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왕규의 난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KH3 P.03-120 120]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더 안정되었다.

[KH3 P.03-121 121]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 과거 제도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다.

[KH3 P.03-122 122]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KH3 P.03-123 123]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 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2) 중세 사회의 성립 -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최승로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서 유교 사상에 입각한 28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중 22조가 전해진다.
성종의 지방 제도 정비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KH3 P.03-124 124]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KH3 P.03-125 125]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KH3 P.03-126 126] 성종은 먼저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다.

[KH3 P.03-127 127] 이어서 성종은 중앙의 통치 기구를 개편하였다. 의 제도를 받아들인 2성 6부제를 기반으로 하고,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뒤에 의 관제를 받아들여 중추원삼사를 설치하고, 고려의 실정에 맞게 도병마사식목도감을 설치함으로써 세 계통의 기구들이 어우러진 고려만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최승로의 개혁안

○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일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과 손해가 되는 일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수령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임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워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 청컨대, 외관(外官)을 두소서. 비록 한꺼번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 곳의 주현에 1명의 외관을 두고, 그 아래에 각각 2~3명의 관원을 두어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기소서. <고려사절요>

○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사방의 풍습이 각기 그 토성(土性)에 따르게 되니 다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예악(禮樂) · 시서(詩書)의 가르침과 군신 · 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함을 고쳐야 되겠지만, 그밖에 거마(車馬), 의복의 제도는 우리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함과 검소함을 알맞게 할 것이며, 구태여 중국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려사절요>


3) 통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조직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중앙 정치 조직]

중서문하성

재신과 낭사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심의하고, 낭사는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중추원

군사 기밀을 담당하면서 재신과 함께 국정을 총괄하는 추밀과 왕명을 출납하는 담당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었다.

[KH3 P.03-128 128]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을 맡았다.

고려의 중앙 관제
고려의 중앙 관제

[KH3 P.03-129 129]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식목도감재신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하였다. 식목도감은 임시 기구로서 국내 정치에 관한 법의 제정이나 각종 시행 규정을 다루던 회의 기구였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KH3 P.03-130 130] 한편, 재신과 추밀은 6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KH3 P.03-131 131]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리면서,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들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 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관리들의 기능이 신라 시대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고려의 5도 양계
고려의 5도 양계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KH3 P.03-132 132] 지방의 행정 조직도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을 5도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 4도호부 · 8목을 비롯하여 군 · 현 · 진 등을 설치하였다.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 · 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 · 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KH3 P.03-133 133]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 · 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 · 부곡 · 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들이 담당하였다.

[KH3 P.03-134 134] 향리는 원래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중소 호족 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 실무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토착 세력으로서 향촌 사회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일시적으로 파견되는 지방관보다 영향력이 컸다.



군역제도와 군사 조직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군역제도와 군사 조직]

[KH3 P.03-135 135]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으며, 군공을 세워 무신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도 있는 중류층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되거나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게 되자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일반 농민 군인으로 채워지기도 하였다.

[KH3 P.03-136 136]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으로 16세 이상의 장정들은 지방군으로 조직되었다.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주진군은 상비군으로 좌군 · 우군 · 초군으로 구성되어 국경 수비를 전담하였다. 주현군은 지방관의 지휘를 받아 외적을 방비하고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관리 등용 제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관리 등용 제도]

음서의 범위

고려 시대에는 공신과 종실의 자손 외에도 5품 이상 관료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 등에게도 음서의 혜택을 주었다.

[KH3 P.03-137 137] 고려의 관리는 과거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뉜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과는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KH3 P.03-138 138]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향리의 자제들이 응시하였고,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KH3 P.03-139 139]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시험관인 좌주와 결속을 강화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쉽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한 관리의 등용은 신분을 중시하던 고대 사회와는 달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였다는 점에서 능력이 중시되었음을 뜻한다.

[KH3 P.03-140 140] 한편,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좌주와 문생의 관계

문생(門生)이 종백〔宗伯: 과거를 맡아 합격자를 선발하는 시험관으로 좌주(座主)라고도 한다.〕을 대할 때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예를 차린다.…… 평장사 임경숙은 4번 과거의 시험관이 되었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그의 문하에 벼슬을 한 사람이 10여 명이나 되었고,…… (유경이) 문생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뜰 아래에서 절하니 임경숙은 마루 위에 앉아 있고, 악공들은 풍악을 울렸다. 보는 사람들이 하례하고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한집>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KH3 P.03-141 141]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KH3 P.03-142 142]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 귀족은 과거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 문하성중추원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측근 세력

문벌 귀족을 비판하면서 정계에 진출한 신진 관리들 중에서 왕의 측근 세력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예종 때의 한안인이다.

[KH3 P.03-143 143] 한편, 이들은 비슷한 부류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KH3 P.03-144 144] 이러한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들 중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이들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KH3 P.03-145 145]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 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왕실과 경원 이씨의 혼인 관계도
왕실과 경원 이씨의 혼인 관계도

[KH3 P.03-146 146]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과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왕의 측근 세력들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KH3 P.03-147 147]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KH3 P.03-148 148]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KH3 P.03-149 149]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KH3 P.03-150 150]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KH3 P.03-151 151]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면서 난을 일으켰다(1135). 그러나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KH3 P.03-152 15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신채호의 서경 천도 운동 인식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나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은 무슨 사건에 원인하는 것인가? …… 나는 한 마디로 회답하여 말하기를, 고려 인종 13년 서경(평양) 천도 운동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다.…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실상은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무신 정권의 성립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 무신 정권의 성립]

무신 집권자의 변화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이의민최충헌

[KH3 P.03-153 153]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무신정변이었다(1170).

[KH3 P.03-154 154]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KH3 P.03-155 155] 이 시기에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늘어났고, 정치 싸움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교정도감

최씨 정권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 기구
삼별초

최우가 집권하면서 설치한 야별초에서 분리된 좌별초, 우별초와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던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말한다.

[KH3 P.03-156 156]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KH3 P.03-157 157]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KH3 P.03-158 158]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정국이 안정되면서 최우는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KH3 P.03-159 159] 최씨의 집권으로 무신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5) 대외 관계의 전개



거란의 침입과 격퇴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5) 대외 관계의 전개 - 거란의 침입과 격퇴]

정안국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의 유민들이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세운 나라
강동 6주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다.
강조의 정변

목종의 모후인 천추 태후김치양이 불륜 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 하자,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시킨 사건

[KH3 P.03-160 160]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를 세운 거란(요)을 공격하기에 앞서 송과 연결되어 있던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거란은 먼저 정안국을 정복한 다음 고려에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KH3 P.03-161 161] 처음에 거란은 8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993). 거란은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과 송과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거란과 협상에 나섰다. 이 때 거란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KH3 P.03-162 162] 거란군이 퇴각한 뒤 고려는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거란과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해 왔다(1010). 이 때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거란군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KH3 P.03-163 163]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1018).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온 거란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 때 살아서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수천에 불과할 정도였다(1019).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10~12세기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
10~12세기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

[KH3 P.03-164 164] 고려가 거란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을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거란과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KH3 P.03-165 165]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아 거란은 물론 여진의 침입까지 방어하려 하였다.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이다.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5) 대외 관계의 전개 -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 윤관이 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고려대 박물관 소장).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 윤관이 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고려대 박물관 소장).
별무반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 9성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 낸 뒤 고려는 그 지역에 9성을 쌓고, 적극적인 영토 확장책의 일환으로 사민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KH3 P.03-166 166] 여진은 한때 말갈이라 불리면서 오랫동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여진으로 불리면서 발해의 옛 땅에서 반독립적 상태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0~12세기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
10~12세기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

[KH3 P.03-167 167]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추장이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KH3 P.03-168 168] 여진과의 일차 접촉에서 패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KH3 P.03-169 169]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고려는, 다시는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거란족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KH3 P.03-170 170]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국호를 이라 하고(1115), 거란을 멸한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금과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거란족의 토벌과 몽고와의 전쟁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5) 대외 관계의 전개 - 거란족의 토벌과 몽고와의 전쟁]

[KH3 P.03-171 171]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10~12세기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
10~12세기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
강화산성 서문(인천 강화) |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4개의 성문이 있다. 현존하는 성문과 성곽은 조선 시대에 건축되었다.
강화산성 서문(인천 강화) |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4개의 성문이 있다. 현존하는 성문과 성곽은 조선 시대에 건축되었다.
박서의 귀주성 전투

1231년(고종 18) 서북면 병마사 재임시 몽고가 침략하여 온갖 무기로 귀주성을 공격해 오자, 1개월에 걸쳐친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용장성(전남 진도 군내면) | 삼별초의 대몽 항전지로 1270년 이후 축성되었다.
용장성(전남 진도 군내면) | 삼별초의 대몽 항전지로 1270년 이후 축성되었다.

[KH3 P.03-172 172] 이 때,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평양 동쪽)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고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고는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 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KH3 P.03-173 173]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고 사신 일행이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고군이 침입해 왔다(1231).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고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고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KH3 P.03-174 174]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경기 용인) 전투에서 장수 살리타〔撒禮塔〕가 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고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냈다.

[KH3 P.03-175 175]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이 용감하게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들까지도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다.

[KH3 P.03-176 176]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거둬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KH3 P.03-177 177]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와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고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KH3 P.03-178 178] 그러나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 · 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 이처럼 삼별초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고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고와의 전쟁 때 활약한 백성들

○ 김윤후는 고종 때의 사람으로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었다. 몽고병이 이르자, 윤후가 처안성으로 난을 피하였는데, 몽고의 원수 살리타가 와서 성을 치매 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왕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고려사>

○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양 장부와 문서로 인하여 근자에 판관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고병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상 차이가 있어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兩班別抄)를 거느리고, 유홍익은 노군(奴軍)과 잡류 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였다. 몽고병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힘을 합하여 이를 쫓았다. <고려사>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원의 내정 간섭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 원의 내정 간섭]

원 간섭기의 관제 변화

중서문하성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하고, 6부4사로 통폐합되었으며, 중추원밀직사로 격하되었다

[KH3 P.03-179 179] 몽고와 강화한 이후 고려의 자주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고려는 먼저 몽고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었다. 몽고는 국호를 으로 바꾼 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고려로부터 선박, 식량,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와 함께 군대와 선원 등 인적 자원도 징발하였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KH3 P.03-180 180] 원은 고종 말년에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뒤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다시 찾았으나, 쌍성 총관부는 공민왕 때에 무력으로 회복할 때까지 원의 지배를 받았다.

[KH3 P.03-181 181] 그러나 고려는 오랜 항쟁의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원의 부마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KH3 P.03-182 182]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KH3 P.03-183 183] 한편,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으며, 금 · 은 · 베를 비롯하여 인삼 · 약재 · 매 등의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KH3 P.03-184 184] 이러한 원의 내정 간섭과 경제적인 수탈은 고려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으로 인해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왕권이 원에 의지하여 유지됨은 물론, 통치 질서가 무너져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

공민왕의 영토 수복
공민왕의 영토 수복
전민변정도감

고려 말기에 권문세족들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약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별 기구
성균관

고려 초기에 설치된 국자감은 국학으로 불리다가 1308년부터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KH3 P.03-185 185]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그에 의존한 고려의 왕권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중앙 지배층도 개편되었다. 이전 시기부터 존속하였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집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한 가문 등이 이른바 권문세족으로서 새로이 자리잡았다. 그들은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기철

기철은 누이동생이 원 순제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자, 기 황후와 원을 등에 업고 친원파 세력을 결집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권세를 부렸다.

[KH3 P.03-186 186] 관료의 인사와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 때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의 왕은 개혁을 철저하게 추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KH3 P.03-187 187]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민왕은 원 · 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KH3 P.03-188 188]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의 숙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KH3 P.03-189 189]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 자주 정책은 친원파 권세가의 반발로 중단될 위기에 놓였고, 이에 대외적인 개혁의 완수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권문세족들을 눌러야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KH3 P.03-190 190] 아울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의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KH3 P.03-191 191] 한편, 성균관을 통하여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KH3 P.03-192 192] 공민왕 때의 개혁은 권문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이 시기의 개혁은 아직 개혁 추진 세력이 결집되지 못한 상태에서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신진 사대부의 성장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 신진 사대부의 성장]

[KH3 P.03-193 193] 무신 집권기 이래 지방의 향리 자제들을 중심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원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다. 이들 중의 일부는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KH3 P.03-194 194] 신진 사대부들은 주로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충돌하게 되자,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과전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왕권과 연결하여 고려 후기의 각종 개혁 정치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



고려의 멸망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2. 중세의 정치 -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 고려의 멸망]

홍건적

원 말기에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 홍건적이라 하였다.

[KH3 P.03-195 195]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KH3 P.03-196 196] 한편, 북쪽으로부터 홍건적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KH3 P.03-197 197]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으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KH3 P.03-198 198]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진포 대첩

 ○ 우왕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로 쳐들어와 충청 · 전라 · 경상도의 3도 연해의 주군(州郡)을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이 나서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왜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배가 불타 갈 곳이 없게 된 왜구는 옥천, 영동, 상주, 선산 등지로 다니면서 이르는 곳마다 폐허로 만들었다. ……
<고려사>
황산 대첩

○ 이성계가 이끄는 토벌군이 남원에 도착하니 왜구는 인월역에 있다고 하였다. 운봉을 넘어온 이성계는 적장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선두에 나서서 전투를 독려하여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섬멸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1,600여 필의 군마와 여러 병기를 노획하였고 살아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고려사>
심화과정: 동양과 서양의 중세

① 서양의 중세봉건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이다. 중세 봉건 사회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군주는 명목상의 존재일 뿐 제후들이 실권을 행사한 지방 분권 시대이며, 경제면에서는 영주 중심의 자급자족적인 장원 경제 시대이며, 사회면에서는 계급 사회인 봉건 시대에 해당되며, 문화면에서는 로마 멸망과 더불어 상호 이질적인 서유럽 문화권, 비잔티움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의 3대 문화권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 문화가 그 기초가 되었다.

② 중국의 중세는 멸망 후의 5대 10국 시대부터 , 을 거쳐 의 건국 초기에 이르는 시기인데, 대체로 북방 민족의 활동이 왕성한 때였다. 당말 5대의 혼란으로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신흥 지주층이 대두하여 이들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대부가 되었다. 송대 사회는 대내적으로 황제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으나, 대외적으로 북방 유목 민족의 강성으로 시련을 겪었던 시기였다.
  1. 서양의 중세 사회가 시작된 시기를 추론해 보자.
  2. 중국과 서양의 중세 사회의 특징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 보자.
심화과정: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는 정치적ㆍ문화적ㆍ사상적으로 신라 사회에 비하여 질적으로 변화, 발전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고려는 우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배 세력이 교체되어 폐쇄적인 사회가 보다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념도 변화하게 되었으며, 문화의 폭과 질이 크게 높아져 중세 문화를 성립시켰다.

한편, 고려에서는 강렬한 민족 의식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민족 의식은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자신감과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방 유목 민족들과 항쟁하면서 더욱 성장하였다.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중세 사회의 성립으로 보는 이유를 분석해 보자.
  2. 고려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당시 국제 정세를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심화과정: 원의 간섭과 고려의 개혁

① 원 간섭기에 고려는 사회 ·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이에 따른 백성들의 저항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충선왕은 토지 제도와 수취 제도에서 발생한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였으며, 원의 간섭을 인정한 상태에서 개혁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 한 국왕의 태도 등으로 인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충목왕 때에도 친원파를 몰아내면서 권세가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역시 권문세족의 반발과 원의 간섭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② 14세기에 이르러 원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황위 계승을 둘러싼 원 황실의 내분과 경제 혼란, 라마교를 위한 과도한 재정 지출 등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원 농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원에 쫓겨 고려에 침입하였던 홍건적의 활동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③ 공민왕 즉위 이후에도 원의 간섭은 여전하였고 친원파 역시 건재하였다. 공민왕은 친원파를 관직에 기용하지 않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 때마침 원에서 기 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봉해지자, 이러한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를 계기로 기철의 권력이 공민왕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고, 그의 일족과 친원파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1. 충선왕과 충목왕이 개혁이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자.
  2. 공민왕 때에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대외적 조건으로 당시 원의 국내 사정을 살펴보자.
  3. 공민왕의 개혁이 성공할 수 없었던 국내의 정치 상황을 추론해 보자.


3. 근세의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KH3 P.03-199 199] 조선은 왕과 양반 관료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왕은 최고 명령권자로서 통치 체제의 중심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지배층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새롭게 성장한 사림이 16세기 후반 이후 정국을 주도해 나가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사림이 분열하여 붕당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 붕당 사이에 서로 비판하며 견제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KH3 P.03-200 200] 정치 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면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관리 등용에 혈연이나 지연보다 능력을 중시하였고, 언로를 개방하여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였다. 아울러 6조를 중심으로 행정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높이면서 정책의 협의나 집행 과정에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고려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세 사회에서 벗어나 근세 사회로 나아갔다.



1) 근세의 세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1) 근세의 세계]

[KH3 P.03-201 201] 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이 건국되어 전통적인 한 문화가 회복되었다. 명대에는 강력한 전제 황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발전하였다. 명은 15세기 초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국위를 떨쳤다. 이 때부터 중국인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 명은 북쪽으로는 몽고족의 침입과 남쪽으로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16세기 말에는 명의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고, 결국 17세기 중엽에 만주에서 일어난 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KH3 P.03-202 202]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 국가들이 여전히 번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중앙아시아에서 건국된 티무르 제국과 이란 지방의 사파비 왕조도 한때 번성하였다.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이 세워져 인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하며 발전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동남아시아에도 진출하여 오늘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일대에 이슬람교가 성행하게 되었다.

[KH3 P.03-203 203] 일본에서는 14세기에 무로마치 막부가 수립되었다가 15세기 중엽에는 전국 시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에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나 조선 침략에 실패하고 에도에 새 막부가 설치됨으로써 집권적 봉건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시대에 일본은 평화와 안정을 이루고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서양 문물을 수용하였다.

[KH3 P.03-204 204] 이 시기에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점차 서양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5~16세기의 세계
15~16세기의 세계

[KH3 P.03-205 205] 한편,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양에서는 중세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 사회와 근대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르네상스,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유럽 세계의 확대, 종교 개혁 등은 바로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큰 움직임이었다.

[KH3 P.03-206 206] 르네상스는 14~15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16세기에는 유럽 각지에 널리 퍼졌다. 이것은 그리스 · 로마의 고전 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지성과 감성이 조화된 인간성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특히, 문학과 예술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하였고, 근대 과학이 태동하였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이며 현세적인 근대 문화의 창조 운동이기도 하였다.

[KH3 P.03-207 207]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유럽 세계를 확대시켰다. 그 결과, 유럽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이동하였다. 유럽 각국은 무역과 함께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포르투갈은 주로 동양 무역을 독점하였고, 에스파냐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뒤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도 앞다투어 해외로 진출하여 유럽 세력은 전 세계로 팽창하였다.

[KH3 P.03-208 208] 무역과 식민 활동의 결과, 유럽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상업 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절대 왕정들은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KH3 P.03-209 209] 16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루터파, 칼뱅파, 영국 국교회 등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시켰다. 이에 중세 크리스트교 세계의 통일이 무너졌다. 종교 개혁 운동은 사회 개혁 운동이나 민족 운동 등과 연결되어 전개되었으므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KH3 P.03-210 210] 한편, 신교의 성립에 자극을 받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 운동으로 예수회가 창설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동양과 아메리카대륙에서 활동하며 로마 카톨릭을 널리 전파하였다.



2) 근세 사회의 성립

태조 이성계 어진(전북 전주 경기전 소장)
태조 이성계 어진(전북 전주 경기전 소장)
신진 사대부의 분화

온건 개혁파는 비리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고 대토지 사유는 정리하되, 왕조 질서를 파괴하거나 전면적인 토지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반면, 급진 개혁파는 역성 혁명을 찬성하고,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시키려 하였다.


조선의 건국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2) 근세 사회의 성립 - 조선의 건국]

[KH3 P.03-211 211] 신진 사대부는 고려 말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권문세족전횡을 비판하고 사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왕조를 건국하였다.

[KH3 P.03-212 212] 이성계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는 사원 경제의 폐단과 토지 소유 등 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다른 의견이 존재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들은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다.

[KH3 P.03-213 213]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 세력과 연결하여 혁명파를 이루었다. 혁명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마저 잡았다. 이들은 당시 최대의 쟁점이었던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함으로써(1391)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어 혁명파는 역성 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고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였다. 뒤이어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2) 근세 사회의 성립 -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정도전의 정치 사상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KH3 P.03-214 214]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국가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세워졌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국호를 조선으로 선포하고,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어 한양에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KH3 P.03-215 215] 건국 초에는 정치적 · 사회적 안정과 왕권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조준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KH3 P.03-216 216]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지배 기구의 틀을 마련하였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두면서 그 정치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정치 업무를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왕에게 올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게 하는 6조직계제를 채택하였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한편, 왕실 외척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KH3 P.03-217 217] 태종은 국가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에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또,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시켰으며, 지방 권세가를 통제하여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줄어들도록 하였다. 아울러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유교 정치의 실현 노력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2) 근세 사회의 성립 - 유교 정치의 실현 노력]

경복궁 수정전(서울 종로) | 세종 때 집현전이 있던 건물이다.
경복궁 수정전(서울 종로) | 세종 때 집현전이 있던 건물이다.
왕도 정치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유교에서 이상으로 삼는 정치 사상

[KH3 P.03-218 218] 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였다. 먼저,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집현전 학자들을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뒤이어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들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잡게 하였다.

집현전의 기능

집현전 학사들은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의정부 서사제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들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KH3 P.03-219 219]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우고 유교적 민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유능한 인재를 널리 발굴하였으며, 청백리 재상을 등용하여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특히, 중요한 사안의 결정에는 백성의 여론을 존중하여 조정의 신하는 물론, 지방의 촌민에게서도 의견을 들으려 하였다.



문물 제도의 정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2) 근세 사회의 성립 - 문물 제도의 정비]

[KH3 P.03-220 220] 세종 이후 병약한 문종이 일찍 죽고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김종서, 황보인재상에게 넘어갔다. 이에 수양 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올랐다.

[KH3 P.03-221 221]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직계제로 고쳤다. 또, 공신이나 언관들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집현전을 없애고, 경연도 열지 않았으며, 그동안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KH3 P.03-222 222] 세조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항구적으로 사용할 체계적인 법전을 편찬하려 하였다. 이에 역대의 법전과 각종 명령 등을 종합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KH3 P.03-223 223] 성종은 건국 이후의 문물 제도의 정비를 마무리지었다. 홍문관을 두어 관원 모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함으로써 집현전을 계승하였으며, 정승을 비롯한 주요 관리들도 다수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경연이 단순한 왕의 학문 연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왕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KH3 P.03-224 224]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마무리하여 반포함으로써 이후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왕의 하루

새벽 4~5 시경: 기상
새벽 6 시경: 왕실 웃어른에게 아침 문안
7 시경: 아침 식사
8 시경: 아침 공부(조강)
10 시경: 아침 조회(조참 또는 상참)
11 시경: 오전 업무(보고 받기, 신료 접견)
정오~오후 1 시경: 점심식사
오후 2 시경: 낮 공부(주강)
오후 3 시경: 신료 접견
오후 5 시경: 궁궐 내의 야간 숙직자 확인
오후 6 시경: 저녁 공부(석강)
오후 7 시경: 저녁 식사
오후 8 시경: 왕실 웃어른에게 저녁 문안
오후 10 시경: 상소문 읽기
오후 11 시경: 취침


3) 통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체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중앙 정치 체제]

조선의 통치 체제
조선의 통치 체제

[KH3 P.03-225 225]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들은 문반무반양반으로 구성되었고, 18등급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왕과 함께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하거나 주요 관서의 책임자가 될 수 있는 당상관과 실무를 담당하는 당하관으로 구분되고, 자신의 등급에 걸맞은 관직을 맡았다.

[KH3 P.03-226 226] 조선 시대의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KH3 P.03-227 227]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들이 소속되어 업무를 나누어 맡음으로써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한편, 의정부와 6조의 고관들이 중요 정책 회의에 참여하거나 경연에서 정책을 협의함으로써 각 관서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KH3 P.03-228 228]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3사는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3사의 언론은 고관들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3사의 언관

3사의 언관벼슬 등급은 높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중에 판서정승 등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KH3 P.03-229 229] 이 밖에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대간, 간관

대간은 마땅히 위엄과 명망이 우선되어야 하고 탄핵은 뒤에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는 비록 종일토록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 복종할 것이요, 이것이 없는 자는 날마다 수많은 글을 올린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강의(剛毅)한 뜻과 정직한 지조가 본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한갓 탄핵만으로 여러 신하들을 두렵게 하고 안과 밖을 깨끗이 하려 한다면 기강은 떨쳐지지 못하고 원망과 비방이 먼저 일어날까 두렵다. …… 천하의 득실과 백성들을 이해하고 사직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일정한 직책에 메이지 않는 것은 홀로 재상만이 행할 수 있으며, 간관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니, 간관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직무는 재상과 대등하다. <삼봉집>


지방 행정 조직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지방 행정 조직]

조선의 8도
조선의 8도

[KH3 P.03-230 230]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고을의 크기에 따라 지방관의 등급을 조정하고, 작은 군현을 통합하여 전국에 약 330여 개의 군현을 두었다. 고려 시대까지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켰다.

[KH3 P.03-231 231] 나아가 전국의 주민을 국가가 직접 지배하기 위하여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수령은 왕의 대리인으로, 지방의 행정 · 사법 ·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수령의 권한을 강화한 반면, 향리는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시켰다.

군현의 등급

조선의 지방 통치에서 기본 행정 구역인 군현은 그 고을의 인구와 토지와 크기에 따라 부 · 목 · 군 · 현으로 구획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총 책임자인 수령도 종2품에서 최하 종6품까지의 부윤(종2품), 대도호부사(정3품), 목사(정3품), 도호부사(종3품), 군수(종4품), 현령(종5품), 현감(종6품)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행정 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관찰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KH3 P.03-232 232] 군현 아래에는 면 · 이(里) · 통을 두었다.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편성하였고, 향민 중에서 각각의 책임자를 선임하여 수령의 명령을 받아 인구 파악과 부역 징발을 주로 담당하게 하였다.

[KH3 P.03-233 233] 한편, 수령의 비행을 견제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기 위하여 전국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수시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 유향소(향청)를 운영하여 지방민의 자치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유향소에서는 좌수별감을 선출하여 자율적으로 규약을 만들고, 수시로 향회를 소집하여 여론을 수렴하면서 백성을 교화하였다.

[KH3 P.03-234 234] 서울에는 경재소를 두고 그 지방 출신의 중앙 고관을 책임자로 하여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관계를 긴밀하게 하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관찰사

관찰사는 전국 8도에 각각 임명되었다. 관찰사는 감찰권,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가진 중요한 직책이었다.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갑사

간단한 시험을 거쳐 선발된 일종의 직업군인으로, 근무기간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진관 체제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각 도에 한두 개의 병영을 두어 병사가 관할 지역 군대를 장악하고, 병영 밑에 몇 개의 거진을 설치하여 거진의 수령이 그 지역의 군대를 통제하는 체제였다. 수군도 육군과 같은 방식으로 편제되었다.
잡색군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이 소속되어 유사시에 대비하게 한 예비군의 일종이다.

[KH3 P.03-235 235]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 조직을 강화하였다. 태종 이후 사병을 모두 폐지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을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현직 관료와 학생만 군역을 면제받았을 뿐, 종친외척, 공신이나 고급 관료의 자제들도 고급 특수군에 편입되어 군역을 부담하였다.

[KH3 P.03-236 236] 정군은 서울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요충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일정 기간 교대로 복무하였으며, 복무 기간에 따라 품계녹봉을 받기도 하였다.

[KH3 P.03-237 237]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궁궐과 서울을 수비하는 5위로 구성되고, 그 지휘 책임은 문반 관료가 맡았다. 중앙군은 정군을 중심으로 갑사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다.

[KH3 P.03-238 238]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건국 초기에는 국방상의 요지인 이나 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는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요충지의 고을에 성을 쌓아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연해 각 도에는 수군을 설치하였다. 수군은 육군에 비하여 힘들고 위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꺼렸다.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

[KH3 P.03-239 239] 한편, 군사 조직과 아울러 교통과 통신 체계도 정비되었다. 군사적인 위급 사태를 알리기 위한 봉수제가 정비되고, 물자 수송과 통신을 위한 역참이 설치되어 국방과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이 한층 쉬워졌다.



관리 등용 제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3) 통치 체제의 정비 - 관리 등용 제도]

[KH3 P.03-240 240] 조선 시대의 관리는 과거취재, 음서, 천거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위 관원이 되기 위해서는 문과에 합격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KH3 P.03-241 241] 문과는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등의 별시가 있었다. 별시로는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식년시의 경우에는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로 뽑고, 2차 시험인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한 다음, 왕 앞에서 실시하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하였다.

소과

문과의 예비 시험인 생원시 · 진사시를 말한다.
과거 응시 자격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 무과와 잡과에는 제한이 없었다.

[KH3 P.03-242 242]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했으나, 뒤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KH3 P.03-243 243]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러지는데, 최종 선발 인원은 28명이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도 3년마다 치러지는데, 분야별로 정원이 있었다.

[KH3 P.03-244 244] 한편, 재주가 부족하거나 나이가 많아 과거 응시가 어려운 사람들은 취재라는 특별 채용 시험을 거쳐 하급 실무직에 임명되었다.

[KH3 P.03-245 245]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은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따라서, 양인이 과거에 합격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건이나 사회적 처지로 인하여 일반 백성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KH3 P.03-246 246] 한편, 과거를 거치지 않더라도 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되거나 음서를 통하여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거는 대개 기존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천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대상도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고, 음서 출신은 문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으로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상피제(相避制)

가까운 친인척과 같은 관서에 근무하지 않도록 하거나 출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제도
서경(書經)

관리를 처음 임명할 때, 사헌부사간원에서 심사하여 동의해 주는 절차

[KH3 P.03-247 247] 관리의 등용과 근무 평가, 승진, 좌천 등에 관한 인사 관리 제도도 관직 제도의 정비와 지배층의 증가에 따라 새롭게 정비되었다. 관리의 등용은 품계에 맞게 이루어졌다.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하여 상피제를 마련하였고,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5품 이하 관리의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관들이 하급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의 자료로 삼았다. 이로써 조선은 합리적인 인사 행정을 위한 제도가 갖추어져 관료적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훈구와 사림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 훈구와 사림]

훈구 세력

훈구 세력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다. 훈구 세력은 15세기 이래의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이를 배경으로 발달한 상공업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서해안의 간척 사업과 토지 매입 등을 통하여 농장을 확대해 나갔고, 대외무역에도 관여하였으며, 공물방납을 통해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KH3 P.03-248 248] 조선의 문물 제도가 정비되는 16세기를 전후하여 사림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장하였다. 사림들은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훈구 세력과 대립하였다.

[KH3 P.03-249 249] 훈구 세력은 세조의 집권 이후에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세습적으로 장악하고, 왕실과 혼인하면서 성장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KH3 P.03-250 250] 한편,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들이 영남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하였던 데 비하여 향촌 자치를 내세웠고, 도덕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KH3 P.03-251 251] 사림 세력은 중앙의 권력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를 장악하려는 훈구 세력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자치적인 세력 기반을 쌓으면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세우려 하였다.



사림의 정치적 성장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 사림의 정치적 성장]

사림의 계보
사림의 계보

[KH3 P.03-252 252]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KH3 P.03-253 253]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KH3 P.03-254 254]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KH3 P.03-255 255]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조광조의 개혁 정책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KH3 P.03-256 256] 그 뒤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을사사화). 이에 따라 명종 때에는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외척인 척신들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사림의 세력은 크게 꺾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사림 세력은 서원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붕당의 출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 붕당의 출현]

사림의 계보
사림의 계보

[KH3 P.03-257 257]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KH3 P.03-258 258]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들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들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KH3 P.03-259 259]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왕실의 외척이면서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던 심의겸과 당시 명망이 높고 신진 사림의 지지를 받던 김효원 사이의 대립으로 붕당이 이루어졌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동인이라 불렸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이라 불렸다.

[KH3 P.03-260 260] 동인은 이황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 세력들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다. 반면에, 서인은 이이성혼의 문인들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KH3 P.03-261 261]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원래, 붕당은 신하들끼리 모여 정파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왕권이 강성하였던 조선 초기에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사림 정치가 전개되면서 그 부산물로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붕당 정치의 전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 붕당 정치의 전개]

북인의 집권 기반

임진왜란 당시 북인은 의병을 일으키고 향촌 사회의 기반을 유지하여 전란이 끝난 뒤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광해군과 영창 대군

영창 대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인 까닭에 후궁의 아들로 적통이 아니었던 광해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산림

시골에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 붕당 정치기의 사상적 지주였다.
경신환국

1680년(숙종 6) 2차 예송 이후 정계에서 밀려났던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KH3 P.03-262 262] 동인서인으로 나뉜 후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KH3 P.03-263 263] 광해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전개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 등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광해군도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영창 대군을 살해하고 인목 대비를 유폐하여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여 재정의 악화와 민심의 이탈을 불러왔다. 결국 광해군과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1623).

[KH3 P.03-264 264] 인조반정 이후 붕당 정치는 더욱 진전되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서인과 남인은 모두 학파적 결속을 확고히 한 정파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정치적 여론은 주로 서원을 중심으로 모아져서 자기 학파의 관리들을 통하여 중앙 정치에 반영되었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라는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하였다.

[KH3 P.03-265 265] 이후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1차 예송에서는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차 예송에서는 꾸준히 세력을 키워 온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약화되고 남인 중심의 정국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남인 우세 속에 서인과 공존하는 정국은 숙종 초 경신환국이 일어나기까지 유지되었다.

예송

예송(禮訟)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의 사망 시(기해예송)와 1674년 효종비의 사망시(갑인예송)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때 인조의 계비 자의 대비의 복제(服制)가 쟁점이 되었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붕당 정치의 성격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 붕당 정치의 성격]

이조 전랑

정5품인 정랑과 정6품인 좌랑을 말하며, 문관의 인사를 천거하고 전형하는 큰 권한을 가졌다.

[KH3 P.03-266 266] 사림들은 강력한 훈구 세력과 대결할 때는 단결하였으나, 훈구 세력이 무너진 뒤에는 자체 분열하여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치열한 정권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대 붕당을 소인당으로,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선배 사림이 물러간 뒤에는 붕당을 모두 군자당으로 보고 붕당 간의 견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KH3 P.03-267 267] 이어 공론이 중시되는 정국이 되어 합좌 기구인 비변사를 통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상대 세력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옹호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3사 언관과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KH3 P.03-268 268] 한편,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이 출현하였고, 서원이나 향교가 지방 사족의 의견을 모으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붕당이 적극적으로 내세운 공론도 백성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 그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조 전랑의 역할

무릇 내외의 관원을 선발하는 것은 3공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 속하였다. 또,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질 것을 염려하여 3사 관원의 선발은 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낭관(郎官)에게 오로지 맡겼다. 따라서, 이조의 정랑좌랑이 또한 3사의 언론권을 주관하게 되었다. 3공6경의 벼슬이 비록 높고 크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있으면 전랑(銓郞)이 3사의 신하들로 하여금 논박하게 하였다. …… 이 때문에 전랑의 권한이 3공과 견줄 만하였다. 이것이 바로 크고 작은 벼슬이 서로 엮이고 위와 아래가 서로 견제하여 300년 동안 큰 권세를 농간하는 신하가 없었고, 신하의 세력이 커져서 임금이 제어하기 어려웠던 근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택리지>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의 관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명과의 관계]

사대 교린 정책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나타난 외교 정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 이루어진 것으로 예속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사절의 종류

정기적으로 보내는 하정사(정월 초하루), 성절사(황제의 탄신일), 동지사(동짓날) 외에 필요할 때에 부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절이 있었다.

[KH3 P.03-269 269]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정권과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고, 중국 이외의 주변 민족과는 교린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사대 교린 정책은 상대 국가가 달라지더라도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된 외교 정책이었다.

[KH3 P.03-270 270] 명과는 태조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의 준비와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가 유지된 적도 있었지만, 태종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다.

[KH3 P.03-271 271]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였고, 그 때 문화적 ·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절 교환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이를 통하여 중국의 앞선 문화의 수입과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KH3 P.03-272 272] 명에 대한 이와 같은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명과는 사대 관계, 여진 ·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명과는 사대 관계, 여진 ·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여진과의 관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여진과의 관계]

야연사준도(야연사준도) | 김종서가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함경도에 있을 때의 고사를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야연사준도(야연사준도) | 김종서가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함경도에 있을 때의 고사를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KH3 P.03-273 273]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KH3 P.03-274 274] 이후 여진에 대하여 조선은 회유와 토벌의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경원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KH3 P.03-275 275] 한편, 여진족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주민의 자치적 지역 방어 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는 정책도 마련하였다.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들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해동제국기 |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해동제국기 |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관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관계]

쓰시마 섬 토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 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KH3 P.03-276 276] 조선은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된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 지방의 백성들이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뛰어난 전함을 대량으로 건조하였다. 특히, 화약 무기를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하는 등 왜구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KH3 P.03-277 277] 이에 따라 침략과 약탈이 어려워진 왜구들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은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아울러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해안의 부산포, 제포(창원),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뒤이어 계해약조(1443)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KH3 P.03-278 278] 또, 조선 초에는 류큐, 시암, 자바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이들 나라는 조공 혹은 진상의 형식으로 기호품을 중심으로 한 각종 토산품을 가져와서 옷, 옷감, 문방구 등을 회사품으로 가져갔다. 특히, 류큐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불경, 유교 경전, 범종, 부채 등을 전해 주어 류큐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성신 외교

많은 사람들이 성신(誠信)으로 교류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 글자의 뜻을 잘 모르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성신이라는 것은 진실된 마음[實意]이라는 뜻으로,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과 참된 성신지교(誠信之交)를 하기 위해서는 송사(送使)를 전부 사퇴시키고 조금도 그 나라(조선)의 번거로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참된 성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나라(조선)의 서적을 보면 그 밑에 깔려 있는 이런 숨은 뜻을 알 수 있다. <교린제성>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명과는 사대 관계, 여진 ·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 명과는 사대 관계, 여진 ·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왜군의 침략

을묘왜변

3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은 약조를 지키지 않고 자주 소란을 피웠다. 특히, 1555년(명종 10)에는 왜인들이 70여척의 배를 몰고 전라 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해 왔다.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 단절되었다.
관군과 의병의 활동
관군과 의병의 활동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 왜군의 침략]

[KH3 P.03-279 279]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하여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과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국방력은 더욱 약화되고, 일본 정세에 대한 인식에서도 붕당 간의 차이를 보이는 등 국론이 일치되지 않아서 적극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못하였다.

[KH3 P.03-280 280]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전쟁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전쟁 초기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없게 되자, 선조의주로 피난하여 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수군과 의병의 승리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 수군과 의병의 승리]

[KH3 P.03-281 281] 왜군의 침략 작전은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의 지휘 아래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KH3 P.03-282 282] 한편, 육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왜군과 싸워 향촌 사회를 지켜 냈다. 농민이 주축을 이룬 의병은 전직 관리와 사림 양반, 그리고 승려들이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고 그에 알맞은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KH3 P.03-283 283]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는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되었고, 관군의 전투 능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해전도


전란의 극복과 영향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 전란의 극복과 영향]

공명첩(空名帖)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이몽학의 난

1596년(선조 29) 왕실 서얼 출신인 이몽학이 민심의 불만을 선동하여 충청도에서 일으킨 난이다.
일본에 잡혀간 도자기 기술자

이삼평을 비롯한 도자기 기술자들은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KH3 P.03-284 284]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 · 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며, 관군과 백성들이 합심하여 행주산성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에 왜군은 서울에서 후퇴하여 경상도 해안 일대에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KH3 P.03-285 285] 한편, 조선도 전열을 정비하여 왜군의 완전 축출을 준비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KH3 P.03-286 286]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1597).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조 · 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KH3 P.03-287 287] 임진왜란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고 식량이 부족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명첩이 대량으로 발급되어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으며, 이몽학의 난과 같은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KH3 P.03-288 288] 임진왜란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활자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과 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 광해군의 중립 외교]

[KH3 P.03-289 289]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KH3 P.03-290 290]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KH3 P.03-291 291]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 · 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호란의 발발과 전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 호란의 발발과 전개]

남한산성 북문(경기 광주) |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중 인조가 피신하였던 곳이고, 이후 도성 방위의 임무를 맡았다.
남한산성 북문(경기 광주) |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중 인조가 피신하였던 곳이고, 이후 도성 방위의 임무를 맡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KH3 P.03-292 292]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KH3 P.03-293 293]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이르렀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정봉수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였다. 본래 후금의 1차적인 목표는 중국 대륙의 장악에 있었고, 조선도 아직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화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KH3 P.03-294 294]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이라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하였다. 군신 관계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청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전쟁까지도 불사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KH3 P.03-295 295]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고,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이 인질로 잡혀갔다.

[KH3 P.03-296 296] 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이 짧았고 지역적으로도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청군이 거쳐 간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에 의하여 황폐해졌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에 따라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인 우월감으로 인하여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최명길의 주화론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는 말입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 늘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1627)의 맹약을 아직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시고, 그동안을 이용하여 인정을 베풀어서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량을 저축하여 방어를 더욱 튼튼하게 하되, 군사를 집합시켜 일사 분란하게 하여 적의 허점을 노리는 것이 최상의 계책일 것입니다.
<지천집>
윤집의 척화론

○ 화의로 백성과 나라를 망치기가 ……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이 없습니다.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하물며 임진왜란의 일은 터럭만한 것도 황제의 힘이어서 우리나라가 살아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 어찌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인조실록>


북벌 운동의 전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 북벌 운동의 전개]

북벌론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

[KH3 P.03-297 297] 병자호란이 끝나고 과 군신 관계를 맺은 조선은 겉으로는 청에 사대하는 형식의 외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은밀하게 국방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그 뒤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의 움직임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KH3 P.03-298 298] 북벌론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였던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인조는 서인 중 일부 소장파들의 강경한 척화 주전론이 청의 침략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하여 일부 남인을 등용하였다. 이에 서인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진출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심화과정: 동양의 근세와 서양의 근세

① 정화는 1405년에서 1433년에 이르는 시기에 총 7차에 걸친 대원정을 단행하였다. 그가 이끈 함대는 총 200여 척의 배에 군사는 2만 7,000여 명이나 되는 대함대였으며, 항해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멀리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중국은 30여 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동남아시아에 화교 진출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 헌종 성황제가 즉위한 이후 해외 원정을 꺼리게 되어 정화의 항해기록과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해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② 타고난 모험심으로 항해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는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 관심을 갖고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술을 갖고 있던 이탈리아의 조선공, 천문학자, 항해 장비 기술자들을 불러모아 대서양 항해를 계획하였다. 15세기 초부터 엔리케의 특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였으나, 약간의 노예와 사금을 가져온 것을 제외하면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엔리케는 개인 비용까지 들여 가며 탐험대를 계속 보냈고, 이로 인하여 아프리카 서쪽 끝인 베르데 곶이 발견되고, 대서양 동부의 해도가 작성되었다. 엔리케의 뒤를 이어 주앙 2세는 대서양 탐험대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여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을 발견하였다. 포르투갈의 이러한 활동에 에스파냐도 자극을 받아 콜롬버스의 항해를 지원하였다.
  1. 정화의 남해원정과 유럽의 신항로 개척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을 비교해 보자.
  2. 근세의 동양과 서양 사회를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인 면에서 비교해 보자.
심화과정: 신진 사대부의 분화

이들은 최씨 정권기부터 학문적 교양과 행정 실무 능력을 겸비하여 자신의 능력에 따라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무신 정권 붕괴 이후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던 이들은 고려왕조의 폐단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이성계의 정권 장악과 새 왕조 개창을 둘러싸고 혁명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다. 혁명파는 왕조 자체를 교체하려는 역성 혁명파이고, 온건파는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였다.
  1.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세력의 명칭을 말해 보자.
  2. 온건파와 혁명파가 분열하게 된 배경을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자.
심화과정: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의 관계

① 의정부의 서사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다. …… 처음에 왕(태종)은 의정부의 권한이 막중함을 염려하여 이를 혁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신중하게 여겨 서두르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단행하였다. 의정부가 관장한 것은 사대 문서와 중죄수의 심의뿐이었다. <태종실록>

6조직계제를 시행한 이후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볍고 무거움이 없이 모두 6조에 붙여져 의정부와 관련을 맺지 않고, 의정부의 관여 사항은 오직 사형수를 논결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므로 옛날에 재상에게 위임하던 뜻과 어긋남이있고, ……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 · 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 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타당하지 않으면 의정부가 맡아 심의, 논박하고 다시 아뢰어 시행토록 한다.〈세종실록〉

③ 상왕(단종)이 어려서 무릇 조치하는 바는 모두 대신에게 맡겨 논의 시행하였다. 지금 내(세조)가 명을 받아 왕통을 계승하여 군국 서무를 아울러 모두 처리하며, 조종의 옛 제도를 모두 복구한다. 지금부터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6조가 각각 그 직무를 담당하여 직계한다. 〈세조실록〉
  1. ①, ②, ③의 제도 명칭을 말해 보자.
  2. 각 제도의 실시 목적을 당시 시대 상황과 연관지어 추론해 보자.
  3. 조선 초기에 이러한 정치 제도상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 보자.
  4. 조선 초기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부의 시책을 조사해 보자.


4. 정치 상황의 변동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KH3 P.03-299 299]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일당 전제화의 경향이 나타났다. 영조정조는 특정 붕당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탕평 정치는 특정 권력 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붕당 정치의 폐단을 일소하지는 못하였다.

[KH3 P.03-300 300]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 왕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널리 퍼지고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하여졌다. 이에 광범위한 농민들의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1) 근대의 세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1) 근대의 세계]

[KH3 P.03-301 301]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즉, 절대 왕정, 시민 혁명,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유럽 세계가 확립되었다.

[KH3 P.03-302 302] 지방 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추구하는 절대 왕정 국가가 성립하였다. 절대 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였고, 이를 위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식민지 획득에 힘썼다.

17~18세기의 세계
17~18세기의 세계

[KH3 P.03-303 303] 절대 왕정에 뒤이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은 근대 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민 혁명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명예 혁명에서 시작하여 미국의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근대 시민 계급이 중심이 되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봉건 세력으로부터 시민에게 넘긴 일련의 정치 변혁으로서, 자유주의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KH3 P.03-304 304] 산업 혁명은 18세기에 자본, 노동력, 자원, 해외 시장을 갖춘 영국에서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확립시켰다.

[KH3 P.03-305 305] 한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 과학이 발달하였다.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었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해졌다. 또, 개인주의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속적인 인간 중심의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KH3 P.03-306 306] 서양의 근대화는 상대적으로 동양 사회에 위협을 주었다. 산업 혁명이 확산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자, 국력을 증강시킨 서양의 열강들은 후진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에 비하여, 그동안 번영을 자랑하였던 을 비롯한 아시아의 전통 왕조들은 내부적인 취약성으로 인하여 점차 쇠약해져서 새로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17~18세기의 세계
17~18세기의 세계

[KH3 P.03-307 307] 서양 열강의 아시아 침략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위협으로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어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과 함께 개혁을 통하여 자강을 달성하려는 개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중국에서의 태평천국 운동양무 운동,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 인도에서의 세포이 항쟁스와라지 운동 등은 그러한 움직임이었다.

[KH3 P.03-308 308]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서양 열강에 마침내 복속되어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다만, 일본만은 서양 열강과 타협하여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KH3 P.03-309 309]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도 근대적 제도의 도입과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근대화의 길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로의 편입 과정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근대화는 여러 면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2) 통치 체제의 변화



정치 구조의 변화

비변사등록 | 비변사에서 논의, 결정한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1617(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의 등록이 남아 있다.
비변사등록 | 비변사에서 논의, 결정한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1617(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의 등록이 남아 있다.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2) 통치 체제의 변화 - 정치 구조의 변화]

[KH3 P.03-310 310]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 면에서도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언론 3사의 기능이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비변사는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이 때에는 국방 문제에 정통한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임시 회의 기구였다.

[KH3 P.03-311 311] 그 후 임진왜란을 맞아 국가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고위 관원들이 합의하는 기구의 필요성이 증대되자 비변사의 구성원이 확대되고 기능이 강화되었다. 비변사의 구성원은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들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 재정 · 사회 ·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에도 폐허의 복구와 사회 · 경제적 변동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붕당 간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비변사의 구성과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비변사의 구성원

임진왜란 이후 전 · 현직 정승을 비롯하여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참판,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 관원들로 확대되었다. 이에 비변사는 상설 기구가 되어 국가의 최고 정무 기구로 기능하였다.

[KH3 P.03-312 312]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왕권이 약화되고 의정부6조 중심의 행정 체계도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비변사가 세도 정치의 중심 기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KH3 P.03-313 313] 한편, 3사의 언론 기능도 변질되어 3사는 각 붕당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도 하였다. 3사는 공론을 반영하기보다는 상대 세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기 세력의 유지와 상대 세력의 견제에 앞장서고 있었다. 아울러 이조병조전랑들도 중하급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과 자기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상대 세력을 몰아 내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3사의 언론 기능과 전랑의 권한은 붕당 간의 대립을 격렬하게 만드는 장치로 인식되어 영조정조탕평 정치를 거치면서 혁파되었다.

비변사의 폐지

비변사는 흥선 대원군의 개혁으로 기능이 크게 약화되어, 일반 정무는 다시 의정부가 담당하고 국방 문제는 새로 설치된 삼군부가 담당하게 됨으로써 폐지되었다.


군사 제도의 변화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2) 통치 체제의 변화 - 군사 제도의 변화]

훈련도감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존의 활과 창으로 무장한 부대 외에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만들었다. 이에 훈련도감은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수가 지휘하게 하는 방어 체제

[KH3 P.03-314 314] 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 초기의 중앙군은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제가 일반화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조정에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갖는 군인이었다.

[KH3 P.03-315 315] 훈련도감에 이어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군영이 더 설치되었다.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 총융청 · 수어청 등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어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KH3 P.03-316 316] 한편, 붕당 정치기에 군영은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과 뒤이은 이괄의 난을 경험한 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인은 또 다른 군사적 도전을 막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장악하는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고 그 운영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KH3 P.03-317 317] 지방군의 방어 체제도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에 실시되던 진관 체제는 많은 외적의 침입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임진왜란 중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

[KH3 P.03-318 318]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양반들이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제되는 것을 회피함에 따라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다.



수취 제도의 개편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2) 통치 체제의 변화 - 수취 제도의 개편]

호패 |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패로 지금의 신분 증명서와 같다.
호패 |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패로 지금의 신분 증명서와 같다.

[KH3 P.03-319 319] 경제 구조의 변동과 신분제동요에 따라 수취 제도도 개편되었다. 지주제가 강화되어 가는 속에서 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잃고 전호임노동자로 전락하였으며, 과중한 수취로 인하여 생존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수취 제도를 개혁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 줌으로써 농민들의 불만 해소와 사회 안정을 도모하였다.

[KH3 P.03-320 320] 결국 전세영정법, 공납대동법, 군역균역법으로 바뀌어, 가난한 농민들의 부담은 줄이는 대신 지주의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 수취 제도가 개편되었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농민의 부담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KH3 P.03-321 321] 또, 향촌 지배 방식의 변화에 따라 수령향리들의 농민 수탈도 크게 늘어났다. 사족향촌자치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사족을 통하여 향촌을 지배하던 방식이 수령과 향리 중심의 지배 체제로 바뀌면서 이들의 농민 수탈이 더욱 심해졌다.

[KH3 P.03-322 322] 한편, 농민들의 향촌 사회 이탈을 막고 거주지에 묶어 두기 위하여 일종의 신분증인 호패를 착용하도록 하는 호패법을 다시 강화하고,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상호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제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3) 정쟁의 격화와 탕평 정치



붕당 정치의 변질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3) 정쟁의 격화와 탕평 정치 - 붕당 정치의 변질]

사림의 계보
사림의 계보

노론과 소론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에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KH3 P.03-323 323]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던 붕당 정치 형태가 무너졌다.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KH3 P.03-324 324]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정책의 수립과 상대 붕당의 탄압 과정에서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 간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은 남인과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고,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에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KH3 P.03-325 325] 이러한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왕실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또, 3사이조 전랑은 환국이 거듭되는 동안 공론을 무시한 채 자기 당의 이익만을 직접 대변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비중이 줄어들었다. 이에 정치 권력이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면서 그들의 합좌 기구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KH3 P.03-326 326]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 갔다.

[KH3 P.03-327 327]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붕당 정치의 폐해

신축 · 임인(1721 · 1722년) 이래로 조정에서 노론, 소론, 남인의 삼색(三色)이 날이 갈수록 더욱 사이가 나빠져 서로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모함하니 이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치게 되어 하나의 싸움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당색(黨色)끼리는 서로 용납 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대체로 당색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미미하였으나, 자손들이 그 조상의 당론을 지켜 200년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굳어져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고 말았다. …… 근래에 와서는 사색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예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斯文: 유학)을 위한 시비와 국가에 대한 충역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리니 ……. <택리지>


탕평론의 대두

탕평(蕩平)의 의미

탕평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대리청정(代理聽政)

왕을 대신하여 그 후계자로 지정된 사람이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는 정치 형태
이인좌의 난

1728년(영조 4)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정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3) 정쟁의 격화와 탕평 정치 - 탕평론의 대두]

[KH3 P.03-328 328]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KH3 P.03-329 329] 숙종은 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할 목적으로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군왕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절의와 덕행을 숭상하면서 인사 관리를 공정하게 한다면 붕당 사이의 갈등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KH3 P.03-330 330] 그러나 숙종의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론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 때의 잦은 환국은 숙종 말에서 경종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제(영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영조의 탕평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3) 정쟁의 격화와 탕평 정치 - 영조의 탕평 정치]

영조 어진(궁중 유물 전시관 소장)
영조 어진(궁중 유물 전시관 소장)

[KH3 P.03-331 331]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신이 노론과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여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는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노론 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KH3 P.03-332 332]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여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였다. 이에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1741).

[KH3 P.03-333 333]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다. 이에 정치 권력은 왕과 탕평파 대신 쪽으로 집중되었다.

[KH3 P.03-334 334]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고(1750), 군영을 정비하여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특히,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이러한 제도와 권력 구조의 개편 내용을 정리하여 속대전을 편찬함으로써 법전 체계도 재정리하였다.

[KH3 P.03-335 335]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가 자주 변란을 일으키면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조의 탕평 정치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3) 정쟁의 격화와 탕평 정치 - 정조의 탕평 정치]

시파(時派)와 벽파

시파는 사도 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었고, 벽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다.
규장각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갖는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의 어가(御駕) 부분(호암 미술관 소장) | 정조가 다녀오는 중 시흥 행궁에 도착한 모습을 그렸다. 이런 행차를 통하여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여론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 하였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의 어가(御駕) 부분(호암 미술관 소장) | 정조가 다녀오는 중 시흥 행궁에 도착한 모습을 그렸다. 이런 행차를 통하여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여론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 하였다.

[KH3 P.03-336 336] 사도 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 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KH3 P.03-337 337]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이에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엄격하게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 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다.

[KH3 P.03-338 338]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이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 · 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KH3 P.03-339 339] 한편,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화성 행차시에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다.

[KH3 P.03-340 340] 정조는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정조의 문물 제도 정비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다. 정조는 서얼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通共政策)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전통 문호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 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탕평 정치의 성격

탕평 정치는 왕이 중심이 되어서 붕당 정치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붕당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고, 사회 · 경제적 변화 위에서 지배층에 부분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탕평 정치는 근본적으로 왕권을 중심으로 권력의 집중과 정치 세력의 균형을 꾀하면서 기존 사회 체제를 재정비하여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러 정책들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정치 운영에서 왕의 개인적인 역량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어서 탕평 정치가 구조적인 틀을 갖추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4) 정치 질서의 변화



세도 정치의 전개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4) 정치 질서의 변화 - 세도 정치의 전개]

수렴청정(수렴청정)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살피면서, 신하들 앞에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앞에 발을 늘이고 정사에 임하는 정치 형태

[KH3 P.03-341 341]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된 권력은 결과적으로 19세기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권력의 핵심인 왕이 탕평 정치기에 행하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정치 세력 간의 균형이 다시 깨지고 몇몇 유력 가문 출신의 인물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KH3 P.03-342 342]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신유박해를 이용하여 정조규장각을 통하여 양성한 인물들을 대거 몰아 냈다. 또, 장용영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을 정상화시켜 이를 장악하였다.

[KH3 P.03-343 343] 그러나 곧 정순 왕후가 죽자 벽파 세력이 퇴조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김조순은 반남 박씨와 풍양 조씨 등 일부 유력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KH3 P.03-344 344]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 정치기에도 순조는 나름대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을 뒷받침해 줄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순조 말년에는 효명 세자대리청정을 통하여 세도가들을 견제하고 권력 집단을 결집하려 했으나, 갑자기 죽음으로써 이마저 실패하였다. 효명 세자가 죽은 뒤 김조순 가문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권력 집단을 재정립하였다.

[KH3 P.03-345 345] 헌종이 즉위하면서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가문이 한때 득세하였으나, 철종 때에 이르러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결국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는 흥선 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4) 정치 질서의 변화 -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KH3 P.03-346 346] 세도 정치기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나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적인 구도도 없어지고, 중앙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 집단은 소수의 가문 출신으로 좁아지면서 그 기반이 축소되었다. 유력한 가문들은 왕실 외척이거나 산림 또는 관료 가문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거나 대립하면서 인척 관계로 얽혀 하나의 정치 집단을 이루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였다.

[KH3 P.03-347 347] 한편, 권력 구조에서도 정2품 이상의 고위직만이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이하의 관리들은 언론 활동과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 기구의 골격을 이루어 온 의정부6조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는 이름만 남게 되었고, 실질적인 힘은 비변사로 집중되었다. 비변사에서도 실질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리는 대개 유력한 가문 출신 인물들이 차지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4) 정치 질서의 변화 - 세도 정치의 폐단]

[KH3 P.03-348 348] 19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위기 의식을 가지기는 했으나,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사회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을 피하면서 새로운 사회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KH3 P.03-349 349] 세도 정권은 19세기의 상업 발달과 서울의 도시적 번영에 만족하고,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 즉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또, 지방 사회에서 성장하던 상인, 부농들을 통치 집단 속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그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지방 수령의 자리를 상품화하여 팔기도 하였다.

[KH3 P.03-350 350] 또,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갖고 향리향임을 이용하여 조세를 걷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부정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더구나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KH3 P.03-351 351] 세도가들은 오랫동안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살면서 세련된 도시 귀족의 체질을 지녔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닦은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을 잡은 후 차츰 고증학에 치우쳐 개혁 의지를 상실하였고,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지방 사회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서 처와 자식에게 “요즘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 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 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목민심서>


5) 대외 관계의 변화



청과의 관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5) 대외 관계의 변화 - 청과의 관계]

[KH3 P.03-352 352]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북벌론은 실현 가능성이 적었고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었지만,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KH3 P.03-353 353]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우리나라의 사신들은 귀국 후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천리경, 자명종, 화포, 만국지도, 천주실의 등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KH3 P.03-354 354]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과 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1712).

[KH3 P.03-355 355]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간도는 우리가 불법적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일본과의 관계


[한국사: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정치 상황의 변동 - 5) 대외 관계의 변화 - 일본과의 관계]

통신사의 행로 | 일본에 간 조선의 통신사가 지나갔던 길이다. 일본에는 이 길을 중심으로 통신사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통신사의 행로 | 일본에 간 조선의 통신사가 지나갔던 길이다. 일본에는 이 길을 중심으로 통신사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KH3 P.03-356 356]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곧이어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동래부의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KH3 P.03-357 357] 한편,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이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여 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KH3 P.03-358 358] 한편,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 우리의 영토였으나, 일본 어민들이 자주 이 곳을 침범하여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그 후에도 일본 어민들의 침범이 계속되자,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통신사 행렬도(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 1711년(숙종 37)에 파견된 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정사(正使)의 행렬 부분이다.
통신사 행렬도(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 1711년(숙종 37)에 파견된 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정사(正使)의 행렬 부분이다.
심화과정: 서양의 근대 사회

① 17세기 전반 폴란드의 신학자 보에티우스(1588~1676)는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3시대 구분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기원 500~600년경까지를 '고대', 1517년까지를 '중간기', 그 이후를 새로운 세대, 즉 '근대'로 구분하였다.

② 17세기 말 독일의 역사학자 켈라리우스(1638~1707)는 유럽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3분하는 법을 일반화하였다. 그는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를 고대사, 1453년까지를 중세사, 그 이후를 근대사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시기 구분법은 보에티우스의 교회사 구분법을 세속의 역사에까지 확대시켜 적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③ 3시대 구분법을 정착시키고 단지 서양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의 시대 구분으로 일반화시키는데 기여하였던 것은 마르크스사회 발전 단계설이었다. 그는 고대를 노예제 사회, 중세를 봉건제 사회, 근대를 자본제 사회로 규정함으로써 3시대 구분법은 유럽사의 시대 구분에서 보편적인 역사 발전의 법칙으로 보강되었던 것이다.
  1. ①과 ②에서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사건들을 조사해 보자.
  2.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서양 근대 사회를 성립시킨 계기가 되는 사건을 정치 · 경제적으로 구분하여 조사하고, 그 의의를 토론해 보자.
심화과정: 동양의 근대 사회

동양보다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서양 사회는 아직 전근대 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던 동양으로 세력을 확대해 왔다. 흔히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동양 사회는 서양 세력의 노골적인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급격한 정치적 · 경제적 · 사상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근대의 초입에서 동양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떻게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 근대 민족 국가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1. 동양 사회에서 근대 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각 나라별로 조사해 보자.
  2. 동양 각국에서 민족 국가를 형성하기 위하여 기울인 노력을 조사하여 공통점을 추출해 보자.
심화과정: 조선 후기 사회의 근대적 맹아

근대 사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참정권이 전제되는 민주 정치가 구현되는 사회를 말한다. 참된 민주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가 신장되고 국민 각자가 공동체 구성원의 하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사회 각 계층이 평등한 사회를 뜻한다. 평등 사회의 출현은 지난날의 사회 체제를 붕괴시키고 피지배층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자유로운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을 뜻한다. 즉, 산업 활동이 다양해지고 활발해지면서 누구나 자유로이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풍부한 자본력과 전문적 경영 방식에 의하여 생산력의 증대가 추구되는 사회를 말한다. 사상적으로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합리화의 추구를 뜻한다. 즉, 절대적인 가치 체계에 의한 불합리한 구질서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적 경험을 존중하는 사회를 말한다.
  1. 조선 후기에 나타난 근대적 요소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사상적인 측면에서 조사해 보자.
  2.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율적, 주체적으로 이룩되었던 근대적 요소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추론해 보자.
심화과정: 붕당 정치의 올바른 이해

① 타율적 권위에 의존하여 자기를 주장하는 정신은 독립성이 없고, 그 곳에서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는 당파적 성격이 길러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혹은 특수한 사회 결합에 의존하여 당파를 맺는 것은 조선의 두드러진 국민성으로서, 정치, 사회의 대립에서부터 다 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붕당의 다툼은 스스로의 생활 의식의 대립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자학의 원리, 특히 예론에 따른 일종의 의존적 대립인 까닭에 종합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때는 없고, 언제까지나 의미 없는 대립으로서 성과 없는 항쟁을 계속한다. 그 항쟁의 길이에 있어서는 세계적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사 개설>

붕당 정치는 상대 세력과의 공존을 특색으로 하여 학파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각 붕당 사이의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즉, 붕당 정치는 공론에 입각하여 몇 개의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정치 체제이다.
  1. ①과 같은 주장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자.
  2. ②를 참고로 ①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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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내용
  • 2009/09/30 20:18: KSY Version 1.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