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KH2 P.02-01 001] 선사 시대는 문자 기록이 없었던 시대이므로 현존하는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는 세계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구분된다. 역사가는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을 바탕으로 고고학, 인류학, 지질학, 고생물학 등 인접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이 시기의 역사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서술하기도 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구성하기도 한다.
[KH2 P.02-02 002] 청동기 시대부터 국가가 형성되고, 이어서 철기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부터 문자를 사용한 역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유물이나 유적 이외에 남아 있는 기록을 참고하여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KH2 P.02-03 003]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였고, 곧이어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 만주와 한반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등장하였다.
[KH2 P.02-04 004] 선사 시대와 국가의 형성에 관한 학습을 통하여 역사가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을 익히고, 우리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어 발전하게 되었는지 역사의 뿌리를 살펴보도록 한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KH2 P.02-05 005] 선사 시대에 인류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자연 환경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역사를 이루어 갔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 · 청동기 시대 · 철기 시대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생활을 개선해 나갔다.
[KH2 P.02-06 006]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를 사용하여 채집과 사냥으로 식량을 마련하였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무리 생활을 하였다.
[KH2 P.02-07 007] 신석기 시대에는 간석기를 사용하여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토기를 제작하여 식량을 저장하였다. 이 시대에는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씨족을 중심으로 부족 사회를 이루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1) 선사 시대의 세계 - 인류의 기원]
[KH2 P.02-08 008]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만 ~ 35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화석이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이 현생 인류의 3분의 1 정도였으나, 직립 보행을 하여 두 손으로 간단하고 조잡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인류는 처음에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하다가 곧이어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KH2 P.02-09 009] 이후 인류는 지혜가 발달하면서 불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어 음식을 익혀 먹었고, 빙하기에도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사냥과 채집을 통하여 식량을 조달하게 되었고,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지니게 되었다.
[KH2 P.02-10 010] 구석기 시대 후기인 약 4만 년 전부터 진정한 의미의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두뇌 용량을 비롯한 체질상의 특징이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같으며, 현생 인류에 속하는 여러 인종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KH2 P.02-11 011] 이렇게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의 자연 환경에 적응하면서 문화를 창조해 나갔기 때문이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1) 선사 시대의 세계 -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명의 탄생]
[KH2 P.02-12 012] 기원전 1만년경에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생활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또다시 바뀌었다. 이에 구석기 시대가 지나고, 과도기인 중석기 시대를 거쳐 신석기 시대가 전개되었다.
[KH2 P.02-13 013] 신석기 시대의 문화는 농경과 목축의 시작, 간석기와 토기의 사용, 정착 생활과 촌락 공동체의 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식량 채집 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인류의 생활 양식은 크게 변하였다.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한다.
[KH2 P.02-14 014]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는 중동 지방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KH2 P.02-15 015] 기원전 3000년경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이집트의 나일 강, 인도의 인더스 강, 중국의 황허 강 유역에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들 큰 강 유역에서는 관개 농업의 발달, 청동기의 사용, 도시의 출현, 문자의 사용, 국가의 형성 등이 이루어져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모두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 이로써 인류는 선사 시대를 지나 역사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2)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 - 우리 민족의 기원]
[KH2 P.02-16 016]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요령(랴오닝) 성, 길림(지린)성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졌다.
[KH2 P.02-17 017] 어느 나라 역사에 있어서나 모든 종족은 인근에 사는 종족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을 형성해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선사 시대에 여러 민족이 문화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KH2 P.02-18 018] 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2)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 -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KH2 P.02-19 019] 우리나라와 그 주변 지역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이다. 구석기 시대는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KH2 P.02-20 020] 전기에는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중기에는 큰 몸돌에서 떼어 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손질을 하여 석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크기는 작아지고 점차 한 개의 석기가 하나의 쓰임새를 가지게 되었다. 후기에는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드는 데까지 발달하였다.
[KH2 P.02-21 021]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석기와 함께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 뼈로 만든 도구 등이 출토되어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2)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 - 구석기 시대의 생활]
[KH2 P.02-22 022]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점차 뗀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뚜렷한 작은 석기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 가운데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등은 사냥 도구이고 긁개, 밀개 등은 대표적인 조리 도구이다.
[KH2 P.02-23 023]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를 보여 주는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상원의 검은모루, 제천 창내,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막집 자리에는 기둥 자리, 담 자리 및 불 땐 자리가 남아 있다. 집터의 규모는 작은 것은 3 ~ 4명, 큰 것은 1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KH2 P.02-24 024]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를 이루어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생활하였다. 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권력을 갖지는 못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다.
[KH2 P.02-25 025]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 대표적인 석기로 슴베찌르개를 사용하였으며,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다.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에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으로 보인다.
주먹도끼 짐승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며,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뿌리를 캐는 등 여러 용도에 사용하는 만능 석기였다. 슴베찌르개 주로 구석기 시대 후기에 사용된 것으로 슴베(자루)가 달린 찌르개로서 창의 기능을 하였다. |
[KH2 P.02-26 026]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빙하기가 지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런 새로운 자연 환경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 시기의 사람들은 적합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큰 짐승 대신에 토끼, 여우, 새 등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하여 활을 사용하였다.
[KH2 P.02-27 027] 이 시기의 석기들은 더욱 작게 만들어진 잔석기로서, 한 개 내지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이음 도구에는 톱, 활, 창, 작살 등이 있었다.
[KH2 P.02-28 028] 한편,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동식물이 번성하게 되어 사람들은 식물의 채취와 고기잡이를 많이 하였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2)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 -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KH2 P.02-29 029]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돌을 갈아서 여러 가지 형태와 용도를 가진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부러지거나 무디어진 도구를 다시 갈아 손쉽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단단한 돌뿐만 아니라 무른 석질의 돌도 모두 이용하게 되었다. 또,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든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생활이 더욱 나아졌다.
[KH2 P.02-30 030]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시기의 토기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들은 무늬가 없는 것, 토기 몸체에 덧띠를 붙인 것, 눌러 찍은 무늬가 있는 것으로 각각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압인문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토기는 제주도 한경 고산리, 경남 고성 문암리,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등에서 발견되었다.
[KH2 P.02-31 031] 빗살무늬 토기가 나온 유적은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등으로 대부분 바닷가나 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도토리나 달걀 모양의 뾰족한 밑, 또는 둥근 밑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도 다양하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1. 선사 시대의 전개 - 2)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 - 신석기 시대의 생활]
[KH2 P.02-32 032]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어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쓴 주요 농기구로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농경은 집 근처의 조그만 텃밭을 이용하거나 강가의 퇴적지를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KH2 P.02-33 033] 농경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냥과 고기잡이가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사냥은 주로 활이나 창으로 사슴류와 멧돼지 등을 사냥하였고, 여러 가지 크기의 그물과 작살, 돌이나 뼈로 만든 낚시 등으로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 굴, 홍합 등 많은 조개류를 먹었는데, 때로는 깊은 곳에 사는 조개류를 잡아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KH2 P.02-34 034]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 이외에도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다.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KH2 P.02-35 035] 도구가 발달하고 농경이 시작되자 주거 생활도 개선되어 갔다. 집터는 대개 움집 자리로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다.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하였다.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KH2 P.02-36 036] 신석기 시대에는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을 기본 구성 단위로 하였다. 이들 씨족은 점차 다른 씨족과의 혼인을 통하여 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족 사회도 구석기 시대의 무리 사회와 같이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고, 연장자나 경험이 많은 자가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평등 사회였다.
[KH2 P.02-37 037]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다.
[KH2 P.02-38 038] 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고,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있었다.
[KH2 P.02-39 039]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있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KH2 P.02-40 040]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다. 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에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었다. 이후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과 대결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KH2 P.02-41 041]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가 보급되었고, 그 후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여러 나라가 성립되었다. 이 나라들은 철기를 사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독특한 사회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에 통합되었고, 일부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청동기의 보급]
[KH2 P.02-42 042]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 ~ 기원전 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하였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KH2 P.02-43 043]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유물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토기가 있다. 이들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집터를 비롯하여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등 당시의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
[KH2 P.02-44 044] 이 시기의 대표적인 동검인 비파형 동검은 만주로부터 한반도 전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파형 동검의 분포는 미송리식 토기 등과 함께 이 지역이 청동기 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속하였음을 보여 준다.
[KH2 P.02-45 045]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는 지역에 따라 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밑바닥이 편평한 원통 모양의 화분형과 밑바닥이 좁은 팽이형이 기본적인 모양이며, 빛깔은 적갈색이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철기의 사용]
[KH2 P.02-46 046]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특히,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확대되었다. 철제 무기와 철제 연모를 쓰게 됨에 따라 그 때까지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였다.
[KH2 P.02-47 047] 한편,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또,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에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KH2 P.02-48 048]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 시대 후반 이후에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하던 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KH2 P.02-49 049] 토기는 민무늬 토기 이외에 입술 단면에 원형 · 타원형 · 삼각형의 덧띠를 붙인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등도 사용되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청동기 · 철기 시대의 생활]
[KH2 P.02-50 050] 청동기 · 철기 시대에는 이전부터 주요한 생산 도구로 사용되던 간석기가 매우 다양해지고 기능도 개선되어 생산 경제도 좀더 발달하였다.
[KH2 P.02-51 051]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업은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농경의 발달로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들었고 돼지, 소, 말 등 가축의 사육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KH2 P.02-52 052] 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는 곳에 우물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취락 여건으로, 오늘날 농촌의 자연 취락과 비슷한 모습이다.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며,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움집 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창고와 같은 독립된 저장 시설을 집 밖에 따로 만들기도 하였고, 움집을 세우는 데에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KH2 P.02-53 053] 집터는 넓은 지역에 많은 수가 밀집되어 취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제주시 삼양동의 경우, 철기 시대 전기의 계급 사회의 발생을 알려 주는 대규모의 집터(마을)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농경의 발달과 인구의 생활증가로 정착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같은 지역의 집터라 하더라도 그 넓이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 의식 장소 등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KH2 P.02-54 054] 이를 통하여 사회 조직이 점차 발달하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보통의 집터는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4 ~ 8명 정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로, 이는 한 가족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KH2 P.02-55 055]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은 주로 집 안에서 집안일을 담당하고 남성은 농경, 전쟁과 같은 바깥일에 종사하였다. 한편,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생기게 되자 힘이 강한 자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사유화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와 계급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계급의 분화는 죽은 뒤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무덤의 크기와 껴묻거리의 내용에 반영되었다.
[KH2 P.02-56 056]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이 만들어졌고, 철기 시대에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계급 사회의 발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무덤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전형적인 형태는 보통 북방식에서 볼 수 있듯이 4개의 판석 형태의 굄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KH2 P.02-57 057] 고인돌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KH2 P.02-58 058] 정치 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족들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 사상을 가지고, 주변의 약한 부족을 통합하거나 정복하고 공납을 요구하였다. 청동이나 철로 된 금속제 무기의 사용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를 계기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평등 사회는 계급 사회로 바뀌어 갔고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나타났는데, 이런 지배자를 족장(군장)이라고 한다. 족장은 청동기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한 북부 지역에서 먼저 등장하였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청동기 · 철기 시대의 예술]
[KH2 P.02-59 059] 사회와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나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사용했던 칼, 거울, 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KH2 P.02-60 060] 청동으로 만든 도구의 모양이나 장식에는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의식용 도구에는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 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도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KH2 P.02-61 061] 바위 면에 새긴 바위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것으로 보인다.
[KH2 P.02-62 062] 고령 양전동 알터의 바위그림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KH2 P.02-63 063]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바위 그림 유적은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 농업 사회에서 보이는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로운 생산을 비는 제사 터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단군과 고조선
[KH2 P.02-64 064]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 갔다.
[KH2 P.02-65 065]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KH2 P.02-66 066]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KH2 P.02-67 067]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KH2 P.02-68 068]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되는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KH2 P.02-69 069]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KH2 P.02-70 070] 이 시기의 사람들은 주로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의 사회 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는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통치 이념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였다.
[KH2 P.02-71 071]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KH2 P.02-72 072] 단군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지배자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KH2 P.02-73 073]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위만의 집권
[KH2 P.02-74 074]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 · 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KH2 P.02-75 075]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KH2 P.02-76 076]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KH2 P.02-77 077]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였다.
[KH2 P.02-78 078]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KH2 P.02-79 079]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 고조선의 사회
[KH2 P.02-80 080]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호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KH2 P.02-81 081] 한의 군현이 설치된 후 억압과 수탈을 당하던 토착민들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의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 조로 증가하였고, 풍속도 각박해져 갔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2) 여러 나라의 성장 - 부여
[KH2 P.02-82 082]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KH2 P.02-83 083]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KH2 P.02-84 084]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 서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KH2 P.02-85 085]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KH2 P.02-86 086]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KH2 P.02-87 087]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2) 여러 나라의 성장 - 고구려
[KH2 P.02-88 088]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B.C.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KH2 P.02-89 089]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가의 국내성(통구)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부전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다.
[KH2 P.02-90 090]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 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서옥제(壻屋制) 혼인을 정한 뒤 신부 집의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고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이다. |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2) 여러 나라의 성장 - 옥저와 동예
[KH2 P.02-91 091]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KH2 P.02-92 092]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옥저는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으며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의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KH2 P.02-93 093]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한국사: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2. 국가의 형성 - 2) 여러 나라의 성장 - 삼한(한)
[KH2 P.02-94 094]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KH2 P.02-95 095] 마한은 천안 · 익산 ·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 · 충청 ·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KH2 P.02-96 096] 변한은 김해 ·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 ·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였다.
[KH2 P.02-97 097]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 세력이 큰 것은 신지, 견지 등으로, 작은 것은 부례, 읍차 등으로 불렸다.
[KH2 P.02-98 098]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KH2 P.02-99 099]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 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KH2 P.02-100 100]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의 수릿날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KH2 P.02-101 101]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KH2 P.02-102 102] 이와 같은 철기 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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